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 CEO, 매리사 메이어의 비공인 전기

야후 CEO, 매리사 메이어의 비공인 전기


TECH

The Truth About Marissa Mayer: An Unauthorized Biography

NICHOLAS CARLSON AUG. 24, 2013, 8:01 AM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Photo by Fortune Live Media

2012년 7월 12일, 야후의 임시 CEO, 로스 레빈슨(Ross Levinsohn)은 자기가 야후의 정식 CEO가 되리라 여전히 믿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회의 하나만 남았다.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에 있는 야후 본사 3층에 있는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이사진 회의만 지나면 끝이었다. 야후는 이 대회의실을 “Phish Food”라 불렀다. 유리잔이 가득하고 하얀 가죽 소파와 의자가 들어 있는 멋진 방이었기 때문이다.

레빈슨은 야후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이사진 앞에서 브리핑 할 요량이었다. 계획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정식 CEO가 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레빈슨은 회의실로 들어갔고, 수석 경영진 모두가 그를 따랐다.

레빈슨의 협상 해결사이자 마이크로소프트와 수개월간 대규모 협상을 벌였던 짐 헤크먼(Jim Heckman), 야후의 제품관리 수석이자 이미 야후 메일/홈페이지에게 절실했던 업데이트를 계획중이었던 샤시 세스(Shashi Seth), 야후 일부를 알리바바(Alibaba)에게 매각하여 회사를 구하는 협상을 막 해낸 CFO 팀 모스(Tim Morse), News Corp. 출신으로 레빈슨이 야후 미디어 사업을 맡기기 위해 영입한 미키 로슨(Mickie Rosen), 그리고 CMO를 막 만들어낸 몰리 스필먼(Mollie Spillman)이 잇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헤크먼과 세스, 모스, 로슨, 스필먼 등은 모두 다른 쪽에 앉았다.


Ross Levinson

그들 모두 회의는 형식상 절차라 여겼다. 레빈슨이 정식 CEO가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 2개월간 야후 이사장이었던 프레드 아모로소(Fred Amoroso)는 레빈슨과 그의 팀에게 야후를 당분간 맡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 왔었다.

아모로소는 레빈슨에게 개인적으로 회사를 맡기겠노라는 얘기도 했었다. 그는 야후 직원들에게도, 이번 5월 회의 기간 동안 같은 얘기를 하였다. 심지어 그는 야후 광고주들에게도 레빈슨에 대한 지지 전화를 걸었다. 사장으로서는 보기 드문 움직임이었다.

6월, 아모로소는 구글의 중역이었던 마이클 바렛(Michael Barrett)을 야후로 영입하는 데에도 레빈슨을 도왔었다. 영입 절차 중, 아모로소는 바렛에게, 레빈슨의 “임시” 딱지가 정말 임시일 뿐이라 약속했었다. 따라서 구글을 떠나도 좋다는 의미였다.

레빈슨에게는 희망을 가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그는 야후에서 제일 중요한 이사진 두 명과 거의 매일 대화를 계속 해오던 중이었다. 한 명은 댄 롭(Dan Loeb), 다른 하나는 마이클 울프(Michael Wolf)이다. 레빈슨에게는 아모로소의 지원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롭이 더 필요했다. 롭은 야후 지분 5% 이상을 갖고 있는 Third Point라 불리는 헤지펀드를 운영중이었고, 겨우 수 개월 전 야후의 이전 CEO를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울프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전직 MTV 사장인 울프는 미디어 투자에 대해 Third Point에게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사실 롭이 울프에게 야후 이사진으로 오기를 요청했었고, 울프는 새 CEO 영입 위원회를 이끌었었다.

레빈슨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야후의 방향을 심각하게 뒤바꿀 계획을 특별하게 수행할 것이었다.

그는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업체들과 기술로 경쟁하기를 그만 두고 싶어 했다. 디즈니와 타임워너, 뉴스 코어처럼 오로지 미디어와 콘텐트 사업에만 집중하자는 내용이었다. 변환 과정으로서 레빈슨은 야후의 사업부 몇 가지를 분리, 매각, 폐쇄하기를 원했고, 직원 수 또한 1만 명 수준으로 감축하리라 말했다. 그리고는 세전/이자율 수익을 50% 늘리리라는 내용이 이어졌다.

사실 레빈슨은 프레젠테이션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팀이 이 계쇡을 이미 시작했다고도 발표했다.

레빈슨은 이사진에게 자신의 지휘 하에 헤크먼이 야후의 검색 사업을 마이크로소프트의 포털, MSN.com으로 교환하고, 대규모 현금을 지원받는 협상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레빈슨과 헤크먼은 또한 구글 중역인 디카스트로(Henrique De Castro)와 함께 야후의 광고 재고를 일부 넘기는 협상도 시작했었다. 또한 야후의 기업 광고 기술 사업을 내리고 뉴욕에 있는 광고 기술 신생 기업인 AppNexus를 포함하는 조인트 벤처를 시작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었다.


Dan Loeb controlled 5 percent of Yahoo and joined the board after a bloody proxy fight.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 레빈슨은 야후 정식 CEO 자리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방 안의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는 중이었다.

정식 CEO 영입 위원회장인 울프가 그런 협상의 이유가 뭔지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울프는 크고 날카로운 톤으로 물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왜 좋은지 이해 합니다만, 야후에게는 어째서 좋은가요?”

롭이 영입한 또 다른 이사였던 해리 윌슨(Harry Wilson)도 울프에 합류하여 협상이 “근시안적”이라 비판했다.

두 이사가 합세하여 비판에 나서자 이제 질문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좁혀졌다. 레빈슨과 헤크먼이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에게 되돌릴 수 없는 양보를 하기라도 했을까?

울프와 윌슨은 정식 CEO 감으로 다른 인물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협상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니 그를 따를 필요도 없애기 위함이었다.

즉, 레빈슨의 후보 자격에 나쁜 신호였다.

그렇지만 윌슨과 울프의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목소리 높은 불평은 레빈슨에게 최악의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회의 도중에 보인 롭의 행동이 더 최악이었다.

롭은 세련된 월스트리트 풍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가 엉망인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 출신이며 종종 파도타기도 즐기곤 했었다.

레빈슨이 프레젠테이션 하는 동안 롭은 지루해 보였다. 그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임시 CEO가 얘기를 할 때, 롭은 회의실 뒤에 서서 블랙베리만 갖고 놀고 있었다.

한 임원의 기억에 따르면 롭은 회의실 내에서 롭은 한동안 문자를 보내고는, “프레젠테이션의 중요한 부분 대부분” 일어나서 화장실로 나가서 10분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아 OK, 미안해요, 로스. 당신은 더 이상 CEO가 아니군요.”

회의 이후 구글 중역이었던 아모로소가 영입을 도왔던 바렛은 레빈슨에게 어떻게 회의가 진행됐는지 물었다. 레빈슨은 그에게 자기가 정식 CEO가 못 될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 누가 된단 말인가?

그날 밤, 레빈슨은 Allen & Co. 투자은행이 있는 아이다호 선밸리로 날라갔다. 이 은행은 매년 주요 미디어와 기술 업계 중역들의 파티를 주최했다.

주말 동안 레빈슨은 벤처 투자자인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과 Square CEO인 잭 도시(Jack Dorsey), Twitter CEO인 딕 코스톨로(Dick Costolo)와 함께 누가 CEO가 될지 게임을 벌였다. 기나 긴 목록이 나왔고, 레빈슨이 바라는 이름이 누구일지 모두들 궁금해 했다. 하지만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그/그녀가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도 나왔다.

울프와 롭이 이미 결정을 내리기라도 했을까?

마침내 일요일 밤, 레빈슨은 구글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친구는 되려 레빈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주 수요일, 매리사 메이어가 야후 인터뷰를 받았다는 소식을 혹시 들어 봤니?

레빈슨은 모든 것을 순간 깨달았다. 누가 야후의 CEO가 될지 안 것이다.

곧 모두들 알게 됐지만 말이다.

7월 16일 월요일, 레빈슨 최후의 이사진 회의 4일 후, 야후는 공식적으로 새 CEO로 37세인 매리사 메이어를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레빈슨이 야후를 위한 계획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마지막 회의를 들어 왔을 때 이미 이사진은 메이어에게 제안을 던져 놓고 있었다.

뉴스가 터져 나오자, 레빈슨은 친구들에게 실망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정말 CEO가 되고 싶었으며 자기가 매우 잘 해내리라 믿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가 일궈 놓은 팀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친숙하지 않은 리더에게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빈슨은 평화롭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져야 한다면 적어도 한 인물급은 돼야 했으니까.


Marissa Mayer

매리사 메이어와 같은 인물은 없다.

이제 38세인 그녀는 부인이자 어머니이자 엔지니어이면서 300억 달러 규모 기업의 CEO이다. 그녀는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업계의 여자이며, 누구보다도 주주들을 모셔야 하는 기업 세계에서 고객 경험을 최우선 가치로 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메이어는 적어도 3억 달러는 되는 재산을 보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스티브 잡스는 앞에 사과 나무가 있는 교외의 작은 집에서 살았을지 몰라도, 매리사 메이어는 샌프란시스코의 Four Seasons Hotel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구글의 래리 페이지같은 경쟁 CEO들은 슬리퍼나 후드티 같은 것을 입고 다니지만, 메이어는 붉은 카페트 위에서 Oscar De La Renta를 입고 다닌다.

메이어는 스스로를 긱이라 칭하지만 외모로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 금발과 푸른 눈, 우아한 스타일만 보면 그녀는 헐리우드 여배우라 해도 좋을 정도다.

젊고 강력하며 부자이고 영리한 메이어는 수 백만 여자들의 롤모델이다. 그렇지만 페이스북의 COO, 셔릴 샌버그(Sheryl Sandberg)와는 달리 그녀는 전세계의 일하는 어머니들을 격노 시키기도 했다. 야후 직원들의 가택 근무를 금지 시켰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녀를 존경하는 만큼, 업계 내의 적도 많다. 그들은 메이어가 로봇같고, 거만하며, 디테일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한다. 사용자 경험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기술 업계에서 무엇이 돈을 버느냐를 무시하는 행위를 가려 준다는 말도 있다.

그들이 하는 말에도 진실은 있다.

그렇지만, 메이어가 야후를 맡은 지 1년 후, 야후의 주가는 100% 상승했고, 엔지니어들은 다시금 야후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더 중요한 사실도 있다. Tumblr 창업자인 카프(David Karp)와 같은 인기 많은 CEO들이 자기 회사를 야후에 판다는 점이다(그는 야후에 11억 달러에 자기 회사를 매각했다).

Questions persist

야후 정도 규모가 되는 주식회사 경영자들 대부분은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다. 사업과 돈 때문이 아니라면 아마 정치인이 되었을 타입이다. 메이어는 정치가나 환담꾼 타입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야후에서의 첫 1년까지 그녀의 인생 면면을 보다 보면 메이어는 수줍어 하고 사교성이 별로 없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여 그렇게 빨리 정상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커리어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메이어는 야후에 들어오기 전에 구글에서만 인생을 보낸 것으로 여기기 쉽고, 계속 성공만 거뒀다고 여길 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메이어는 구글에서 대단히 잘 업무를 해냈다. 구글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제품 관리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구글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세계에서 제일 강력한 기업에서도 제일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를 지나쳐서 승진하기 시작했다. 소비자가 직접 보는(구글 홈페이지를 포함) 구글 제품의 룩앤필 책임자 자리도 빼앗겼다. 그녀는 덜 중요한 제품인 구글맵으로 이전됐으며, 구글 CEO를 만나는 수석경영진회의에서도 제거됐다. 업계 내부 관측통에 따르면, 메이어의 입장에서 이것은 강등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메이어가 어떻게 극복해냈을까?

