1980 애플 소매점 모험

1980 애플 소매점 모험

Early Apple Retail Adventures

AppleBy Jean-Louis Gassée April 4, 2016
이번 주, 우리가 애플의 첫 40주년을 돌아 보면서 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있었던 애플의 반-직관적인 소매사업 개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필자는 언제나 소매사업을 사랑했으며, 소매사업도 필자를 사랑했다. 물론 이제 보시게 되겠지만 방식이 좀 독특하기는 했다.
필자 인생 첫 41년 동안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면서, 필자는 대규모 소매 체인망이 어떻게 성장하고, 얼마나 강력해지며, 얼마나 포악해지는지 지켜봤었다. 하이퍼마켓(hypermarché)이라는 단어를 고안한 양판점인 카르푸(Carrefour)가 존경 받던 한 요구르트 업체에게, 어떤 맛을 어느 정도 물량으로, 어떤 일정에, 마케팅과 브랜딩, 반납은 어때야 하는지, 물론 얼마나 당신들에게 우리가 언제 지불할지를 요구했던 광경도 목격했다.
기숙사 학교에 다니면서 필자는 브르통의 농부들이 파는 도매가의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파리에서 아티초크가 팔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수십 년 후, 대규모 유통망의 권력에 대한 프랑스 농부들의 불만은 완화된 수입 기준의 효과로 전에 없이 더 커지고 폭력화됐다.)
HP에 있었던 70년대 초, 필자는 최전선에서 HP의 획기적인 주머니용 컴퓨터
의 대규모 소매 판매점들의 장악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필자는 대규모 판매점들의 억제되지 않는 힘이 싫었고, 나중에는 이제 정말 적절한 표현을 하나 발견했다.
Content Is King, But Distribution Is King Kong
마음 속의 이러한 권력 투쟁으로 인해, 필자는 애플 프랑스를 1981년 시작했을 때, 대규모 소매점을 운전석에 앉히고 싶지 않았다.
소매점 채널망을 미국에서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알고 싶어서, 필자는 캘리포니아로 간 다음, 쿠퍼티노 본사로 가서 곱게 나이 든 보스들에게 필자를 소개했다. 초창기 여기 글에서 얘기했듯, 필자는 당혹스러웠다. 애플 영업 조직은 소매점 관리 임무를 독립 판매 대표들(Manufacturers’ Representatives)에게 맡겨버렸었다.
실제로 몇 분 떨어진 딜러샵을 방문했을 때, 가게 주인은 필자가 애플 본사에서 온 최초의 인물이라며 따뜻하게 맞이해줬다. 그래서 필자는 본사로 복귀한 다음, 영업 관리자에게 (어쩌면) 너무나 프랑스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각 판매 대표들의 기술적인 식견과 제품, 브랜드에 대한 헌신이 어떤지 말이다. 관리자는 결합이 완벽하다 주장했다. 당신 일에나 신경 쓰쇼.
프랑스로 돌아갔다. 정말 말그대로 프랑스로 돌아간 필자는 다행히도 쿠퍼티노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본부의 관심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애플 유럽부 지사장인 톰 로렌스(Tom Lawrence, 이색적인 스타일 때문에 ‘유럽의 로렌스’라 불렸으며 그가 매우 그립다)는 필자를 좋아하여 필자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선사했다.
우선은 이전에 애플 제품을 수입해왔던 Sonotec의 소매망에 직접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직접 서비스(direct service)”라 함은 기술 사양을 잘 아는 영업사원과 리셀러를 최대한 쉽게 하게 해 주고 이윤을 최대한 많이 내 줄 유통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모두 훌륭하지만 좀 이가 빠졌다. 너무 일반적이어서 Can You Disagree 테스트를 통과 못 했다.
Pricing provided the teeth.
당시 관찰했듯, 대량 구매 할인을 냉큼 받아들이는 일은 지옥으로 향하는 첫 번째 길목이었다. 대규모 소매점은 컴퓨터를 할인가로 대량 구매한 다음, 자신들의 두터운 마진으로 고용을 더 한다거나 이미 있는 인력과 부서를 훈련 시키지 않고, 경쟁을 몰아내기 위해 제품 가격을 깎는다. 즉, 하이퍼마켓에서 요구르트를 파는 식으로 애플 제품을 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가격을 떨어뜨릴 수 없는 더 작은 규모의 소매점은 할인마들 사이에 끼어서 살해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작은 규모의 소매점들은 되려 열정적이고 애플 제품의 가장 경쟁력 있는 홍보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기꺼이 시간을 더 내서 제품을 설명하려 하고, 판매 이후에도 질문에 답해줬으며 손님마다 개별화 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래서 우리는 관행에 맞섰고, 단일 가격을 고집했다. 많이 구매한다고 할인은 없다.
우리의 결정을 당연히들 싫어했다. 한 대규모 소매점은 우리에게 애플 ][를 암시장에 내놓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역언어(문서와 키보드 레이아웃)와 단일 가격, 공급망에 대한 우리의 통제 때문에 암시장 직행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어떤 소매점은 우리를 여러가지 불순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우리의 제풀에 지칠 때까지 하루에 컴퓨터 한 대 씩만 주문하겠노라 빈정대기도 했었다.
여기서, 일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여 필자를 그들의 어깨 위로 올린 주역 세 명을 소개한다. (그냥 비유한 것이 아니다. 끝에서 보시겠지만 필자는 정말로 그들로부터 빚을 졌다.)
첫째 인물, 미셸 들롱(Michel Delong)이다. 원래 HP 프랑스 지사에 있었던 우리의 유통 마법사인 미셸은 프랑스 어디든 하룻 밤만에 갖다 놓을 수 있는 조직을 구축했다. 조광이 잘 들고 즐거운 우리의 창고는 미셸이 HP에서 자기와 함께 데려온 장-피에르 타스테(Jean-Pierre Tastet)가 관리했고, 우리의 창고는 소매점을 하고 싶다거나 최종 사용자들에게도 반드시 봐야 할 장소가 됐다.
