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탄생 설화

트위터 탄생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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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Is Fair in Love and Twitter

By NICK BILTON
Published: October 9, 2013

샌프란시스코 금융 구역 가까이, 거대한 잔디밭인 사우스 파크 중심부에는 싸구려 미끄럼틀과 사다리, 소화전이 놓여 있다. 모두 다 움푹 패여 있으며 모래같은 갈색의 철탑에 연결돼 있다. 실리콘밸리에 이렇게 움푹 패인 놀이터가 많지만, 전설에 따르면 2006년 산들바람이 불던 어느 날, 잭 도시(Jack Dorsey)가 두 명의 동료와 함께 부리토를 주문하고 미끄럼틀을 탔으며, 시나이 산의 모세가 긱이었다면 입었을 검정색 스웨터와 함께 녹색 비니를 썼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사용자들이 현재 상태를 업데이트하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의 아이디어를 제시했었다. 하얀색 디오르 드레스 셔츠와 어두운 양복 상의를 입은 도시가 올해 초 CNBC에서 했던 말이다. “그 놀이터야말로 제가 처음 아이디어를 냈던 곳이죠.”

그러자 인터뷰 질문자가 혹시 트위터 아이디어냐고 물었다. 도시는 “네”라 답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아이디어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존재다. 모든 카페와 주점, 기술 컨퍼런스에는 마치 스크립트를 흔드는 시나리오 작가들처럼, 차기 히트작이라며 앱이나 사이트를 보여주려 애쓰는 신생 업체 창업자들로 들끓는다. 그렇지만 신생 기업의 75%는 실패한다. 아이디어가 나빠서가 아닌 경우가 보통이며(물론 나쁜 아이디어도 분명 있다), 다른 문제점도 많다. 돈이 너무 많다거나 하여 자기 무게를 못 이겨 스러지는 경우도 있으며, 생존을 위한 증자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안 좋은 경영과 실제로 기업 운영의 경험이 없는 창업자들 끼리의 내부 투쟁으로 인해 파멸하는 경우도 있다.

성공하는 경우는 보통 운이 매우 좋아서다. 구글이 17억 달러를 들여 인수했을 때, 유튜브는 그저 영상을 공유하는 10여 곳의 사이트 중 하나였을 뿐이다. 페이스북이 10억 달러를 들여 인수했을 때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공유하는 최초의 아이튠스 앱이 아니었다. 트위터 역시 상태를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최초의 장소가 아니었다. 트위터는 분명 운이 제일 좋은 경우다. 유명 인사들이 트위터에 가입했고, 그 다음에는 여왕과 대통령, 언론, 물론 저스틴 비버(Justin Bieber)도 가입했으니 말이다. 창업한지 7년이 흐른 후, 트위터는 직원 수가 2천 명 이상으로 늘었고, 실질적인 사용자가 2억 명이 넘었으며, 시가는 160억 달러에 이르렀다. 주식 공개를 하게 되면 트위터의 공동 창업자와 직원들, 투자자들은 대단히 큰 부자가 될 터였다. 공동 창업자이자, 첫 해 자기 돈을 들여서 트위터를 세웠던 에반 윌리엄스(Evan Williams)는 10억 달러 이상을 벌 터였고, 트위터의 사장이자 실질적인 지휘자인 도시는 수 억 달러를 벌 터였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에서 행운은 오히려 불길함의 비유일 수도 있다. 트위터는 사우스파크 놀이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도시만의 아이디어도 아니었다. 사실 도시는 트위터가 뜨기 전, 트위터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공동 창업자를 추방한 인물로서 나중에는 스스로도 쫓겨났다(그때 그는 비밀스럽게 제일 큰 경쟁사에 가담할 것을 고려했었다). 그렇지만 행운은 행운, 도시는 다시금 트위터로 돌아와서 트위터를 보다 성숙한 기업으로 만들 수 있었다. 아마도 제일 큰 행운은, 모호한 아이디어였던 트위터를 수 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으로 바꿔낸 것이 뭣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탄생 설화에는 보통 실리콘 밸리에서 보통 이상의 중요성이 있다. 스티브 잡스는 리드(Reed) 대학교를 중퇴, 세계를 여행했으며 존 바에즈(Joan Baez)와 데이트하고 혁명적인 컴퓨터 기업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하바드 기숙사에서 매력적인 여학생 순위를 매기면서 페이스북의 초기 코드를 작성했었다. 실리콘 밸리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창조 설화(Creation Myth)”라 불린다. 실화에 기반을 두기는 했지만 기술 기업 창업에 있어서 온갖 혼란과 배반을 다 숨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원작에는 과장이 있게 마련이어서, 트위터는 범상치 않은 과장된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다.

2005년, 잭 도시는 종종 앞에 전화 번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코에 링을 끼우고 다니는 29세의 뉴욕 대학교 중퇴자였다. 석달간 Alcatraz 보트-투어 여행사 사이트 코드를 작성한 후,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당시 그는 해안가의 신발 가게, Camper으로부터 입사를 거절 당했었다.