거의 모두들 2012년 여름에 있었던 메이어의 야후 CEO 등극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에게 야후를 설득 시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진은 어떻게 해냈을까?

그리고 보다 더 큰 질문이 있다. 그녀가 야후를 살릴 수 있을까?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핀란드의 예술 선생님이자 주부였던 마가렛 메이어, 그리고 환경 엔지니어였던 마이클 메이어의 딸로서, 매리사 앤 메이어는 1975년 5월 30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위스콘신 Wausau에서 자라났으며 운동을 좋아하는 남동생 메이슨 메이어가 있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난 매리사 메이어는 국립학교를 다녔으며, 식료품점에서 여름 아르바이트를 뛰기도 했지만, 그녀의 가정은 수많은 활동을 메이어에게 시키기에 부조감이 없었다.

오늘날 메이어에 대한 언론 사진 대다수는 무대 위, 혹은 텔레비전 시청자나 대규모 청중 앞에서의 인터뷰 사진들이다. 보통은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아마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Oscar De La Renta인 모양이다)를 입은 그녀는 강하고 편안하면서 분위기를 잡는 모양새를 보인다.

그렇다고 이제 38세가 된 메이어가 항상 거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10대 당시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어했다”고 묘사한다.


Yahoo CEO Marissa Mayer at the 2013 Goldman Sachs Technology and Internet Conference.

실제로 요새 사진에서 보이는 메이어는 어린 시절 친구들이 기억하는 메이어가 아니다. 당시 그녀는 티셔츠나 스웨터, 청바지를 즐겨 입었고, 멋진 옷이기는 하지만 호화로운 옷은 아니었다. 메이어가 청중 앞에서 언제나 말을 잘 하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 친구들은 그녀가 전혀 외향적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제이드(Brian Jojade)라는 친구가 있다. 중2 때 메이어와 함께 고급수학 수업을 들었던 그는 메이어가 남들의 관심을 싫어했다고 기억했다. 한 번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메이어의 생일이라 알렸다. 메이어를 좋아한 나머지, 이름을 듣게 해서 웃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더군요. 별로 재미 없는 일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추억도 있다. 그는 메이어가 교실 앞에 앉아 있는 “공부쟁이(professional)”이자 “뭘 하든 간에 올바로 하게 하려들고, 정말 항상 열심인” 소녀로 기억하고 있다.

메이어의 Wausau West 고등학교 동창인 배즈터(Elize Bazter)는 메이어가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어디론가 공부하러 갈 때에는 대화를 끊어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Wausau West 고등학교에는 교시별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고, 하루를 20분 짜리 “모드(mod)”로 잘랐다. 수업은 40분, 혹은 1시간 짜리였으며, 모두들 20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녀에 따르면 제일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의 경우 이 시간 때마다 급식 식당에 모였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이다.

“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들과 모여서 먹고 떠들었죠.”


Mayer introduces the 1992 homecoming court

그런데 10대 소녀 매리사 메이어는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배즈터의 말이다.

“메이어는 내려와서 부엌이나 자판기에서 먹을 것 가져 와서는 도서관이나 실험실로 공부하러 갔어요. 모여 있는 곳으로 와서 20분 정도 떠드는 아이가 아니었죠.”

배즈터는 메이어를 “학교에서, 손에 책을 든 채, 뭔가 하려고 복도를 지나가는” 인상으로 기억했다.

그렇다고 하여 메이어가 외롭고 슬픈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말은 아니다.

그녀가 2009년, 재커리 보그(Zachary Bogue)라는 이름의 샌프란시스코 은행가와 결혼했을 당시 결혼식을 두 번 치렀다. 하나는 캘리포니아에서, 다른 하나는 어렸을 때 다녔던 Immanuel Lutheran 교회였다.

어린 시절 메이어의 학교 친구들은 그녀가 어떤지 전혀 몰랐다. 메이어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어땠을까? 선생님들은 메이어가 좋아하는 부류였다.

2010년, 메이어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Wausau School District의 “졸업생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한편 그 해 25명의 교사 은퇴식이 메이어 기념식과 같이 열렸다. 이때 메이어가 한 연설은 영상으로 녹화됐다.

영상에서 메이어는 노란 꽃 장식이 붙은 파란색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고 연단에 올라 선생님들에게 우선 감사해 했다. “모두들 제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선생님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 Mr. Freedly, Mrs. Stay, Mr. Flanagan …” 이 선생님들이 그녀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영상 속의 그녀 얼굴을 봐도 알 수 있다. 대여섯 명의 이름이 나왔고 메이어의 목소리는 울먹일 정도까지 됐기에, 물을 좀 마시고 숨을 쉬어야 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부어 있었다.

10대 대부분은 고등학교 시절, 특히 고학년 때 쳤던 닭을 풀어 놓는다든가 복도에서 화장실 휴지를 던진다든가 하는 장난을 기억한다. 메이어도 문학 선생님 교실에 들어가서 교실을 정글처럼 꾸몄었다. 조셉 콘라드의 단편 소설, “어둠 속(Heart of Darkness)” 수업에 워낙 감명받아서였다.

메이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었던 플래너건(Wayne Flanagan)은 학교 마지막 날, 메이어가 교실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올라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녀는 플래너건에게 중학교 공부 못 할까봐 두렵다 말했다. 게다가 새로운 아이들과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도 고역이었다.

플래너건은 꼬마 메이어가 “안전히 있기를 좋아하고,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는 종류의” 아이였다고 말한다. 그는 당시 그 소녀가 어떻게 클지 명확했다는 말도 했다. “오, 넌 중학교에서도 잘 해낼 것이란다.”

그래도 그녀는 나가려 하지 않아서, 결국 플래너건 선생님은 어머니를 불러서 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렸다.

분명 메이어가 아이일 때 만난 이들은 특별한 멘터들이었다. 코치나 선생님, 교육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로서 메이어는 피아노 레슨을 받고, 배구와 야구를 즐겼다. 수영과 스키 학습도 받았고 한 주당 35 시간의 발레 수업도 중고등학교 때 받았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발레 덕분에 딸이 “비판과 원칙, 침착함과 신뢰를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그녀는 컬링 팀에 있었다. 그녀는 치어리더였고 토론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라인댄스 팀에도 속해 있었다.

그런데 메이어가 바뻤던 이유 중에 어머니인 마가렛 메이어도 있었다. 그녀를 몰아 세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었던 플래너건은 메이어의 어머니가 자주 학교에 와서 딸의 상황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래서 메이어 집안과 친구가 될 정도였다. “항상 딸 걱정을 하고 올바로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더라구요. 실제로 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자식 사랑을 그녀도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든 메이어는 커리어에 있어서 선생님들과의 관계 덕을 봤다.

통계적으로 수학이나 과학 수업에서 소속감을 못 느끼는 여학생들이 많다. 2003년, 수능시험(SAT)을 본 고등학생 중 컴퓨터 전공을 하고싶어 하는 학생 84%는 남자였다. 즉, 16%의 여학생들도 있었다는 의미다.


Mayer was on Wausau West’s state championship winning debate team.

그런데 메이어는 학교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학과 과학에 대해 다른 여자 애들한테 가르쳐 주기도 하는 쪽이었죠. 하지만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자 아이들 중에서는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너무 남자스럽다고 해야 하나, 무슨 따분한 수학/과학광 같은 느낌이었어요.”

“Wausau 학교는 너무 지원을 잘 해 줘서 수학과 과학을 잘 하는 것이 이상하다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메이어는 수줍은 성격을 타파하는 데에 선생님들의 공이 컸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가방과 책상, 숙제만이 아니라 “조직화”를 할 수 있음을 메이어에게 보여줬다. 사람들을 꾸리는 일, 그러니까 리더의 역할이다.

메이어의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베크먼(Joanne Beckman)은 메이어가 많이 달랐다면서,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왜 하는지 알기 위해 사람들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나이 대에는 스스로에게들 관심을 갖지만 메이어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 봤습니다.”

“쳐다보다”는 선생님들에게도 해당됐다. 그들이 왜 하는지, 뭘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메이어는 선생님 역할을 통해,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고통스러울 정도의” 수줍은 성격을 결국 이겨냈다.

아직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플래너건 선생님은 메이어가 교육자의 자질을 키워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언젠가 선생님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봤다.

고등학교 시절, 메이어는 스페인어 특활부 부장, 동아리 회계 담당, 토론팀의 팀장 등 가입한 모든 클럽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당시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였던 윌슨(Abigail Garvey Wilson의 말이다. “매리사가 댄스 동아리 회장을 맡았을 때, 걔가 일종의 ‘이너 서클’은 아니었어요. 회장직을 따낸 겁니다. 세 가지 방식으로 말이죠.”

“첫째, 순수한 능력이에요. 훌륭한 루틴으로 안무를 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성실함이에요. 모두들 따라할 수 있도록 몇 시간이고 연습 시간을 짰었죠. 셋째, 공정함입니다. 매리사가 책임을 맡자, 제일 잘 하는 사람들로 팀을 꾸릴 수 있었어요.”

1993년, 메이어는 하바드와 예일, 듀크, 노스웨스턴 등 10개 대학교에 합격했다. 어느 학교를 갈지 정하기 위해 메이어는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서 각 변수를 따져 봤다.

그녀는 스탠퍼드를 택한다. 우선은 신경정신과 의사가 될 계획이었다.(메이어가 빠르게 성장 시켜 나가는 중이었던 리더십과는 별 관계가 없는 직종이다.)

하지만 메이어는 곧 학생들을 이끌어 임무를 수행 시키는 과정에서 수줍음을 떨쳐 냈었다. 곧, 그녀는 스탠퍼드 교실에 서서 제일 자연스러운 일을 하게 된다. 교육이었다.

가르침이 운명이었던 것이다.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스팬퍼드로 가기 직전 여름, 메이어는 대학을 통해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준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해 여름, 메이어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린 전국청소년 과학캠프(National Youth Science Camp)에 참여했다. 과학광들이 모인 그곳의 사진과학 연구실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면서 나무 숲에 가리워져 있었다. 메이어는 특히 콘스타치(corn starch)와 물을 섞어서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한 찐득찐득한 물체를 만드는 실험을 좋아했었다.

하루는 예일대 학생으로서 포스트닥 과정에 있었던 준 응구옌(Zune Nguyen)이 초빙강사로 캠프에 왔었다. 그는 수수께끼와 퍼즐로 채워진 방 안에 있던 똑똑한 아이들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의 이야기가 캠프 내내 빠지는 날이 없었다.

마침내 고문이 이제 그만 하라 했다. 그는 메이어와 캠프 아이들에게 너네들 모두 틀렸다고 말했다. “준이 아는 것이 아니라 준이 생각하는 방식이 중요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응구옌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아니라 그가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접근한 방식이었다. 응구옌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몇 분 안에 올바른 질문을 하고 올바른 관찰을 시작할 것이었다.

그 때부터 캠프의 캐치프레이즈는 이것이었다. “준이 아는 것이 아니라 준이 생각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메이어는 이 말이 일종의 개인적인 가르침을 준다고 여겼다.

가을, 메이어는 스팬퍼드로 가서 의학부 예과를 시작했다. 그녀는 의사가 될 계획이었지만, 1학년 말, 수업이 지루해졌다. 그녀의 말이다.