쟝 칼몽(Jean Calmon)도 있다. IBM 출신(자기 말로는 애플 분위기 때문에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으로서 딜러들이 더 주문을 하도록 유인만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팔 수 있을지를 돕는, 기술적으로 능력이 있는 영업 사원들 그룹을 이끌었다.
우리 경쟁자들의 전략은 단순했다. 채널망을 “채우고” 딜러들을 모아서 최대한 많이 주문토록 한 다음에, 다른 브랜드로 넘어갈 재정적인 자원을 다 소모시켜버리자이다. 칼몽은 애플 소매점들이 1주일 판매치 이상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으로 이 전략에 대항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더 많은 제품을 위한 현금이 제공됐을 때 이전 주문량 만큼만 소량만 공급했다.
전통을 벗어난 점은 또 하나 있었다. 우리의 영업 사원들은 커미션을 받지 않았다. 능력 있고 봉급이 괜찮다면, 역량을 발휘할 때 당근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다른 인센티브를 사용했다. 매일 아침, 각자 책상 앞에 동일한 내용의 문서를 갖다 놓았다. 이 문서는 지난 한 주 동안, 한 달 동안, 연대비로 무엇을 팔았는지에 대한 목록이었다. 봉급 인상과 (흔치 않은) 퇴직 면접이 잇따랐다.
마지막으로 역시 중요한 인물, 질 무쇼네(Gilles Mouchonnet)를 소개한다. Data General 출신으로서 우리의 재무 건전성을 총괄했다. 이 사내의 손은 크레딧 수도꼭지랄 수 있었다. 30일마다 한 번씩 각 리셀러들에게 과거 실적과 신용 평점과 같은 크레딧을 부여을 부여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런 방식을 미국스러운(très Americain) 천박함이라 비웃고 프랑스 관례에 따라 무시하곤 했지만, 우리는 강행했다. 수정을 좀 했지만 말이다. 30일을 넘는 미지불 청구서가 없다고 해 보자. 그러면 더 많은 제품을 주문할 때, 그 리셀러에게 우리가 현재 청구서의 일부라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주문이 있는 경우 크레딧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들 3두 덕분에 행운아였다. 안타깝게도 이 세 친구 중 둘(미셸과 질)은 몇 년 전 세상을 타개했다.
서비스 지향적인 영업과 최고 속도의 유통, 재무통의 견고한 신용 관리가 이루는 조합은 너무나 강력하고 효율적이었다. 이 시스템을 누가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리셀러망을 통제하려는 우리의 상호 이해관계가 그냥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바람직한 제품을 또한 상당한 도움이 됐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우리는 제품을 “밀어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끌려 들어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마케팅 캠페인이 어땠든지 간에, 우리는 기존의 힘 강화를 노력했다. (제품을 밀어내야 한다면 고단한 삶이 놓이게 된다. 재고(再考)를 고려하시라.)
처음에는 소규모 소매점들도 좀 회의적이었다. 단일 가격제가 예술적인 오기(誤記)인지 대놓고 궁금해 했었다. 광고 지원의 형태 아래 끼워 주는, 악명 높은 “커미션(soft dollars)”의 형태인지, 아니면 실적에 따른 연말 지불과 같은 공정치 못한 상여금 종류인지? 하지만 우리의 행동이 말해줬고, 그들도 가격으로는 제한적인 경쟁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은 서비스 경쟁을 할 수 있을 마진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애플 제품의 이미지와 판매에도 도움이 됐다.
오랫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한 대형 소매점이 애플 제품으로 다른 리셀러들이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알아내고는 자기들도 끼고자 했다. 대규모 주문을 놓았고 즉각 배달됐으며, 소비자들을 “끌어당겼다.” 그래서 두 번째 주문이 나왔는데, 유통 부문에서 사과했다. “더 이상은 출하가 안 됩니다. 크레딧이 다 찼어요.” “뭐라? 우리 크레딧이 그리 안 좋나?” 분개한 나머지 재무실로 전화가 연결됐고, 그는 해당 대형 소매점이 비용 지불에 대한 무신경한 태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크레딧 한계가 낮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리스크는 완화시켜야 하는 법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필자에게 전화가 연결됐다. 나는 전화 건 사람을 알고 있었고, 글로 쓰기에는 부적당한 비유를 하면서 모두를 똑같이 대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합니다. 당신은 지불하고요.” 그는 수표를 약속했고, 즉각적인 출하를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다른 접근을 제공했다. 쟝 칼몽의 영업사원 하나를 보냈다. 우선 수표를 모은 다음에서야 출하를 해 줄 참이었다.
재미와 이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애플 프랑스는 미국을 뺀 제일 거대한 애플 지사가 됐고, 프랑스의 모든 문화적인 전통과는 달리, 프랑스 리셀러들은 미국 리셀러들보다도 더 빠르게 대금을 지불했다.
1985년, 대규모 소매점에게 거둔 승리 경력으로 인해, 필자는 타당한 다음 자리를 제안 받는다. 쿠퍼티노의 애플 엔지니어링 운영이다. 내 팔자야.
JLG@mondaynote.com
http://www.mondaynote.com/2016/04/04/early-apple-retail-adventures/
번역 : 위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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