그러다가 사우스 파크에 있는 Caffè Centro에 앉았던 어느 날 아침,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도시는 이어폰으로 펑크 음악을 들으며 노트북에 몰두해 있었는데, 또래의 한 사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시 33세였던 에반 윌리엄스는 샌프란시스코 기술 업계에서 유명세가 약간 있었다. 몇 년 전, 그는 공동 창업했던 웹-일기 서비스인 Blogger(그가 대중화 시킨 단어다)를 구글에게 수 백만 달러 받고 매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윌리엄스는 블로거 매각 자금을 갖고 새로이 포드캐스트를 만드는 업체인 Odeo를 세웠다. Odeo의 공동 창업자로는 이웃이자 친구인 노아 글래스(Noah Glass)가 있었다. Odeo의 본사는 거무죽죽한 다락방이었으며, 사우스 파크 바로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다. 윌리엄스가 카페에 들어와 커피 한 잔 주문한 것이었다.

어릴 때 연설 장애와 싸워야 할 정도로 수줍은 성격이었던 도시는 개인적으로 자신을 소개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컴퓨터에 자기 이력서를 열고는, Camper 신발 가게에서 일하고 싶은 듯 한 분위기가 보이는 부분을 무조건 지웠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윌리엄스의 이메일 주소를 발견하여 Odeo가 혹시 고용을 하고 있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Odeo에 대한 투자로 CEO가 됐던 윌리엄스는 곧 그를 불러서 면접을 봤다. 둘 다 대학 중퇴자였던 글래스와 윌리엄스는 스탠포드 대학원생들보다 선동가 스타일을 더 선호했으며, 코에 링이 있고 부스스한 머리의 도시는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도시는 곧바로 프리랜스 엔지니어로 고용됐고 회사에 너무 적응을 잘 하여, 회사에서 주마다 열리는 “[욕 삭제] 일 끝내기” 대회에서 종종 우승하고는 했었다. 퇴근 후에 그는 도시 주변을 자전거를 타며 돌아다니거나 콘서트에 가고, 술집에 들어가 늦게까지 기술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도시와 글래스는 곧 뗄 수 없는 친구가 됐다.

실리콘 밸리의 여느 기업가들처럼, 글래스는 일과 개인 생활 간에 구분이 없었다. 친구들 모임과 사무실 회의 역시 구분이 불가능했다. 기술 업계에서 일하지 않는 부인과 남편들도 MySQL에 대한 농담을 들어야 했다는 얘기다. 경계가 흐릿한 접근은 Odeo가 괜찮을 때에는 잘 작동했지만, 애플이 아이튠스에 포드캐스트를 추가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2005년 말, 윌리엄스와 글래스는 회사의 미래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결정 내리기가 느리기로 유명했던 윌리엄스는 Odeo 문을 닫을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한편으로는 Odeo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짜내서 회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결혼 생활마저 파탄나면서 그의 스트레스는 악화됐다.

2006년 2월의 어느 날, 새벽 2시 쯤이었다. 도시와 글래스는 비가 퍼 부울 때 글래스가 주차한 차에 도시도 앉아 있었다. 둘은 밤새 보드카와 레드불을 마신 후 술이 깨 있었지만 대화 주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Odeo였다. 도시는 무심결에 출구 전략을 계획중이라 말해버렸다. 글래스의 기억에 따르면 도시는 “아예 기술 업계를 떠나서 패션 디자이너나 할까봐요”라 말했다. 게다가 세계 여행도 하고 싶어했다. 글래스는 도시가 업계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지 않겠냐며 설득하고, “혹시 흥미로운 다른 분야가 있으면 말 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시는 자기가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등, 자신의 현재 상황을 공유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언급했다. 도시는 사람들이 “주차하러 감”이나 “잠” 등, 자신에 대해 가장 간단한 디테일을 방송하는 데에 이 사이트를 사용할 것이라 했다.

글래스는 도시의 상태 공유 아이디어를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어서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거의 10년 정도 전, 사람들이 AOL 인스턴트 메신저에 “자리 비움”이라 표시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또한 글래스는 이 아이디어가 휴대폰으로 현재 위치를 공유하면서 노트를 추가 시킬 수 있도록 한 서비스인 Dodgeball 등, 다른 신생 기업과 너무 유사하다고 봤다.