“암기 카드가 너무 많았어요. 쉽기야 했지만 이건 모두 암기 뿐이잖아요.”

그녀는 “나를 정말로 생각하게 만드는” 전공을 찾고 싶었다.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위대한 해결자로 훈련 시켜줄” 전공 말이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사고하는 방식, 표현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싶었다.

“머리 속에 계속, ‘준이 아는 것이 아니라 준이 생각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이 맴돌았어요.”

메이어는 머리 속의 목소리에 대해 대답했다.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될 수업을 찾아낸 것이었다. 바로 전산학 입문 과정인 CS105였다.

메이어는 프로그래밍이라는 도전에 몰두했다. 문제에 대해 자기 머리를 이용하여 풀어냈다.

학기 동안 그녀는 추가 학점을 받기 위해 수업시간에 열린 디자인 컨테스트에도 참여했다. 훌륭한 댄스 동아리의 책임자로 만들어 줬던 두뇌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하여, 메이어는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스크린세이버를 만들어냈다. 300명이 듣는 수업에서 메이어는 2등을 기록했다.

디자인이 충분히 좋아서, 메이어의 CS105 교수였던 로버츠(Eric Roberts)는 수 학기 동안 메이어가 만든 스크린세이버를 채택하기도 했었다.


Stanford professor Eric Roberts says Mayer was an incredible teacher.

로버츠는 또한 메이어의 불꽃놀이에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녀와 다른 입상자들을 자택의 저녁 식사에도 초대했다. 그는 그녀의 멘토가 됐고, 메이어는 다시금 선생님과의 끈을 만들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전공도 발견해냈다.

메이어는 심볼릭 시스템을 택했다. 심볼릭 시스템 전공에는 언어학과 철학, 인지 심리학, 컴퓨터학 수업이 들어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스탠퍼드의 심볼릭 시스템학은 인기가 많다. 메이어 외에도 LinkedIn의 공동 창업자인 호프먼(Reid Hoffman), 애플 iOS 소프트웨어의 전임 수석 부사장이었던 포스탈(Scott Forstall), 인스타그램의 공동 창업자인 크리거(Mike Krieger)도 해당 전공 출신이다.

메이어의 교육자 리더십은 그녀가 철학 160A 수업을 맡았을 때 개화했다. 이 수업은 심볼릭 기대를 받고 있는 시스템 전공자들이 “버리는 수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철학 160A 수업 동안 수강생들은 대여섯 명의 조로 나뉘거나 문제 유형별로 조가 만들어졌다. 메이어가 들어간 조는 다른 조와 마찬가지로 문제 기한보다 하루 일찍 문제를 풀어냈다.

스탠퍼드에서 메이어와 그녀의 철학 160A 그룹은 밤새 일하던 때가 허다했다.

현재 벤처 투자자인 조시 엘먼(Josh Elman)도 메이어와 같은 그룹에 있었다. 그 시절을 돌이키면서 엘먼은 조원들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매리사는 항상 이랬어요. ‘좋아, 좋아. 이제 다시 합시다. 이걸 해 내야 하니까.’ 그녀는 올바른 답을 빠르게 내놓았음을 확인하는 데에 집중했어요.”

“방 안에서 메이어가 제일 심각하고 똑똑한 학생 같은 느낌이었어요. 심각성과 영리함, 이 두 가지가 항상 메이어를 맴돌았습니다. 정말 뛰어나고 정말 진지했어요.”

그룹 내 조원들 관계의 역동성 또한 메이어에게는 전형적이었다. 언제나처럼 메이어는 모두 사업적인 형식으로 그룹을 조직화 시켜서 그룹을 호령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수줍고 쓸쓸해 했다.

권위에 대한 의지와 “고통스러운” 공포 혹은 개인으로서의 수줍음이라는 두 성격의 조합은 메이어에게 문제가 됐다.

한 대학교 동창은 메이어의 수줍음을 “거만함”으로 해석했다.

“메이어는 일을 하고 떠나버리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남아서 어울리고 피자도 같이 먹고 하지만, 그녀는 그냥 나가버려요. 일이 끝났으니까.”

실제로 메이어는 대학 내에서 별로 친교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기숙사에 살았던 사람에 따르면, 메이어는 항상 “학업만 집중하지 잘 어울리지를 않았다”고 전한다.

“그녀는 기숙사에서 친구를 새로 사과는 타입이 아니었어요. 항상 뭔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죠.”

스탠퍼드 시절 메이어의 사교성에 대한 재일 간단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그녀가 여러번 말했듯,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줍어한다.”이다. 후에 그녀는 친교 활동은 더 적으면서 보다 편안하고 더 친숙한 그룹에 들어간다. 심볼릭 시스템 선배로서 강사가 된 것이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가르쳤다.

컴퓨터학과 교수인 에릭 로버츠는 지금도 메이어의 멘토이지만 당시에도 그녀의 강의를 관장했다. 그는 메이어가 “정말 강의를 효율적으로 잘 했다”고 말했다.

봄 학기 동안 수업을 한 이후, 로버츠는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 평가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심지어 메이어가 종종 “분당 1 마일의 속도”로 말을 해도 학생들이 메이어를 좋아했다.

로버츠는 그녀에게 여름 학기도 해 보라며 스탠퍼드에 남으라고 말했다. 메이어는 기꺼이 좋다고 했다. 로버츠는 그녀가 가르치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당연했다. 스탠퍼드 학생들은 동창을 때의 메이어를 “오만하다”고 했지만, 그녀가 강사로 나오자 그녀는 훌륭하다고 평했다.

Marissa Mayer at Stanford University – YouTube
WATCH: Marissa Mayer teaches a class at Stanford

메이어는 나머지 학생 기간 동안에도 훌륭했다. 학사 학위를 받은 이훙도 그녀는 컴퓨터학 석사를 위해 학교에 남았었고, 세부 전공은 인공지능이었다.

대학원 졸업이 다가오자 메이어의 강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곧 선택을 해야 했다. 교육자가 되야 할까? 그녀에게 그토록 잘 맞는 역할에 투신해야 할까?

아니면 인생에 도전하여 기술 업계 어디에선가 일을 해야 할까?

Taking A 2 percent Chance On Google

스탠퍼드에서 심볼릭 시스템 학위를 받은 이후, 어째서 구글에 들어갔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Laura Beckman story”를 즐겨 말했다. 중학교 때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조앤 베크먼의 딸에 대한 이야기였다.

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로라는 배구팀을 하려 했었어요. 하지만 시도 끝에 무거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죠. 1군팀 벤치에 앉느냐, 아니면 2군팀 선수로 뛰느냐였습니다.”

“대부분은 그런 선택을 해야 할 경우 뛰는 편을 택해요. 2군팀으로라도 말이죠. 하지만 로라는 반대를 선택했습니다. 1군팀으로 시즌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해야 되자 이번에는 바로 대표팀 선수가 된 겁니다. 2군팀 선수로 시작했던 아이들은 이제 시즌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어야 했죠. 그래서 제가 로라에게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느냐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랬더니, 매일같이 더 나은 선수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도 훨씬 더 나은 선수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노라고 답했었어요. 설사 직접 뛰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죠.”

메이어의 말인즉슨, 자신을 바꾸고 성장 시킬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 주변에 있는 편이 언제나 더 낫다는 의미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녔죠. 그러다가 구글로 오게 됐습니다.”

메이어가 구글에 들어간 주된 이유였다. 그렇지만 자아 개선의 목적을 빼고 나면, 그녀를 부자로, 강력하게 만들어 줄 구글 입사를 그녀가 놓칠 뻔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스탠퍼드에서 마지막 해 4월 중순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메이어는 컴퓨터 앞에 앉아 파스타를 먹으며 이메일을 읽고 있었다.

이미 12곳에서 취직 제안이 와 있어서, 정말 고르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다가 받은 메일함에 업체 메일이 또 오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키보드를 통해 메일을 지워버리려 했다.

그런데 이런, 딜리트 키를 누른다는 것이 스페이스바를 눌러 버려서 메일을 읽게 됐다. 메일의 제목은 이러했다.

“구글에서 일해 보시겠습니까?”


Larry Page and Sergey Brin

메이어는 이메일을 읽고 여전히 그녀의 멘토였던 로버츠 교수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했다. 로버츠 교수는 그녀가 컴퓨터학 수업을 배웠을 때 이후로 계속 멘토로 지내고 있었다. 졸업 직전, 로버츠는 메이어가 구축중이던 추천(recommendation) 엔진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비슷한 것을 작업중이던 박사과정생들과 만나봐야 한다고 말해 줬다. 그 박사과정생들은 두 명이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메이어는 구글이 스타트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버츠 교수의 추천을 믿은 그녀는 원래 지우려 했던 메일에, 인터뷰를 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그녀는 구글 엔지니어인 크레이그 실버스틴(Craig Silversteen)과 만난다. 실버스틴은 그 영민함으로 메이어를 놀라게 했다. 로라 베크먼 식의 비유에 따르면 실버스틴은 대표급이었다.

구글은 메이어에게 일자리를 제안했고, 그녀는 구글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다만 메이어는 당시 실리콘 밸리 기업들을 고객으로 거느리고 있는 컨설팅회사, 매킨지(McKinsey)에서 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연히 매킨지보다 구글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답게, 정확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끌어 모아서 구글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를 예측해 봤다. 2%였다.

또한 메이어 생각에는 구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좀 우려스러웠다. 몇 년 지나면 가족들 간의 농담거리로 전락해버릴 수도 있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글로 가기로 했다. 메이어의 말이다.

“변환점이 있었죠. 회사를 세우려 노력하다 보면 성공하건 실패하건 제게 제안했던 그 어느 회사들에서보다도 배우는 점이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이었어요.”

그로부터 13년간 매리사 메이어는 구글에서 일하게 됐다.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매리사 메이어는 프로그래머로서 구글에 입사했고, 구글 검색 및 여러 다른 구글 제품들이 성장하면서 간부진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결국 수석 부사장까지 올라 수 만 명의 구글 직원들, 그리고 구글 제품을 사용하는 전세계 수 억 명이 그녀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덕분에 그녀는 억만장자가 됐으나,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고, 업계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궁금해했다.


Mayer during her early Google days.

초창기 구글은 일하기 재미나는 곳이었고 무료 음식과 같은 특전과 믿을 수 없는 성공도 거뒀다. 그렇지만 구글이라는 회사는 또한 끝 없이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이기도 했다.

1999년, 구글에 출근한지 이튿날, 메이어는 오전 11시 경, 부엌으로 먹거리를 가지러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당시 CEO였던 래리 페이지와 만난다. 페이지는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자기가 “숨어있다”고 말했다. “사이트가 다운돼서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렸어.”

물론 과장이었다. 사실 구글은 당시 너무나 잘 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Google.com은 다른 어느 웹사이트보다도 깔끔한 모양과 더 빠른 검색 엔진을 갖춰서 알타비스타나 라이코스같은 이전의 검색 엔진들로부터 빠르게 점유율을 빼앗는 중이었다. 사실 구글이 그날 다운된 이유는 구글이 넷스케이프와 협력하여 넷스케이프 사이트로부터의 검색 쿼리를 다루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구글의 당시 검색 결과를 처리하는 컴퓨터는 300대 뿐이어서, 구글은 넷스케이프에게 트래픽을 일부만 보내달라 요청할 정도였다. 넷스케이프는 물론 그 요청을 거절하고 사용자 모두를 구글에게 보냈다.

그래서 구글 사이트가 다운됐던 것이다.

구글 사이트는 그 날로 정상화됐지만 메이어와 실버스틴,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이 몇 시간이고 작업한 뒤였다. 메이어는 오전 3시에 귀가했다.

아마도 그런 기나긴 밤 때문이었는지, 메이어와 페이지는 매우 친밀해졌다. 구글에 있던 초창기 시절, 심지어 메이어와 페이지는 데이트까지 시작했었다.

메이어 하면 나오는 것이 긴 근무 시간이었다. 첫 2년간 그녀는 프로그래머로서 1주일에 100시간을 일했다.

메이어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수면 시간은 하루 4시간 뿐이었고 깨어 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구글에서 틈새를 발견했다. 구글 제품의 사용하기 쉬운 깔끔한 룩앤필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메이어는 픽셀과 색조, 그림자, 위치에 집착적이었고, 몇 가지 패턴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 중 “범용 검색엔진용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al user interface for a universal search engine)”와 같은 중요한 것도 있었다.

2005년, 메이어는 관리직으로 이동했고, 구글에서 제일 중요한 제품들의 룩앤필을 관장했다.

그녀는 그 일을 매우 잘 해냈다.


Mayer in 2005

구글에 처음 다닐 시절에도 메이어는 스탠퍼드에서 계속 강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승진했던 당시 학부생 3천 명을 가르쳤으며 강의활동 또한 지도하기와 교육, 조직 활동의 일환이어서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젊은 구글 직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기에 심지어 구글 내에서도 강의를 열 정도였다.

그녀가 구글에서 개설한 강의는 멘토십 프로그램으로서, “APM(associated product manager)”, 그러니까 신규 직원들 중, 수습제품관리자들을 매년 지정하여 그들을 가르치는 APM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메이어는 전체 “학급”을 이끌고 1주일 간 해외 구글 지사를 방문하는 연수를 시행했다.

구글 제품을 개발할 때면, 메이어에게는 더 큰 시련이 있었다. 메이어는 한 번도 쉽게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종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로봇같다느니 오만하다느니 평가했다. 그래서 그녀와 회의를 하고 나서 감정적으로 상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구글 제품의 외양을 책임지게 되자, 메이어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수 백만 구글 사용자들과의 관계 형성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감정이입이 자연스럽지가 않은 성격이 메이어에게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의도적으로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관계 형성에 있어서 뛰어난 방법 두 가지를 착안해낸다.


Mayer at the height of her power at Google.

첫 번째는 메이어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서, 사용자들의 기술 환경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메이어는 집 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아예 몇 년간 끊고, 미국 내 절대다수가 서비스를 설치할 때까지 기다렸다. 게다가 그녀는 안드로이드 폰을 만드는 구글에서 일부로 아이폰을 들고 다녔다. 모바일 웹 사용자 대부분이 아이폰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데이터로 배우기였다. 그녀는 구글 제품을 갖고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를 추적하고 조사하며 측정하고는, 해당 데이터를 근거로 디자인을 거듭 수정했다.

그런데 제품 개발에 있어서 메이어의 데이터에 따른 디자인 접근법이 언제나 선호받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석 디자이너였던 보먼(Doug Bowman)은 구글을 퇴사할 정도였다.

퇴사를 전한 블로그 글에서 보먼은 이렇게 적었다. “…구글 팀은 파란색 두 가지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각 푸른색 사이에서 어느 색의 효과가 가장 나은지 그림자 41가지 레벨을 테스트했다. 최근에 나는 3, 4, 5 픽셀 중 어느 두께의 경계선이 가장 나은지에 대해 토론을 벌였고, 내 의견을 증명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사소한 디자인 결정 갖고 논쟁을 벌이는 데에 지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다뤄야 할 디자인 문제 중에 훨씬 더 흥미로운 문제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먼은 결국 트위터로 떠났다.

메이어가 집착하는 데이터에 기반하는 디자인은 계속 더 많은, 더 큰 비판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메이어의 방식 덕분에 구글 디자인이 제일 효율적이 되고, 제품 개발 리더로 메이어를 만들어 준 부분도 있다. 구글 사람들은 그녀의 성공을 구글 검색이 아닌, 지메일이나 구글 지도, 구글 뉴스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이런 평을 했다. “매리사는 자기가 올바르다 느끼는 결정을 내렸어요. 그녀가 아마도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겠죠.”


Julian Guthrie profiled Marissa Mayer in San Francisco Magazine’s March 2008 issue

Fame and Glory

구글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 되자, 메이어도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뉴스위크는 그녀를 “10 Tech Leaders of the Future”라 불렀고 Business 2.0은 그녀를 “Silicon Valley Dream Team”이라 불렀다. 현재는 사라진 기술 뉴스 사이트인 Red Herring은 그녀를 “15 Women to Watch”의 목록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구글이 주식회사가 되고, 주가가 치솟자 메이어와 수 백명의 동료 직원들은 순간 부자가 됐다. 구글에 대한 언론의 칭송 또한 높이 치솟았고, 기술 업계에서 좀처럼 드물게 사진을 잘 받는 여자로서 메이어는 자연스럽게 언론의 고정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메이어는 또한 자신의 새로운 재산을 비밀스럽게 사용하여 스스로의 인지도를 오히려 높였다. 샌프란시스코 포시즌에 있는 500만 달러 짜리 펜트하우스를 구입하고, 구글의 마운틴뷰 본사 캠퍼스에 가까운 집도 하나 구입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고급 사교계에 불쑥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 손님들은 데일 치훌리(Dale Chihuly)와 같은 400 조각짜리 유리 작품의 진품을 집에서 볼 수 있었다.

메이어는 외부의 주목에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구글 홍보부 직원들에게 오히려 자신을 올바른 언론을 통해 더 홍보하라 요구했다.

대중에 대해 알리겠다는 메이어의 열의는 그녀 스스로가 수줍음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성격과는 상반되잖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사교계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수줍음을 버려야 했다고 설명한다. 화려한 잡지에 등장하는 일이 모든 독자와 컨택해야 함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파티에서의 사소한 대화보다 잡지에 등장하는 일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과잉보상같은 것도 있었다.


Mayer in Vogue in 2009

2000년대 말, Vogue 매거진은 메이어를 “34세의 억만장자이자 Oscar de la Renta에 집착적이고, 포시즌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구글 컴퓨터 프로그래밍 중역”이라 묘사했다.

구글 바깥에서 그녀의 스타성은 더욱 더 밝아졌다. 그러나 재산을 조용히 소비하는 분위기이고, 엔지니어들이 지배하는 구글 내부에서 메이어는 곧 포위를 받았다.

Demoted

2010년 말과 2011년 초, 매리사 메이어의 뛰어는 커리어는 갑자기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

2010년 10월, 메이어는 구글 검색 조직의 최상단에서 사라지고, 구글 지도와 그 외 “local” 제품의 조직도에 올라가게 된다.

승진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수평 이동이기는 했다. 부사장 직위와 함께 동시에 구글 운영위원회 자리(당시 CEO였던 에릭 슈미트의 운영위원회는 구글 내 최고 간부들이 동석했다)도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강등이었다. 메이어는 더 이상 구글에서 제일 중요해 보이거나 실제로 중요한 제품의 책임을 못 맡았다. 구글에서 그 제품은 검색이다. 검색이야말로 구글 수입과 수익 거의 대부분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구글 검색 운영을 하면서 메이어는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인터넷 기업에서 제일 중요한 제품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글 지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메이어는 계속 운영위원회에 속하여 에릭 슈미트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날라가버렸다.


Google CEO Larry Page did not put Mayer on his executive team.

2010년 12월, 공동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가 CEO 직을 에릭 슈미트에게 준지 10년째 되던 때에 다시 CEO 직을 맡겠다는 발표를 했다.

페이지가 공식적으로 구글을 통제한 때는 2011년 4월 부터이며, 그는 운영위원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중역회의를 만들었다. 그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역들의 모임이었다. 이 그룹은 “L-Team”이라 불렸는데 이 팀에 메이어가 빠졌다.

당시 메이어에게는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페이지가 제프 후버(Jeff Huber)라는 또다른 구글 간부에게 “Geo/Locak”을 맡긴다. 원래는 메이어가 책임자였고, 겨우 수개월 밖에 안 지났었다. 이제 메이어는 2003년에 입사한 후버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기수가 4년 아래인 후버에게 말이다.

메이어의 강등은 회사 전체가 느낄 정도였다. 한 전직 동료에 따르면 2010년 이전의 메이어는 간부진으로부터 “필요한 것 모두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상관[구글 제품부 수석 부사장]인 조너선 로젠버그(Jonathan Rosenberg)가 인력 확충이나 인수에 대한 결재를 안 내리면, 그녀는 로젠버그보다 위에 보고해서 그냥 결재를 얻어 버리곤 했었어요.”

그 일이 이제 멈춰졌다.

“뭔가 해 보려 하면, 인사부에서 메이어 씨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 말하죠.”

“전체적인 패러다임이 깨졌습니다.”

또 다른 전직 동료의 말이다. “제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의 매리사는 구글 내에서 정말 강력했습니다. 매리사가 칙령을 내리면 모두가 수행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니게 되더군요.”

구글에서 메이어의 흥망성쇠를 추적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구글 사이트의 “구글에 대하여” 섹션에 있는 간부진 목록이다.

2005년 11월, 메이어의 이름은 마침내 구글 간부진 페이지에 나타났었다. 2011년 5월, 그녀의 이름은 사라졌다.

매리사 메이어의 커리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메이어의 커리어가 2010년 부로 끝났다는 설명도 있다. 래리 페이지가 다시금 구글 CEO가 되기로 했던 때가 2011년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어와 페이지가 수 년 전 데이트를 했던 사이이기 때문에, 페이지가 비윤리적이라거나 편애한다는 말을 안 들으려고 메이어의 직접 보고를 허용할지 안 할 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사실 구글 모두가 그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이슈화 시키지는 않고 있었다. 타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꺼내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한 직원의 설명이다.

“구글은 종교 단체같은 곳입니다. OK인 주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주제가 있죠. 둘의 관계는 대화 해서는 안 될 주제에 속합니다.”

다만 메이어와 페이지 간의 한 때 로맨틱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곤란해 하는 직원 찾기는 사실 힘들다. 아마 둘 다 워낙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Mayer and her husband, Zachary Bogue

2007년 페이지는 루시 사우스워스(Lucy Southworth)라는 스탠퍼드 대학원생과 결혼했고, 결혼식은 리처드 브랜선(Richard Branson)의 개인 소유 섬에서 거행했다. 그 해 한 구글 동료가 메이어에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 “소개팅 시켜줄 테니 침착하렴.” “소개팅” 상대는 장신의 검정 머리, 바로 재커리 보그였다. 보그는 “The Bachelor”의 스타처럼 보이는 외모였다. 하바드에서 미식축구를 했고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의 은행가인 보그와 메이어는 2009년에 결혼했다.

결혼식을 다뤘던 보그 매거진에서 재커리 버그가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다. “밤에도 계속 일합니다. 일과 가정 사이에 뚜렷한 선이 없죠. 매리사의 일은 자연스런 확장이에요. 하루를 마치고 내뿜어야 할 뭔가가 아니죠.”

페이지와 사귀었던 과거 때문에 구글에서의 커리어가 중단됐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메이어의 전직 동료들에 따르면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보다 일반적인 해설은 다음과 같다. 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야망이 그녀에게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업에 존재해야 할 3대 기둥은 주주와 직원, 고객이라는 철학이 있다. 구글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고객이 있다. 하나는 구글 서비스 사용자이고, 다른 하나는 사용자가 보며, 구글에게 돈을 지불하는 광고주들이다.