도시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글래스는 그가 창 밖을 쳐다봤다고 기억했다. 그는 결혼 실패로 인해 얼마나 외로운지 생각했었다. 그때 유레카의 순간이 있었다. 상태 표시라는 것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뭔지, 어디에 있는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였다. 대화가 될 수 있었다. 뭐가 뭐라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이 문제였다. 바로 여기에 진짜배기 사업이 들어갈 여지가 있었다. 그런 서비스라면 분명 그도 좋아할 터였다. 아파트에 혼자 있든, 사무실에 혼자 있든, 자동차에 혼자 있든 꾸준히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대화를 하면 덜 외로울 터였다. 그래서 둘은 좀 더 아이디어를 모아 봤다. 도시가 자동차를 나와 집에 가려 하자 글래스는 “에반(윌리엄스)이랑 다른 사람들에게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2006년 2월 27일, 도시와 글래스는 Odeo의 회의실에 들어가서 윌리엄스 및 Blogger 시절부터 윌리엄스의 친구이자 Odeo의 동료인 스톤(Biz Stone)에게 아이디어를 얘기해 줬다. 윌리엄스와 다른 동료들은 수 주일 동안 유사한 아이디어 작업을 해 오고 있었고, 그들은 그 아이디어를 “Groups”라 불렀었다. 음성 클립을 통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연결하자는 새벽에 나왔던 아이디어가 더 그럴듯했다. 글래스는 곧 프로젝트를 맡아서 사이트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기능 목록을 적었다. 업데이트를 공유했을 때 사람들에게 알리는 타임 스탬프(time stamp)를 포함, 통합 요소를 그가 추가 시켰다. 스톤은 디자인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도시와 다른 프로그래머인 웨버(Florian Weber)는 코딩을 시작했다. 윌리엄스는 사람들의 지난 메시지를 스트림 형태로 나타내는 블로그 비슷한 탬블릿을 밀었다.

곧, 작명의 문제가 나타났다. 윌리엄스는 이 프로젝트를 농담 삼아, “Friendstalker”라 불렀지만, 이 이름은 너무 오싹했다. 글래스는 올바른 이름을 짓기 위해 직접 사전을 뒤져가면서 단어를 하나 하나 알아 봤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오후, 아파트에 혼자 있던 그는 휴대폰을 집고 진동 모드로 바꿔 놓았다. 순간 그는 “진동(Vibrate)”을 생각했지만 이내 취소했다. 하지만 진동 때문에 “경련(twitch)”이라는 단어도 생각났다.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Tw”로 시작하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았다. twist, twit, twitch, twitcher, twitchy … 그리고 단어가 나왔다. 그는 정의를 크게 읽었다. “특정 새들의 지저귀는 가벼운 짹짹 소리”,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이나 흥분, 파닥임”의 의미, 바로 트위터였다.

몇 주일 후, 회의 몇 번과 파생된 아이디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거친 후, 윌리엄스는 글래스와 도시의 컨셉을 갖고 나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윌리엄스가 글래스 및 다른 Odeo 간부진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우리의 새 프로젝트의 작명에 대해 저는 트위터를 강하게 추천합니다. 훨씬 더 많은 논의를 물론 할 수 있었을 테고, 제 마음도 바뀔 수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 제 본능은 이 서비스를 트위터로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전히 Odeo에서 부하 직원이었던 도시는 이 이메일이 보내진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는 곧 새로운 트위터 팀의 중요 엔지니어가 됐다. 그리고 2006년 3월, 도시는 첫 번째 트윗을 보냈고 곧 스톤과 글래스가 팔로우(follow)를 했다. (결국 도시는 트윗을 160자로 제한키로 한다. 휴대폰에서 보낼 수 있는 문자 최대치였다. 이 제한은 곧 140자로 더 낮춰진다.)

그러나 새로운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윌리엄스와 글래스 간에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사실 Odeo에서도 그랬지만 그 갈등이 트위터로 옮겨간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호하려 하고 이혼 때문에 산만했던 그는 점차 초조해지고 불안해 했다. 잘 알려진 기술 기업가를 실수로 서비스 가입 시켰을 때 글래스는 엄청나게 부하 직원을 비난했다. “이 사람은 우리 적이야!”고 외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지도가 필요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거야.” 그는 또한 도시를 끌어내서 윌리엄스가 자기를 쫓아내려 한다는 말도 고백했었다.

하지만 글래스가 모르는 사항이 있었다. 도시도 그를 쫓아내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상태 업데이터가 도시의 아이디어만이 아니라고 제대로 주장할 수 잇는 유일한 인물이 글래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글래스의 취약함도 한 몫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도시는 윌리엄스를 만나 글래스가 나가지 않으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위협했고, 윌리엄스 입장에서 이 문제는 쉬웠다. 도시는 트위터의 엔지니어 리더가 됐고 글래스의 개인 문제는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회사 일부가 아예 글래스의 IBM 노트북에만 존재했던 적도 있었다.) Odeo 이사진과 상의한 다음, 2006년 7월 26일 수요일 오후 6시, 윌리엄스는 글래스에게 사우스 파크 산책이나 가자고 요청했다. 녹색 벤치에 앉아 윌리엄스는 오랜 친구에게 결정 사항을 알려 줬다. 6개월 간의 고용 유예 및 6개월간 Odeo 지분의 귀속이 없으면 공개적으로 해고되리라는 통보였다. 그리고는 이 결정이 오로지 자기 독단이라 말했다.

그날 저녁, 패배한 글래스는 근처 클럽에서 도시를 만나 늦게까지 마셨다. 그들은 바에 서서 술을 마셨고 글래스는 낮에 당한 시련을 털어 놓았다. 도시는 말문이 막힌 듯 행동했고 윌리엄스를 비난했다. 클럽이 문 닫을 때가 되자, 글래스는 친구를 안아 주고 집으로 갔다. 2주일 후, 그는 자기가 공동 창업했던 기업에서 쫓겨났고, 도시는 곧 트위터의 CEO가 됐다.