메이어는 구글에 있던 내내 그 중 한 소비자만 우려했다. 사용자들이다.

사실 그것이 그녀의 업무이기는 했다.

구글 초창기 시절부터 메이어의 임무는 언제나 사용자들이 사랑하는 제품 만들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임무를 외곬수적으로, 하루 4시간 자면서, 주당 100시간 일하고 휴식 없는 회의를 거치면서 해냈다.

그러나 메이어는 너무나 외곬수였던 모양이다. 적어도 그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말이다.

메이어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던 다른 구글 간부들과 비교해 볼 때, 메이어는 구글의 사업적인 측면에 대해 배우기에 소흘했다.

광고 영업을 뛰었던 한 전직 간부의 말이다. “그녀와는 일 안 했습니다. 사실 비밀이죠.”

이 사람의 말은 메이어가 구글 내 운영위원회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그랬다고 한다. 그녀는 스스로의 커리어를 위해 운영위원회에 가입했지만, 메이어는 늘상 구글 제품을 보여주기 위해 회의에 들어섰다. “사업 검토 회의 때에는 한 번도 안 나타나더군요.”


Susan Wojcicki and Salar Kamangar during Google’s early years

정반대로 메이어 동료인 수잔 워지스키(Susan Wojcicki)와 제프 후버는 “자신들의 수평선을 확대 시키기에 항상 관심 있었기 때문에 늘 참여했습니다”였다.

2010년, 메이어의 구글 커리어가 중단됐을 때, 위지스키와 후버는 오히려 승진됐다. 둘 다 래리 페이지에게 직접 보고를 했고 후버는 메이어의 상사가 됐다. 현재 워지스키는 구글에서 제일 강력한 간부 두셋 중 하나가 됐다.

메이어는 이런 종류의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래리 페이지는 CEO가 되기 수 개월 전, 월요일에 있는 운영위원회 이후 2시간 짜리 장기 전략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

간부 회의에 초대받기 위해 애썼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크롬과 안드로이드 간의 연계성 이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어는 그런 회의에도 거의 안 나타났어요. 출장중이라고 하는데 누가 알겠어요?”

회의 참가자들 중 일부는 결국 페이지에게 직접 보고하는 지위까지 올라서게 된다. 그 중 하나가 현재 구글 크롬과 안드로이드 제품 모두의 개발을 이끌고 있는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이다. 피차이의 승진은 메이어에게 쓰디 쓴 잔이었다. 그는 원래 메이어를 위해 일했었고, 그녀가 그를 승진 시키기도 했었다. 이제 그는 메이어를 앞질렀다.


Sundar Pichai

하지만 한 전직 동료에 따르면, 구글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피차이와 메이어의 차이는 극명하다고 말한다.

“순다르는 회사를 돕겠다면 무슨 일이건 합니다. 내무적으로도 결과를 내기 위해 협조를 하고 있었죠. 누군가 오프라인이고 전략을 못 얻으면 직접 찾아가서 대화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는 정말 협력을 이끌어냅니다. 매리사는 그런 일을 전혀 못 했어요.”

메이어의 한 전직 동료에 따르면 메이어가 그 많은 회의에 불참한 이유는, 구글의 사업적 측면이 주제가 됐을 때, 메이어가 항상 “별 관심이 없었다”는 점도 있었다.

“메이어는 소비자와 사용자만 추구했습니다.”

그러한 측면이 결국 메이어의 구글 커리어를 끝장 낸 셈이며, 나중에 야후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매리사 메이어의 갑작스러웠던 쇠락에는 구글의 사업적 측면에 대한 무관심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페이지와의 개인사보다도 더 큰 이유다.

메이어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최고를 안다는 선생님 스타일의 리더십이었다. 그런데 구글 내에서 메이어의 리더십을 거슬려 하는 움직임이 마침내 시작된 셈이다. 더군다나 메이어의 리더십은 구글을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었다.

결국 구글 엔지니어들이 나서서 뭔가 해 보기로 했다.

대규모 기술 컨퍼런스를 베이 에이리어에서 여러 번 개최했던 존 바텔(John Battelle)은 다들 연설가라 말하는 메이어에 대해 이런 묘사를 했다. “스스로가 확신을 갖지 못 한 상태의 메이어와는 어떠한 대화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방 안에 디자이너와 제품 관리자로 가득차 있고,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면 완고한 스타일이 작동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메이어는 동료들로부터 수 년간 고립돼었다.


Mayer and and Salar Kamangar clashed often.

특히 짜증냈던 동료가 살라 카만가(Salar Kamangar)였다. 카만가는 현재 구글이 소유한 유튜브의 CEO이며, 9번 직원으로 구글에 합류했었다. 그는 구글 최초의 사업계획을 고안했으며, 초기 구글의 재무와 법무를 맡고 있었다. 잘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어보다 어린 카만가는 그녀와 함께 구글에서 성장했었다.

이 둘은 자주 부딪혔다.

특히 카만가를 분노하게 했던 것은 정말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빠르게 말하는 메이어의 말 속도였다. 전혀 말에 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카만가가 메이어에 대해 가졌던 불만을 잘 알고 있는 한 구글 직원의 말이다.

“학교라면야 괜찮습니다. 최고의 아이디어가 나오면 논의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몇 번을 얼마나 시도하건 간에 토론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입씨름에서 이겨버릴 테니까요. 정말 까다로운 조건인 셈입니다”

메이어와 카만가 사이의 경쟁심은 너무나 강해서 카만가가 그녀보다 앞서서 부사장에 올랐을 때, 메이어는 구글을 나가겠노라 위협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인지 수 개월만에 메이어도 승진할 수 있었다.

동료들이 싫어했던 메이어의 습관은 또 있었다. 학교에서 바로 온 그녀의 경력이었다.

구글에서 메이어는 동료들에게, 자기와 말하고 싶으면 “근무시간” 동안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이어는 온라인에 자기 일정을 스프레드시트로 해서 올렸고, 자기와 말하고 싶은 누구나 5분동안의 면담 예약을 하도록 요구했다.

메이어의 “근무시간”은 보통 오후였는데, 보통은 사무실 바깥에서 시작하여 밤까지로 돼 있었다.

사제지간 정도로 권력 관계가 확실한 학교에서는 “근무시간”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은 교수에게 복종해야 하니 말이다. 교수는 보통, 학생들보다 나이도 많고 멘토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이어의 근무시간은 그녀의 아래 사람들만이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적용됐다.

따라서 취리히로의 연수나 직위 지정같은 것을 메이어와 논의하기 위해 예약을 잡는 수습제품관리자들은 물론, 메이어만큼 구글에 오래 있었던 부사장들마저도 똑같이 예약을 잡아야 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구글 엔지니어와 제품 관리자들에게 있어서 메이어의 “근무시간”은 불쾌한 경험이었다. 소비자가 직접 보는 제품을 선보인다거나 업데이트를 할 때 메이어의 결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구글 엔지니어이자 메이어를 직접 고용했던 실버스틴의 말이다.

“메이어의 약점은 위임을 안 하려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녀는 잠도 안 자죠. 네 다섯 시간 밖에 안 자잖아요. 필요가 없으니 남에게 맡기지도 않는 겁니다.”

제품 변화에 대한 결재때문에 메이어의 “근무시간”때문에 제일 불만을 가졌던 팀은 보통, 구글 검색을 맡고 있는 엔지니어들이었다.


One story is that Amit Singhal told Larry Page that Mayer had to go.

메이어의 전직 구글 동료들 중에 그런 점을 확인해 준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중에서도 아미트 싱할(Amit Singhal)의 얘기가 결정적이었다.

메이어가 아직 구글 검색의 외양을 관장하고 있을 당시, 검색엔진을 실질적으로 받쳐 주는 알고리듬을 만들어냈던 엔지니어 중 한 명이 싱할이었다. 원래 2001년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작성했던 코드를 재작성한 싱할은 “구글 펠로(Google Fellow)”로 지정됐으며, 회사 내부에서도 그는 큰 인물이었다.

한 전직 동료에 따르면 결국 래리 페이지에게 가서 구글 검색 조직 간부진에서 메이어를 제거해야 한다고 직언했던 검색 엔지니어가 넷 있었는데, 개중 하나가 싱할이었다고 한다.

“이 4명은 계속 메이어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었어요. 이 랭킹을 바꾸고 싶다고 하면 매리사는 항상 검토하기 전까지는 출시 못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문제는 이미 3주가 흘렀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마침내 싱할과 다른 엔지니어들이 직접 래리 페이지에게 가서 자기들 아니면 메이어 중에서 고르라 말했다고 한다.

이때 페이지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검색팀에서 메이어는 빠지게 됐다. 그녀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페이지가 검색팀 간부진에서 메이어를 제거한 이유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라는 얘기도 있다. 한 직원의 말이다.

“래리가 CEO가 되면서 매리사를 보니까 다른 주주들과 부딪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 보인 것이죠.”

이 주제를 잘 아는 또다른 한 구글 직원에 따르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고 말한다. 그는 메이어가 과연 2010년과 2011년에 불공정하게 대우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했다.

“야망이 있고 여자이면서 남자들 세계에서 터프했죠. 그래서 문제가 종종 생겼습니다. 젊고 성공을 했으니 사진도 많이 찍혔고요. 게다가 그녀는 젊고 아직 배우고 있다는 점도 생각했습니다. 아마 당신도 종종 올바르게 이해 못 하시죠.”

메이어의 커리어가 2011년에 멈춰진 또다른 이유는, 구글이 성장했다는 점도 있다.

2010년 구글 직원 수는 2만 4천 명 정도였다. 오랜 기간 동안 재직한 간부가 공동 창업자를 개인적으로 알아서, 메이어의 경우 원하는 바를 바로 얻을 수 있던 그런 시기가 지났다는 의미다. 그 전환기를 거쳤던 한 직원의 말이다.

“그런 식으로 회사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죠. 성장을 하게 되면 이전에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지배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고용하면 일이 안 돌아가죠.”

그래서 2011년 초, 매리사 메이어의 구글 내 커리어는 중단됐다. 하지만 거대한 또다른 기회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2012년 7월 16일 월요일 오후, 야후의 수석매출책임자(CRO)인 마이클 바렛(Michael Barrett)이 뉴욕 JFK 공항 게이트에 서서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Michael Barrett had only joined Yahoo weeks before Mayer.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기자였다. “오, 세상에. 새로운 보스가 생겼어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자는 야후에 새 CEO로 구글 출신, 매리사 메이어가 임명 받았다는 소식을 바렛에게 전했다.

바렛은 충격을 받았다.

바렛 스스로도 구글을 떠나 야후로 옮긴지 한 달도 채 못 됐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바렛은 좋은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가 구글을 떠난 이유는 야후 사장인 프레드 아모로소가 그에게 야후의 임시 CEO인 로스 레빈슨이 정식 CEO가 될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바렛은 비행기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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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사 메이어가 야후에 어떻게 들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2011년 여름부터이다.

Third Point라는 해지펀드의 관리자였던 댄 롭(Dan Loeb)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사진들 사퇴 좀 시키고, 자기가 고르는 CEO를 올리면 야후에 매우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으리라 결정 내렸다.

지난 10년간 경영이 엉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야후에 투자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유가 간단하게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그동안 야후에 멋진 제품이 없었다 하더라도, 매달 7억 명 정도가 여전히 야후 사이트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야후가 아시아의 인터넷 기업 두 곳에 아주 뛰어난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Alibaba와 Yahoo! Japan이다. 롭은 이 투자가 현재의 경영자들 덕분이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롭은 5%의 야후 지분을 갖고 야후 CEO 및 몇몇 이사진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주주운동을 개시했다. 그가 보내는 서한에서 롭은 야후가 10년간 경영이 엉망이었다고 지적하고 이는 이사진의 실책이 크다고 적었다. 12월, 야후 이사진은 PayPal의 사장인 스콧 톰슨(Scott Thompson)을 야후의 새 CEO로 임명하여 롭을 달래기 바랬다.

롭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톰슨에게 새로운 이사진을 임명하라며 로비를 시작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전직 MTV 사장인 마이클 울프(Michael Wolf)를 컨설턴트로 고용, 톰슨을 대체할 인물을 물색하도록 시켰다.


Dan Loeb asked Michael Wolf to find a CEO for Yahoo.

새 CEO 찾기라는 임무를 맡은 롭과 울프는 2012년 1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여러 번 회의를 했다.

어느 날 아침, 롭과 울프는 남쪽으로 가서 벤처투자자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essen)과 조찬 모임을 갖는다. 장소는 안드레센의 집이었다. 오리지널 웹브라우저 기업인 넷스케이프의 공동 창업자로 유명한 안드레센은 10억 달러 규모의 기업 두 곳의 설립을 도와서 벤처 투자 회사를 성공 시켰었다. 2012년 겨울, 안드레센은 실리콘밸리의 도사님이 되어 있었다.

롭과 울프는 안드레센에게 혹시 야후 이사가 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안드레센은 야후 창업자 및 현재의 경영진에게 적대적으로 비쳐질 스스로의 이사 임명을 거절했다. 다만 그는 야후의 전략을 기꺼이 논의했다.

뉴욕 출신인 롭과 울프는 안드레센에게 야후가 누구를 고용해야 할지, 미디어 전문가이어야 할지, 제품 전문가이어야 할지를 물었다.

“미디어 전문가”는 야후를 거의 텔레비전 방송국이나 잡지 출판사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인터넷에서 말이다. 그의 전문성은 훌륭한 콘텐트를 찾아내서 제작자 및 배급자와 협상을 하고 콘텐트에 광고를 붙여서 팔 능력을 지녀야 했다. CBS의 CEO, 문베스(Les Moonves)와 전 News Corp의 COO인 체어닌(Peter Chernin)이 그런 종류의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20년 동안 디즈니를 지루한 제작사에서 거대 기업으로 일군 마이클 아이즈너(Michael Eisner)도 마찬가지였다.

“제품 전문가”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을 데리고 소비자들이 유용하게, 그리고 집착적으로, 혹은 재미로 쓸 소프트웨어 툴을 만들어낼 인물을 의미했다. 페이스북 CEO인 저커버그(Mark Zuckerberg)가 이런 종류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야후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미디어” 기업으로 행동한다면 콘텐트를 제작하고 사들인 다음 야후 사이트를 통해 유통 시키는 방식으로 소비자를 끌어 모을까? 혹시 “제품” 기업으로 행동한다면, 검색과 웹메일, 주식 차트, 사진 저장 등으로 사용자를 끌어 모아야 할까?


Marc Andreessen

안드레센의 말이다. 야후를 혹시 운영한다면 야후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훌륭한 야후 제품을 만들 줄 아는 누군가를 고용하는 일이다.

안드레센은 기술 기업과 “보통의” 기업의 차이를 말했다. 그에 따르면 평범한 기업의 산출물은 자동차나 신발, 생명보험 등 상품이다. 그가 볼 때 기술 기업의 산출물은 혁신이다. 지금 뭘 팔건 간에, 5년 후에는 뭔다 다른 것을 팔고 있을 것이다. 즉, 혁신을 멈추면 그 기업은 죽는다.

안드레센에 따르면, 구글과 페이스북, 애플, 혹은 수많은 실리콘밸리의 신생 기업들과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혁신적인 제품을 개척하고 내놓아야 하며, 야후는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날카로운 메시지였다.

2012년 5월, 롭은 마침내 스콧 톰슨을 몰아낼 방법을 알아냈다.

롭은 톰슨이 1979년, 회계학 학위로 Stonehill College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회계학”과” 전산학 학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야후 웹사이트에, 게다가 심지어 증권거래위원회(SEC)에 4월 제출한 파일에도 톰슨의 학위가 회계와 전산학으로 기재돼 있었다.

5월 3일, 롭은 이 정보를 담고 있는 서한을 야후 이사진과 SEC에 제출한 동시에 일반에도 공개했다. 5월 13일, 톰슨은 건강상 이유로 사임했다.


Scott Thompson resigned from Yahoo after Dan Loeb revealed his bio was false.

외부 CEO 스카웃 전문사의 도움 없이 톰슨을 고용했던 곳이 야후 이사진이었다. 이사진 또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법적 합의를 통해 야후 이사진은 롭에게 이번 여름이 지나기 전까지 CEO 후보를 찾으라 요청했고, 5명의 이사가 즉각 사임했다. 롭과 울프는 야후 이사가 되었고, 특히나 두 개의 중요한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롭은 이사진의 거래(transaction)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아시아의 가치 높은 자산을 판다거나 할 때 결정력을 지닌다는 의미다. 울프는 CEO 영입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즉각 차기 CEO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울프가 염두에 둔 인물은 있었다. 안드레센이 권유했던대로 “제품 전문가”였다. 그는 경영진 리크루터인 Spencer Stuart의 시트린(Jim Citrin)에게 야후 CEO가 어때야 하는지 지침을 주었다.

울프가 시트린에게 줬던 문건에 따르면 야후는 최고의 “콘텐트, 개발자, 제품 혁신, 광고, 마케팅, 경영력이 있는 인재들”을 끌어 모을 문화를 만듦으로써 모바일 기기에서 야후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현대화” 시킬 인물을 고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문건은 야후 이사진이 야후의 “신뢰성과 기술 혁신 커뮤니티로서의 명성을 재구축할” 인물을 찾아야 한다고 쓰여져 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과 같은 업체들과 파트너십도 형성할 수 있어야 했다.

2012년 5월 21일, 시트린과 이사진의 첫만남에서 그는 이사들에게 울프의 문건에 어울릴 만한 인물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시트린은 아마존과 애플, 구글과 같은 곳에 그런 인물들이 있으며, 야후로서 그들을 영입하기가 매우 어려우리라 지적했다.

이사진은 스트린이 제시한 후보 목록을 받았다.

“미디어 전문가”이지 “제품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이사진들 중에서 제일 촉망받는 인물은 로스 레빈슨이었다. 그는 톰슨 사임 이후 야후의 임시 CEO를 맡고 있었다.

야후의 산타모니카 지사에서 일했던 레빈슨은 서부의 연예사 CEO에 어울릴 만한 외모였다. 자기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를 가리킨다거나 매우 넓은 미소를 지녔으며, 머리카락도 정돈된 검정색이었다. 미디어 거물들이 모이는 Allen & Co의 Sun Valley 컨퍼런스에서 받은 양털 스웨터 차림을 한 그는 멋진 외모의 인물이었다.

레빈슨은 2010년 10월, 야후에 “미주” 지역을 맡는 수석 부사장으로 들어왔다. 레빈슨은 2011년 야후을 “프리미엄 급의 디지털 미디어 기업”으로 소개하여, 당시 야후 연례 주주총회 때 주주들을 매혹 시켰었다. 물론 그는 야후가 “제품” 회사인지 “미디어” 회사인지 좀 혼란스러운 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지만, 여러 이사들이 보기에 레빈슨은 야후의 주된 사용자들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계획도 있었다.


Apple’s Eddy Cue was a candidate for the Yahoo CEO job.

다른 후보진으로는 구글의 수석사업책임자(CBO)인 니케시 아로라(Nikesh Arora)와 애플의 인터넷 소프트웨어/서비스의 수석 부사장, 에디 큐(Eddy Cue), Web TV 사이트인 Hulu의 당시 CEO였던 제이슨 킬라(Jason Kilar)도 있었다.

이사진은 시트린에게 구글의 매리사 메이어에게도 접근해 보라 요청했다.

시트린은 메이어가 구글에만 있었다면서 이런 자리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메이어가 거대한 주식회사를 이끌 능력이 있을지 의문스러워 하는 이사들이 많았다. 그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메이어가 재무재표를 다뤄본 적은 있는가? 그녀가 겨우 1년 전에 강등 당하잖았던가?

시트린은 아무튼 메이어에게 전화해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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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Economic Forum

2012년 6월 중순, 매리사 메이어는 생각에 잠긴 채 비행기에 올랐다. 월요일, 그녀는 Spencer Stuart의 짐 시트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었다. 그리고 그는 야후가 고용한 인물이었고, 그는 야후의 이사, 마이클 울프와 같이 있었다.

혹시 울프씨와 통화 하시겠습니까? 예.

이제 메이어는 뉴욕으로 가서 울프와 시트린, 그리고 다른 야후 이사들인 데이비드 케니(David Kenny)와 존 헤이스(John Hayes), 토마스 매키너니(Thomas McInerney)와 함께 울프의 맨하탄 아파트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구글에서 13년을 보냈던 메이어는 마침내, 실질적으로 구글을 떠날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지난 2년간 세상은 그녀가 “강등됐다”고 말해왔다. 앞서의 11년 이상으로 조용한 2년간이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더 흥미롭고 도전할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역적이든 세계적이든, 그녀는 이제 구글에서보다 훨씬 대형 운영을 할 수 있게 됐었다.

저녁 먹으면서 울프와 다른 이사들이 “강등”에 대해 물었을 때 메이어는 강등 질문이 나올 때마다 했던 답변을 되풀이했다. 250명의 제품관리자들을 관리하다가, 1,100명에 이르는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영업으로 구성된 다양한 관리자 그룹을 어떻게 관장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메이어는 6천 명의 계약직도 관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구글 전체 인력의 20~25%를 관리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지역이건 해외이건 말이다. 따라서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들의 직무만큼 다양한 유형의 직원들이었다.

2011년 9월, 그녀는 1억 2,500만 달러에 Zagat를 인수한다. Zagat는 “강등된” 간부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인수가 아니었다. 심지어 Zagat 인수는 구글이 인수한 업체 중 액수로 10위였으며, Zagat과 구글 검색은 구글 철학의 변화까지 시사했다.

이전의 구글은 검색엔진에 나타나는 콘텐트를 소유하거나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존재하거나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의 인덱스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2010년 메이어가 들어간 이후, 그녀는 지리 데이터를 모아다가 웹 상에 놓는 것 구글의 “나머지” 서비스가 별로 좋지 않음을 알아낸다. 웹사이트를 긁어 모아 인덱스 시키는 것보다 신통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구글이 이제 데이터를 소유하기 시작할 때임을 결정 내렸다. 그녀의 보스인 제프 후버와 래리 페이지는 그녀에게 동의하여 철학적인 변화를 승인했다. 이제 구글은 지역기반 검색의 대단히 많은 콘텐트를 소유하고 있다. 지역 기반 검색은 급속히 인터넷의 미래가 되어가고 있다.

메이어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마저, 모바일의 어려워져만 가는 경쟁 상황에서 자신이 구글을 핵심적으로 여전히 돕고 있다 생각했다. 바로 몇 개월 전만 해도 애플이 지도 서비스 업체들을 인수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당시 애플이 보낸 인재영입반이 메이어의 사람들에게까지 손길을 미치고 있었다.