기업을 새로 차린 창업자들이 스스로를 “기업가(entrepreneurs)”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실리콘 밸리 최대의 이상한 점이다. 기업용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업에서 어떻게 이윤을 내는지 전혀 이해를 못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가와 그들에게 재정을 투자하는 벤처 투자자 간의 관계에 갈등이 생긴다. 인스타그램의 공동 창업자인 시스트롬(Kevin Systrom)도 초창기 투자자였던 벤처 투자 회사인 안드레센 호로윗츠(Andreessen Horowitz)가 경쟁자가 됐을 때 뭔가 무시당한 느낌이었다. 벤처 투자가들이 텀블러의 창업자인 카프(David Karp)를 못 참은 나머지 카프가 이윤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투자자들은 야후로의 매각 이전에 카프의 제거를 논의하기도 했었다. 결국은 돈이 상처를 치유한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부를 창출해내는 인물들이 실리콘 밸리에 있었다. 전국 벤처투자협회(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에 따르면 신생 기업들이 한 해 동안 유치하는 벤처 투자 자금이 200억 달러가 넘을 수 있다고 한다.

2007년 실리콘 밸리의 벤처 투자사들은 소비자와 대기업들로부터 소셜 네트워크로 관심을 옮겼다. 당시 마이스페이스(그때는 MySpace라 적었다)와 프렌드스터(Friendster)는 10대 청소년들의 놀이터였고, 페이스북이라 불리는 기업은 이미 대학교 기숙사에서 빠르게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야후는 소셜 사진 사이트인 플리커를 4천만 달러에 인수했고, 트위터의 140자 마이크로블로깅 서비스를 비웃은 관측통도 있었지만 자기 돈으로 자본을 조달했던 윌리엄스는 Blogger로 인한 견고한 명성을 쌓은 상태였다. 글래스가 축출된지 1년 후, 윌리엄스는 Union Square Ventures의 강력한 파트너인 윌슨(Fred Wilson)을 포함하는 투자자들로부터 5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자금을 주는 대신 벤처 투자자들은 당장이 아니더라도 이윤을 내리라는 약속을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도시를 더 나은 관리자로 빨리 탈바꿈 시켜야 했다. 도시의 해커스러운 성격이 엔지니어로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프로그래머들을 이끄는 역할에서는 도움이 안 될 수 있었다. 실제로 도시의 무경험이 드러날 때가 종종 있었다. 야후의 간부인 호로위츠(Bradley Horowitz)와 트위터의 인수를 논하는 자리에서 도시는 끝까지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트위터에 대해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설명을 도시가 하자 야후는 인수 견적가를 낮게 잡고 더 나은 경쟁자를 만들겠노라 말했다.

윌리엄스가 도시에게 회사 전체에게 트위터의 목표를 알리는 메일을 돌리라 시켰을 때, 도시가 가져 온 첫 번째 기안은 “트위터 (목표)로 원하는 3가지”라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목표가 하나같이 당황스럽게도 “하나.(I.)”로 시작하고 있었다. 도시는 자신이 통제 하에 있는 것인 양, 자신의 행동이 더 큰 계획의 일부인 듯 행동하려 노력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직원들은 그가 사우스파크에서 좌절스러워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었다. 그는 또한 오후 6시에 그리기 교습이나 핫요가 교습, 지역 패션스쿨 수업을 가기도 했었다. (그는 A-라인 스커트와 궁극적으로 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의 친교 생활은 한 때 아예 없었는데 이제는 벤처 투자자들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야구 게임에서 그를 만나고 도시 내의 파티에 그가 다니면서 점차 집중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볼 때 프로토타입에서 완벽하게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었던 트위터는 한 번에 수 시간씩 오프라인이 될 정도로 구조적인 거대한 문제를 겪는 중이었다.

한 여름날 오후, 윌리엄스는 트위터 관계자들이 Odeo의 언덕(hights)이라 불렀던 위층의 회의실로 자기를 보러 오라 요청했다. 작은 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윌리엄스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도시의 손을 움켜 쥐고 말했다. “재봉사가 되든지 트위터의 CEO가 되시오. 하지만 둘 다는 안 돼.”

윌리엄스가 불만을 제기하자 도시는 조용히 분노했다. 그러나 도시의 관리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훨씬 더 깊은 의견 충돌을 드러냈다. 도시의 트위터는 이랬다. 사람들이 자기의 순간 상태를 스스로 얘기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단순히 사람들의 자아를 나타내면 트위터가 단명하리라 우려했다. 그해 사람들이 여러 사건(지진과 자동차 사고 등)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볼 때, 그는 다른 결론을 냈다. 초기 글래스의 생각과 훨씬 유사한 결론이었다. 트위터는 자신들을 둘러싼 것이 뭔지 얘기하도록 하거나 뉴스와 정보를 공유토록 하는 서비스였다. 윌리엄스가 트위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설명하자, 한 때 트위터를 일축했던 업계가 그 잠재력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어색하게 끝났지만 트위터가 너무나 주목을 받는 나머지 도시와 윌리엄스는 꼭 같이가 아니더라도 다시 나란히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종종 그들은 CEO처럼 행동했다. 2008년 6월 새로운 투자를 받을 때가 되자, 투자자들은 사장인 윌리엄스, 그리고 CEO인 도시로부터 제각각 전화가 와서 혼란스러워 했었다. 결국 윌리엄스는 메인 투자자는 1,800만 달러를 투자한 Spark Capital이 돼야 한다고 결정했다. 곧 존경 받는 파트너인 사벳(Bijan Sabet)이 이사진에 들어왔다.

처음에 사벳과 또다른 이사이자 벤처 투자자인 윌슨은 도시의 결정 몇 가지에 대해 우려했었다. 도시는 사람들이 트위터를 문자 메시지로 쓰도록 했었고, 그 결과 트위터의 월간 비용이 거의 여섯 자리 숫자 수준에 육박했었다. 도시는 게다가 비용 관리를 자기 노트북에서 해서 틀리게 계산을 했었다. 그것 외에도 핵심 컴퍼넌트에 대한 백업이 없었다. 사이트가 다운된다면 중요한 데이터를 잃을 수 있었다. 윌리엄스와 도시는 매주 저녁에 만나 문제를 논의했지만 어느 저녁, 도시는 방어적이 됐다. 그는 윌리엄스에게 “CEO 되고 싶으세요?”라 물었고 윌리엄스는 결국 답을 해야 했었다. “응. CEO가 되고 싶어. 회사 운영 경험도 있고 트위터가 당장 필요한 것이 그거야.”

도시는 집으로 가서 사임 계획을 생각했지만 트위터 이사진은 도시에게 석 달 안에 사이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그러나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청구되는 요금은 올라가고 사이트는 계속 다운됐다. 도시 기억에 따르면 석 달이 되기 전, 사벳과 윌슨은 그를 Clift 호텔 조찬 회의에 불러서 CEO를 윌리엄스로 교체하려 한다고 통보했다. 도시는 먹지 않은 요거트와 그라놀라를 앞에 두고, 20만 달러의 주식과 유예 기간, 그리고 회사의 “조용한” 사장으로서 체면을 위한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가 해고됐는지 알아야 할 사람들은 없었지만(투자자들은 어떤 방식이든 창업자들을 자르는 것으로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도시는 회사에서 투표권을 잃었다. 결국 쫓겨난 것이었다.

그 시기도 특히 문제였다. 당시 페이스북은 조용히 트위터의 인수를 타진하고 있던 와중이었으며, 페이스북은 윌리엄스가 아닌 도시에게 접근했었다. 그가 축출된 다음 날, 도시는 저커버그에게 비밀스럽게 소식을 알렸다. 도시로서는 놀랍게도 혹시 해고를 면할 방법이 있는지 저커버그가 물어 봤다고 한다. 인수를 위해서였다. 도시는 저커버그에게 그럴 방법은 없다 말했고, 저커버그는 트위터를 인수한다는 계획에서, 이제 도시를 고용한다는 계획으로 바꿨다. 그래서 도시는 페이스북 제품부를 이끌고 있는 콕스(Chris Cox)를 샌프란시스코 Philz Coffee에서 만났다. 저커버그는 도시가 페이스북에 일단 역할 미정으로라도 들어오기 바랬다. 지위는 나중에 걱정할 일이었다.

저커버그의 제안을 저울질하면서 도시는 그 결과도 생각해 봤다. 페이스북으로의 이직은 트위터에 대한 외부 투자자들의 신뢰에 손상을 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윌리엄스에게도 타격이 될 터였다. 그렇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사항이 누출될 경우 트위터도 곤란해질 것이었다. 뭣보다도 역할 미정으로 페이스북에 들어간다는 것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혹시 강등의 의미일까? 도시는 저커버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연락은 계속 하시고, 올바른 지위가 있는지 알아 봅시다. 저도 생각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의 계획은 더 컸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인맥(access)만큼 좋은 자본이 없다. 벤처 투자자들과의 인맥 덕분에 하루에도 수 억 명이 사용하는 회사로 변한 페이스북의 저커버그와 같은 기업가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블로그와 언론과의 인맥은 신생 기업을 수 십억 달러 어치의 사업체로 바꾸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맥도 그냥 아는 수준이면 안 됐다.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한 때 세인트루이스에서 연설 장애가 있던 숙맥, 도시는 자신을 판매하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능숙함을 보여줬다.