분명 애플은 뭔가 큰 한 방을 노리고 있었지만, 메이어는 그것이 무엇일지 몰랐다(애플이라면 완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발표하지 않을 기업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일이 바로 아이폰에서 구글 지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애플 지도를 넣을 계획이 아닐까 계산했다. 이미 그녀는 자기 사람들에 대한 애플의 인재 영입 제안을 뿌리쳐 놓았었다. 대신 연봉 인상이나 독립성, 새로운 직위, 혹은 (실질적으로) 더 많은 일거리와 책임을 안겼다. 그녀는 자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보고서 그 어느 것도 애플로 누가 갔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메이어는 아이폰용 새 구글맵 앱을 작업중에 있었고, 그녀는 애플이 뭘 내놓건 간에 구글맵이 우위이리라 생각했다.

메이어는 2010년의 임무 교대가 회사 바깥 사람들(특히 언론)에게는 강등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사항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단 그녀는 2012년 6월, 뉴욕으로 비행기 타고 가면서 그녀가 지난 2년간, 그 어느 때보다도 배운 점이 많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더 큰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됐음도 알고 있었다.

6월 24일 저녁, 메이어는 울프의 현대적인 5번가 아파트에 도착했다. 비공식적인 만찬이었다.

야후 CEO 제안 자리이기도 했다.

대화 내내 메이어는 생각하고 있던, 야후의 문화와 경영진, 제품 라인업의 전반적인 개수 계획을 내세웠다.

메이어가 나가자, 한 이사가 스트린에게 말을 건넸다. “차기 야후 CEO감일세.” 위원회는 울프에게 계속 그녀와 연락을 유지해도 된다 허가를 내렸다.

한 이사에게 뭔가 재미난 점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는 숨기기로 했다. 울프는 대단히 비싼 포도주를 대접했으며, 메이어는 한 모금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마 그저 긴장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울프는 메이어를 고용하기 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만찬 이후 야후 영입위원회 의장인 울프는 매리사 메이어가 야후의 차기 CEO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검색과 구글 지도, 지메일과 같은 구글 제품을 운영했던 경험으로, 그녀야말로 실리콘밸리의 현자, 마크 안드레센이 1월에 그에게 말했던 혁신적이고 제품지향적인 CEO감이었다.

하지만 울프와 친-메이어 이사진들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6월중, 다른 야후 이사들이 이미 임시 CEO인 로스 레빈슨을 정식 CEO로 올려야 한다고 결정내린 상황이었다.


Ross Levinsohn and Katie Couric

톰슨이 5월중 CEO를 사임했을 때 레빈슨은 임시 CEO가 됐었다. 새로이 사장이 된 프레드 아모로소는 레빈슨의 뒤를 밀었고 그에게 정식 CEO가 될 것이라 일러 뒀었다. 그 말을 들은 후, 레빈슨은 야후의 모든 직원들에게 메모를 보냈다. “흥미가 생겼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가 하는 일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요 영역에서 대단히 유능하고 비교할 곳이 없는 팀입니다. 게다가 모든 곳에서 자주색의 자부심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빠르게 전진합시다.”

레빈슨은 기회를 한껏 활용했고 6월 말이 되자(정말, 수 주일만에)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뒀다. 특허에 대해 페이스북과 사인했고, 구글의 광고 책임자인 마이클 바렛을 포함, 역량 있는 간부를 재빠르게 영입했다. 게다가 레빈슨과 그의 오른팔, 짐 헤크먼은 수 주일만에 주문형 음악 서비스 업체인 Spotify 등 콘텐트 파트너십 계약도 여러 건 체결해냈다. 레빈슨과 헤크먼은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그리고 급속 성장중이던 뉴욕 기반의 AppNexus와 더 큰 계약 협상 중이기도 했다.

정식 CEO가 되기 위한 노력이 있자, 업계에서는 야후 이사진에게 어서 레빈슨을 정식 CEO로 임명하라는 압박이 시작됐다. 언론과 광고업계, 그리고 연예오락 업계에 있는 레빈슨의 친구들은 야후 이사진에게 그를 추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LinkedIn CEO Jeff Weiner and cofounder Reid Hoffman lobbied for Ross Levinsohn.

월스트리트저널의 D: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LinkedIn의 CEO이자 공동창업자인 제프 위너(Jeff Weiner)와 벤처투자자인 리드 호프먼(Reid Hoffman)은 열광적으로 레빈슨을 밀었다. 그가 임명된다면 야후에 드디어 제대로 된 CEO가 들어간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톰슨의 후임자가 거명이 안 된 채 수 주일이 흐르자, 심지어 마크 안드레센도 롭엑 야후가 레빈슨을 정식 CEO로 앉혀서 미디어 전략을 이끌게 해야 한다고 서한을 보냈다. 최고급의 제품 지향 CEO를 찾지 못 할듯 하여, 계속 임명이 지체될 경우 회사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7월 초, 레빈슨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이사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레빈슨이 야후 정식 CEO가 되기를 원했다.

The top secret interviews


The Four Seasons in Palo Alto

2012년 7월 11일, 수요일 아침이었다. 고속도로 옆에 있는 주차장 중앙의 유리 빌딩인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포시즌 호텔 앞에 소형 버스가 도착했다. 세워진 버스에 10여 명의 중년 간부들이 조용히 올라 탔다. 이들은 야후의 이사진이었고 버스에 타기는 했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채였다. 그들의 도착 장소는 비밀이었다. 결국 야후의 운명을 결정 내리게 될 텐데,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날 이사진은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가질 참이었고, 정식 CEO 후보자는 4명이었다.

영입위원회는 전체 이사진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면접인지 알고 있느냐 물었고, 그들 중 하나가 All Things D의 전문기자인 스위셔(Kara Swisher)에게 장소를 누출했었다. 비행사 차림에 어려운 질문을 해온 스위셔는 그동안 야후의 정리해고와 고용, 인수 등의 뉴스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보도했었다. 새로운 이사진은 그녀에게 소스가 있고, 그 소스는 아무래도 이사진 중 하나이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위셔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6일 전, 스위셔는 이사진이 Hulu의 CEO, 제이슨 킬라(Jason Kilar)를 후보로 고려중이라는 기사를 냈었다. 덕분에 훌루의 모기업인 디즈니와 뉴스코어에 있어서 킬라의 입장이 곤란해졌고, 그는 스스로 후보군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야후 이사진으로서는 좋은 선택지가 사라진 셈이었다.

데이비드 케니가 특히 비밀주의를 고집했었다. 스콧 톰슨을 고용했던 이전 해 가을, 케니는 야후에서 CEO 면접을 봤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지자 케니는 당시 사장이었던 Akamai의 CEO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물론 케니는 멋지게 설욕했다. The Weather Channel의 CEO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면접 때문에 같은 일이 반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버스는 정확히 5마일을 이동했다. 남부의 101도로를 지나 Oregon Expressway를 나와 Page Mill 도로로 들어섰다.


This is the secret location of the Yahoo CEO interviews

10-15분이 지나자 버스는 어느 빌딩으로 들어갔고 모두가 나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Third Point의 로펌인 Gibson Dunn이었다. 이곳을 고른 장본인은 짐 시트린이었으며, 그는 버스도 선별했다. 그런데 이 장소선정이야말로 Third Point 이사진들의 신호가 아닐까 생각한 이사진도 있었다.

시트린은 또한 레빈슨을 따로 데려 올 차도 준비했다. 레빈슨조차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으며, 다른 후보자에 또 누가 있는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먼저 도착한 레빈슨은 계획을 프레젠테이션했고, 그 때까지 이사진은 그에게 친밀했다. 그는 야후를 “플랫폼” 사업에서 빼내기 원했다. 플랫폼 사업은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과 경쟁을 벌여야 했으며, 콘텐트 사업으로의 이주가 레빈슨이 원하는 바였다. 물론 그는 그가 야후 엔지니어들과 제품 개발부를 무시한다고 우려하는 이사진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품 책임자인 샤시 세스, 그리고 그의 팀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도 거론했다.

그 때 인터뷰가 이상해졌다. 롭에게는 이미 여러 번, 매일 같이 얘기했던 사항이었다. “제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죠.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아시죠.”

짐 시트린이 레빈슨에게 그가 잘 했다고 말하자, 레빈슨은 이사진이 “미디어”로의 방향 전환에 대해 동의한다면, CEO는 레빈슨의 차지라 들었다.

레빈슨이 방을 나갔다.

서로 만나지 않도록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메이어가 리무진으로 도착했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학업, 그리고 커리어를 잘 알고 있다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메이어는 방으로 걸어 들어와 그들을 한 방에 날렸다.

그녀는 야후와 그 제품과의 오랜 인연을 묘사했다. 그녀는 야후 제품이 앞으로 자신의 지휘 하에 어떻게 변해갈지를 설명했으며, 그녀의 프레젠테이션에는 야후의 검색 사업과 사용자 분석, 데이터가 거대하게 포함돼 있었다. 그녀는 야후의 문화를 보다 투명하게, 활발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바꾸겠다고 말했다. 메이어는 알려진 자신의 약점을 거명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사항별로 얘기했다. 자신에게 없는 기술을 갖고 있는 인재 고용도 포함돼 있었다.

메이어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짐 시트린은 그에게 이사진의 결정이 오후 8시경에 이뤄지리라 알려줬다.

그녀가 방을 나섰고, 이사진은 아직 최종 결정을 못 내린 상황이었다.

메이어의 임명을 반대하는 이사진이 아직 있었다. 그들은 메이어에게 충분한 기업 경력이 없으며, Third Point 이사진이 통제 가능한 인물을 앉히려 할 것이기에 레빈슨이 더 낫다는 이사진도 있었다. 그들은 최종 면접 장소가 “비밀”이며, Third Point 변호사들 사무실임을 간과하지 않았다.


Brad Smith worried Mayer didn’t have enough corporate experience.

특히 아모로소가 메이어의 임명을 반대했었지만, 브래드 스미스, 데이비드 케니 또한 레빈슨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미디어” 전략이 메이어와 그녀의 “제품” 전략에 비해 야후에 있어서 더 낫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메이어가 훌륭한 측면을 보여줄 테지만, 트위터나 구글 지도, 페이스북과 경쟁하려들 것이기 때문에 레빈슨이 더 안전한 선택이며 수입도 보장돼 있으리라 주장했다.

이사진에 오르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롭과 그의 표는 분명 중대한 변수였다. 롭은 메이어의 전략에 위험도가 크고 그만큼 보상이 크다는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롭이 보기에 야후의 아시아 자산 매각과 주식 환매, 혹은 배당이 야후의 가치에 충분한 “바탕”을 만들어줄 것이었다. 즉, 메이어가 내보인 도박에 운을 걸 만했다.

오후 8시, 데드라인이 넘어갔고, 다른 동네에서 저녁 파티 중이었던 메이어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밤 9시 45분, 이사진은 여전히 그녀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인 보그에게 파티를 떠나고 싶다고 알렸다.

그 시간, 울프는 짜증날 정도로 메이어를 이사진에게 밀고 있었다.

마침내, 친-메이어 이사진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메이어를 CEO로 임명하고 레빈슨에게는 거액을 제안하여 COO로 두는 편이 어떨까? 그녀 나름 “제품” 전략을 추구하되, 레빈슨이 영업부를 거느리고 거대 미디어 기업과 계속 계약을 체결할 묘안이었다.