트위터에서 힘을 빼앗긴 후, 도시는 그와 윌리엄스가 역할을 바꿨다는 식으로 선전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또한 트위터의 창업에 대해 더 정성을 들여 얘기하기 시작했다. 십 여 번에 걸친 인터뷰에서 도시는 회사의 천재들 중에서 글래스를 완전히 삭제했고, 자신의 이력에 트위터의 “발명자”를 추가 시켰다. 오래지 않아 그는 윌리엄스와 스톤도 삭제하기 시작했다. 한 이벤트에서 도시는 바바라 월터스(Babara Walters)에게 자기가 트위터를 창업했다고 불평했고, 월터스는 그 다음 날, “The View”에서 스톤과 윌리엄스에게 도시의 불평을 소개했다. 도시는 Los Angeles Times에게 트위터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제 인생의 작업”이라 말했다. 그는 또한 트위터라는 범상치 않은 작명자로 글래스를 거론하지도 않았다. 신문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그 느낌을 잡아두고 싶었어요. 친구의 주머니가 윙윙거리는 물리적인 느낌 말입니다.”

도시의 이야기는 해가 갈수록 발전했다. 그는 Vanity Fair에서 트위터 아이디어가 8살이던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60 Minutes”에서는 도시가 “지도와 기차가 좋아서” 그리고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에 매혹 당하여 트위터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후에 그는 사우스 파크의 놀이터에서 아이디어를 완전히 구체화 시켰던 것이 처음이라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도시는 자신을 스티브 잡스의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잡스가 스스로를 “편집자(editor)”로 불렀던 것처럼 스스로를 편집자라 불렀으며, 하얀색 디오르 셔트와 청바지, 검정색 블레이저를 유니폼으로 입었다.

윌리엄스는 아예 상징적인 이사로서의 도시 제거를 한 번 이상 고려했었다. 당시 그는 Square라 불리는 모바일-지불 기업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도시가 아예 제거될 경우 홍보에 악영향을 줄까봐 두려워했다. 트위터의 성장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일이었다. 윌리엄스 하에서 가입자, 방문자 등 트위터와 관련된 모든 수치가 두 배 세 배, 네 배 상승했다. 2007년, 하루 5천 트윗을 사람들이 보냈으며 2년 후에는 그 수가 3,500만 회로 급증했다. 트위터의 “정전” 상황은 결국 줄어들기는 했지만, 메드베데프(Дмит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Медведев) 러시아 대통령이 사무실에서 첫 트윗을 올렸을 때 정전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처음 트위터가 형성될 때에는 B급이나 C급 유명인사들이 트위터에 가입했지만, 2009년 애슈턴 커처(Ashton Kutcher)가 가입하면서 헐리우드와 트위터가 급속히 가까워졌다. 곧 저스틴 비버와 요르단의 라이나(رانيا) 왕비, 결국 베네수엘라 차베스(Hugo Chávez) 대통령과 달리아 라마(Dalai Lama)도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윌리엄스는 트위터를 인수하겠다는 온갖 제안을 거절하던 중이었다. 알고어(Al Gore)는 샌프란시스코의 자택에서 윌리엄스와 스톤에게 어느 날 밤, 엄청난 포도주, 테킬라를 제공했다.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 또한 빌 게이츠 자택에서 열린 개인 연회에서 윌리엄스에게 접근했었다.

당시 윌리엄스는 이사진으로 있던 벤처 투자자 펜튼(Peter Fenton)을 초대했다. 펜튼은 트위터에 끼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중이었다. (그의 2,100만 달러 투자는 트위터의 가치를 2억 5천만 달러로 높였다.) 투자자가 되기 전, 펜튼은 실리콘 밸리의 여느 인물들처럼 트위터의 얼굴이 된 도시가 트위터의 운영을 매일 관여한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2009년 초 첫 이사진 회의에서 펜튼은 윌리엄스와 도시 간의 긴장 관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펜튼은 도시에게 아파트 근처에서 만나자고 연락했다.

한 식당에서 도시는 펜튼에게 윌리엄스가 자신을 회사에서 밀어냈다면서, 최근 회사의 방향에 대해 길게 불평을 늘여 놓았다. 도시의 말에 따르면, 윌리엄스는 도시가 CEO로 있을 때 세워 뒀던 문자 메시지 파트너십 다수를 종료 시키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 “다수”가 매월 수 십만 달러 어치임을 말하지는 않았었다.) 펜튼은 이제 기술 업계의 연인이 된 도시가 무시당해 왔음을 깨달았다. 도시가 자기 관점의 얘기를 끝내자, 펜튼은 탁자를 두들기며 “회사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있지 않겠습니다”라 말했다.

트위터의 급성장을 잘 관리하지 못 하고 있던 윌리엄스에 대해 펜튼이 좌절한 것도 한 몫 했었다. 트위터는 새로운 기술 수석과 운영 수석, 재무 수석이 필요했지만 윌리엄스는 마음을 정하지 못 하는 중이었다. 그는 종종 자기가 신뢰하는 친구들 뽑기를 더 선호했다. 권위를 약화 시키거나 우유부단함을 재촉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펜튼은 고문을 모셔오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상스러운 입버릇으로 유명한 Intuit의 전임 CEO이자 컬럼비아 대학교 미식축구 팀의 헤드코치이기도 했던 빌 캠벨(Bill Campbell)을 모셔오자는 아이디어였다. 캠벨은 잡스와 구글의 에릭 슈미트 외 수많은 기술 업계 최고 중역들의 멘토였다. 첫 회의 때 캠벨의 메시지는 대단히 단순했다. “CEO로서 회사를 망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뭐겠습니까?”하고 윌리엄스가 묻자 캠벨은 “친구 고용하기이지!”라 답했다. 그리고는 친구와 사업이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에 대해 10여분간 장광설이 나왔다. 윌리엄스는 노트에 적었고, 둘은 악수하여 1주에 한 번 회의를 하자고 말했다.

이 첫 번째 회의로 펜튼은 용기를 얻었지만 윌리엄스는 캠벨의 조언을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성실함과 운 덕분이며,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그 일부가 될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트위터의 부엌을 채우기 위해 여동생을 고용했고, 새 사무실 디자인을 위해 부인을 고용했으며, 구글로부터 여러 친구들을 고용했다. 그들 중, 최근 자신의 신생기업을 1억 달러 받고 매각했던 딕 코스톨로(Dick Costolo)가 있었다. 2009년 한 파티에서 만난 이후, 전직 즉흥 연극 배우였던 코스톨로는 첫 트윗을 날렸다. “내일 트위터 COO로서 첫 번째 날. 임무 1: CEO를 약화 시켜서 권력을 강화하기”.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보면, 잡스가 가끔 애플 디자인 수석 조너선 아이브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제 아이디어를 보고는 ‘안 좋아, 매우 안 좋아. 저게 나아.’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청중 속에서 듣노라면 자기 아이디어인 양 얘기를 하더랬죠.” 물론 잡스는 인생을 뒤바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여러 가지 만들었지만 아이브의 주안점은 잡스가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던 실리콘 밸리의 거대한 진실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아이디어는 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설화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결국 비전가가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도시도 이 기법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2010년 트위터가 급성장했을 때, 그 성공은 윌리엄스와 스톤에게 돌려졌다. 동시에 트위터의 간부진은 윌리엄스의 경영 스타일에 질려하고 있었다. 그러자 도시는 간부진들을 Square의 사무실에서, Blue Bottle Coffee에서, 나중에는 자기 집에서 만나 좋지 않다는 말을 하도록 설득했다. 이사진과 도시는 곧 윌리엄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도시를 트위터의 CEO 역할로 되돌리도록 했다. Sqaure와 트위터의 CEO가 될 수는 없었지만 트위터의 창업자를 다시 인식 시킨다 함은 나름의 보상이 될 터였다.

이 시점에서 지난 2년간 도시가 언론에 해왔던 말을 트위터 투자자들 다수도 믿게 된다. 게다가 일반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았다. 코스톨로가 운영을 맡을 경우 트위터의 대외적인 얼굴은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이사진은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과 함께 코스톨로가 2,500만 달러 어치의 계약을 체결한 것을 기쁘게 여겼고, 코스톨로는 트위터 직원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모든 투자자들 사이에서 협약이 이뤄졌다. 9월 하순, 코스톨로는 트위터의 임시 CEO가 되고 윌리엄스는 축출됐으며 도시가 돌아옴을 통보 받았다.

오래지 않아 윌리엄스는 트위터의 사무실 복도 끝에서 캠벨이 미식축구 수비수처럼 배회하는 모습을 봤다. “여기 좀 앉으시죠.” 그가 말했다. “아주 어려운, 그러니까 어려운 대화가 될 것이오.” 윌리엄스는 소파에 앉았지만 무슨 말을 들을지 확신이 안 섰다. “이사진은 당신이 물러나서 사장 역할을 해 주기 바랍니다.” 윌리엄스는 역시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농담 아니시죠?” 캠벨은 아니라 답했다. 이사진은 윌리엄스가 옮기기 바라며, 조직을 더 계층화 시키는 것은 트위터와 같은 신생 기업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캠벨은 망설인다고 답했다. 사실 이사진이 원하는 바는 투자 수익이었다. 트위터 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캠벨은 윌리엄스 해고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윌리엄스에게 코스톨로가 후임이 되리라 말했었다.

캠벨이 사무실을 떠나자 윌리엄스는 놀라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사벳은 사과하면서 제품-고문의 역할을 맡아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레드 윌슨은 윌리엄스가 끔찍한 CEO였다고 봤다. “난 당신을 한 번도 창업자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잭 (도시)이죠. 트위터를 만든 사람은.” (윌슨은 이 대화를 부인했다.)

윌리엄슨은 코스톨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스톨로는 폭우 속에서 공항에서 집으로 운전해 가는 도중이었다. 코스톨로는 트위터 이사진이 윌리엄스 축출을 전략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가 윌리엄스를 몰아낸 모양새가 아닌지를 물었다. 이제 그는 친구이자 보스를 축출함으로써 충성심과 사업의 이해관계 사이에 사로 잡혔음을 깨달았다. 친구이자 보스는 트위터에서 너무나 친숙한 구조였다. 비에 젖은 길을 오면서 그는 윌리엄스에게 윌리엄스의 동의가 없는 한 임시 CEO 자리를 받지 않겠노라 말하겠다고 전화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었다. 트위터 이사진의 명령과 도시의 도움에 따라 그는 이미 CEO를 약화 시켜 놓았었다. 2주일이 지난 2010년 10월 4일, 윌리엄스는 사무실에서 나와 트위터 직원들에게 자기가 물러난다고 말했다. 몇 블럭 떨어진 곳에서 도시는 Sqaure 사무실의 짐을 싸고 있었다. 복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윌리엄스의 사임 이후, 코스톨로는 트위터를 종종 오프라인으로 만들었던 구조적인 문제와 코드를 제거했다. 또한 그는 트위터 상에서 여러가지 광고 선택을 영업하는 400명 이상의 직원으로 이뤄진 확대된 영업팀을 구축하는 등, 회사의 이윤을 위한 끈질긴 탐구에 돌입했다. 최근 트위터는 텔레비전 방송사들과 견고한 관계를 만들어 놓았다. 생방송 이벤트가 있을 때 트위터로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하고, 해시태그를 이용하여 텔레비전 광고와 결합 시키는 식이었다. 지난 여름, 트위터는 주식 상장 준비 작업을 조용히 시작했다.

지난 달, 주식 상장 뉴스가 나오기 겨우 며칠 전, 노아 글래스는 Mission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축출 이후 암울해 하던 글래스는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었다. 현재 그는 여자친구, 아직 아기인 딸, 강아지 이위(Ewee)와 함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Dolores Park를 걷고 있는 그는 딸을 가슴에 동여매고 이위는 밧줄로 끌고 있었다. 그러면서 걷다가 우연히 옛 친구 에반 윌리엄스를 마주쳤다. 처음에 충격을 받은 40대 초의 두 사내는 곧 한 때 이웃으로서 어땠는지, 얼마나 친했는지, 공동 창업자로서 어땠는지 등등 친하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 언제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며 그들은 예의 바르게 헤어졌다.

실리콘 밸리에서 기업들 대부분은 자기만의 트위터 이야기가 있다. 언제나 친구면서 공동 창업자이고 회사의 큰 아이디어를 냈지만 더 배고픈 공동 창업자가 다른 공동 창업자를 밀어 내는 이야기이다. 가령 로널드 웨인(Ronald Wayne)은 애플의 세 번째 공동 창업자이지만 창업 이야기에서 삭제됐다. 나중에 구글이 20억 달러를 들여서 인수했던 비디오 공유 서비스, 유튜브의 창업자, 채드 헐리(Chad Hurley)와 스티브 첸(Steve Chen)은 잘 알려졌지만 세 번째 창업자인 조드 카림(Jawed Karim)은 그렇지 못하다. 초창기에 축출됐던 레지 브라운(Reggie Brown)은 최신 기술 업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Snapchat을 고소했다. 그리고 물론 마크 저커버그가 있다. 페이스북에 대한 그의 고생과 소유 주장은 수 차례에 걸친 소송과 그의 속임수에 대한 장편 영화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페이스북과는 달리 트위터는 실제로 협동 작품이었다. 실패한 한 포드캐스팅 회사에서 나온 아이디어로서 타이밍이 좋았다. 도시가 아이디어의 정수(精髓)를 낸 것은 맞지만 Odeo 사람들의 협력이 아니었다면 트위터 아이디어는 아이디어인 채로 남았을 것이다. 초기 개념이 사람들을 친구와 연결 시키도록 하자는 글래스의 아이디어도 중요했다. 게다가 작명(作名)이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글래스의 기여였다. Blogger에서 배운 교훈을 윌리엄스와 스톤이 개발에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트위터는 여전히 뜨지 못 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윌리엄스, 그리고 윌슨, 사벳, 펜튼 등의 투자자들의 자금이 필요했으며, 실제로 사업을 만들어낸 코스톨로, 지구상에서 제일 대규모적인 소셜 네트워크로 만들어낸 2천 명의 직원들을 빠뜨릴 수 없다. 실리콘 밸리의 모든 기업이 마찬가지이다. 그들 모두의 창조설화를 듣지는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트위터가 상장되면 도시는 4억에서 5억 달러를 벌 것이다. Square의 도시 비서만큼 글래스도 벌 것이다.

한 초기 트위터 직원은 회사가 여러모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뒀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이다. 트위터가 거대해질 것이 확실해졌을 때조차 최근까지도 여러 트위터 직원들은 트위터가 차세대 Myspace나 Friendster가 되지 못 하리라 고백했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나쁜 경영으로 위대한 실패를 거둘 때가 있다. 말하자면 기업이 기업처럼 느껴질 때에서야 변화가 시작된다. 도시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한 전직 트위터 직원은 이런 말을 했다. “도시가 만든 제일 훌륭한 제품은, 잭 도시 그 자신입니다.”

Nick Bilton is a columnist and reporter for The Times. This article is adapted from his book, “Hatching Twitter: A True Story of Money, Power, Friendship, and Betrayal,” to be published next month by Penguin/Portfolio.
Editor: Jon Kelly

http://www.nytimes.com/2013/10/13/ma…tter.html?_r=0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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