비공식 투표가 있었고, 친-메이어 이사진이 절대다수였다. 아모로소 진영이 물론 반대했지만 말이다.

끝난 일이었다. 공식 투표도 곧 일어났다.

이번에는 이사진 전원이 매리사 메이어를 야후의 새 CEO로 임명하도록 투표했다.

그동안 메이어와 보그는 저녁 파티에 남아 있기로 정했지만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작별 인사를 하려 할 때 메이어의 휴대폰이 드디어 울렸다. 짐 시트린이었다. 그녀는 통화가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도록 놓아 두었다.


Jim Citrin called Marissa Mayer to offer her the job.

시트린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매리사… 아마 웃으실 겁니다. 우리도 웃고 있어요. 바로 전화 부탁.”

이사진이 메이어에게 임명을 위해 CEO를 제안했을 때 메이어는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려야 할 소식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임신 5개월 차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울프의 아파트 만찬에서 포도주에 전혀 손대지 않았었다.

일단 제안은 보류였고, 3일간 울프와 협상 끝에 그녀는 받아들였다.

메이어가 시트린으로부터 음성 메시지를 받은 다음 날 아침, 레빈슨은 자신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음을 모르고 있었다. 다시금 그는 이사진에게 야후 계획을 선보였고, 이번에는 세부사항을 그의 경영팀이 채워줬다.

그는 그 날 아침에도 자신이 당연히 정식 CEO가 되리라 확신한 채였다. 그러나 이번 회의 중간에 롭은 화장실 간다고 나갔고, 울프는 윌슨과 같이 헤크먼기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하고 있다는 협상의 세부 사항에 대해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레빈슨은 주말 동안 선밸리에서 열린 Allen & Co.의 컨퍼런스에 참여했고, 자신이 졌음을 확신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졌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일요일, 레빈슨은 이사진이 매리사 메이어도 면접 봤음을 알아냈다.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게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레빈슨은 출근했다. 야후는 그 주 2/사 분기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고, CFO인 팀 모스의 팀과 함께 분석가들과의 컨퍼런스콜을 준비하고 있었다. 레빈슨은 계속 자신을 위해 작성하지 말고 CFO를 위해 작성하라, 포괄적이어야 한다며 팀에게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레빈슨은 사무실로 돌아와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이 자리를 원했고 싸웠으며, 잘 해냈었다.


Fred Amoroso broke the bad news to Levinsohn.

마침내 프레드 아모로소가 레빈슨 사무실로 들어와서 최후의 뉴스를 알렸다.

뉴욕으로 돌아가자. British Airways 비행기를 타서 막 런던으로 향하려던 마이클 바렛도 다른 야후 간부들과 컨퍼런스콜에 참여했었고, 아모로소가 소식을 전했다.

아모로소의 말이다. “우리는 로스(레빈슨)를 사랑하고 감사해 합니다. 계속 있어 주기 원해요. 매리사와 같은 인물을 찾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나타나면 다들 놀라실 겁니다.”

“비록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로스는 훌륭히 일을 해냈습니다. 메이어는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능력과 다른 수준의 관점을 조직에 불어 넣어줄 겁니다.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2012년 7월 17일 화요일, 데이비드 파일로(David Filo)는 캘리포니아 서니베일의 야후 본부 앞에서 대기중이었다. 그는 흥분돼 있었다.

파일로는 야후의 조용하고 겸손한 엔지니어였다. 사무실에만 있는 그는 야후의 공동 창업자이기도 했다.


Yahoo CEO Marissa Mayer and co-founder David Filo.

2012년, 파일로는 야후 주식을 여전히 6% 갖고 있었다. 그는 개인 주주로서는 최대였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보다 돈을 더 가진 사람이 지구상에 959명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일로가 야후 문 앞에서 기다리던 이유는 매리사 메이어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발 밑에 길다란 자주색 카펫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야후의 영웅이 오고 있다. 그러나 거대한 도전이 그녀 앞에 드리워 있기도 했다.

야후 웹사이트 방문객은 해가 갈수록 줄고 있었고 야후의 모바일 앱은 거의 무시받고 있었다.

그동안 야후에서 제일 능력 있는 중역과 엔지니어들은 야후를 떠나 페이스북과 구글과 같은 더 민첩한 경쟁사로 이직하고 있었다. 야후에 남아 있는 이들은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거나 집에서 로그인했었다. 메이어는 야후 문화를 고쳐야 했다.

메이어는 또한 임신 7개월 되던 때에 사무실로 들어가야 했었다. 그녀의 새 동료들은 그녀가 과연 나타날지, 그녀가 과연 아이와 거대한 임무를 어떻게 관리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물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한 열정적인 직원은 메이어의 얼굴을 2008년 버락 오바마의 선거운동용 포스터 스타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 포스터에는 1/3 쯤 하단에 대문자로 “HOPE”라 쓰여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 메이어의 첫 번째 임무는 그녀의 도착을 반기지 않은 직원들과의 만남이었다. 다름 아닌 야후의 수석 간부진이었다. 다수는 로스 레빈슨 덕택에 올라간 이들이기도 했다.

관대한 연봉 패키지와 함께 아모로소가 개인적인 간청을 했지만 레빈슨은 메이어의 COO로 남지 않았다. 5월 그가 임시 CEO를 맡았을 때 이후로 그는 이사진에게, 자신이 정식 CEO에 적합하지 않다 판단될 경우 다른 곳의 CEO가 되겠다 미리 경고해둔 적이 있었다.

레빈슨이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계기가 없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역시 메이어와의 첫 번째 회의에서 부서졌다.

그녀가 정식 CEO가 되리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메이어가 만나고 싶다고 하자 다시금 서니베일로 날라 왔지만 그가 제때 도착했을 때, 메이어의 비서는 메이어가 좀 늦겠다고 말했다.

레빈슨은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사무실이 방 세 개 옆에 있어요. 거기 있겠소.”

갑자기 우려가 된 비서는 메이어 방에서 기다리라 말했다. 그녀는 메이어가 뭘 하건 간에 그가 바로 옆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랬다. 레빈슨은 사양하고 걸어 나갔다. 그리고 곧, 그는 빌딩 자체를 나가버렸다.

레빈슨은 자기가 있어 봤자 득이 없다고 판단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기 때문이다. 야후가 자기 사람들과 메이어 사람들로 나뉘게 될 테고, “미디어” 대 “제품”의 전투가 이어질 것이었다. 아주 더러운 전투가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카펫트를 깔고 그 위로 야후의 수석 중역들이 메이어의 새 사무실로 들어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 방은 며칠 전만 하더라도 프레드 아모로소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많은 이들이 메이어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컨퍼런스 무대나 텔레비전에서 보던 화려한 프로필의 여성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카리스마와 따뜻함을 두루 갖춘 인물로서 말이다.

물론 메이어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은 하나씩 들어와서 메이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질문을 시작했다. “교육은 어디에서 받았나요?” “어디서 왔나요?” “여기서 무엇을 하나요?” 등이었다.

간부들이 답하자 메이어는 종이 위에 노트했다. 종이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하는 노트였다. 소개식을 했던 한 간부의 말이다.

“마치 교장실에 불려가서 조사 받는 느낌이었어요. 아마도 ‘뭘 할 것이냐? 어떤 느낌이냐? 로스에게 미안하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며 계속 잡아 두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남지 않을 테고, 어떠한 영향도 당신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기대했겠죠.”

“동정이라든가 힘찬 포옹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하겠나, 말겠나?’와 같은 질문도 없었어요. ‘우리와 같이 한다고 보니까, 다른 걸 알려달라.’였습니다.”

“짧은 대화나 인간의 감정을 나눌 시간은 없었어요. 그냥 붐, 붐, 붐이었습니다.”

“대부분은 회의실을 나가면서, ‘젠장’이라 말했어요.”

한 야후 간부는 자신의 보스와 메이어 사이에서의 소개식에 참가했었다. 그의 보스는 메이어에게, 혹이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 만나 보겠냐 물었다. 메이어는 그들을 보더니 답했다.

“아니오.”

사실은, 이 첫 번째 회의에서 야후의 간부진 앞에 앉은 인물은 그들이 언론에서 봤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했던 매리사 메이어가 아니었다. 그녀의 스탠퍼드 동창, 엘먼이 기억하고 있던 심야 학습 시간 때의 매리사 메이어였다.

거의 20년도 더 전에 밤을 새기 일쑤였던 메이어는 사람 사귀려고 야후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한 아침 회의 때 메이어는 야후가 실패하고 있으며, 앞으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 말했다. 그녀는 제품 관련 간부진에게, 야후가 혁신과 능력에 뒤쳐져 있으며 문화도 엉망진창(broken)이라 말했다. 메이어는 회사를 구하기 위해 왔으며, 구하기 위해 엄청난 일을 해야 했다. 일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메이어와 만난 간부들 중에는 그녀와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낸 이들이 있었다. 그녀의 수줍어함을 “오만함”으로 오해했던 스탠퍼드 동창들처럼, 새로이 알게 된 야후 동료들은 메이어의 업무적인 태도가 “모욕적”이라 여기기도 했다.

당시 야후에서 제품을 만들던 이들에게 있어서 회의는 훨씬 더 강렬했다. 디자이너이건, 수석 제품관리자이건 메이어는 질문 세례로 그들을 괴롭혔다.

“어떻게 연구했나요? 검색 방법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지원했나요?”

메이어의 질문공세를 겪은 한 직원의 말이다. “격렬함 때문에 정말 많은 이들이 무서워 했습니다.”


Jim Heckman’s and Marissa Mayer’s personalities clashed.

처음, 야후에서 메이어가 했던 회의 중 가장 중요했던 회의는 레빈슨의 오른팔, 짐 헤크먼과의 회의였다. 메이어는 헤크먼이 야후 경쟁사들과 협상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협상을 끝낼지 말지, 혹은 모두 풀어버릴지를 결정해야 했다. 보다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메이어는 헤크먼과 레빈슨이 추진하고 있던 방향을 이해해야 했고, 그 방향을 그대로 나아갈지, 아니면 멈출지 판단을 내려야 했다.

경영학의 역사에서 봐도 개성과 스타일, 추구하는 목표가 메이어와 헤크먼 만큼 충돌하는 사례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메이어는 사진의 픽셀에 열정적이었고, 수줍어 했으며, 신중하면서도 과감하다. 단 무모하지는 않았다. 메이어는 사람들에 대해 이상적이었고, 유명 디자이너를 만나되 그의 드레스를 얌전하게 입는 데에 6만 달러를 썼다.

짐 헤크먼은 화제를 만들어낸다. 사팔눈에 활기찬 그는 계약을 맺는 인물이다. 스스럼 없이 이름을 부르고 코메디언을 인용하며, 인원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핵심에 신경 쓰기 때문이다. 한 번은 프랑스 칸느에서 요트 선상 파티를 야후가 연 적이 있었다. 헤크먼은 그날 상반신을 벗기로 한 여자 친구를 데려 오는 바람에 요트 곳곳에서 함성이 들렸다.

메이어가 야후에 오자마자 헤크먼은 메이어와 만났다. 그는 메이어에게 그동안 레빈슨과 자신이 작업해 오고 있던 계획을 보여줬다. 구현만 된다면 야후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을 계획이었다.

야후는 광고를 팔아서 돈을 번다. 헤크먼과 레빈슨은 야후가 너무 많은 돈을 썼으며, 광고 기술을 발명하려고 시간을 너무 많이 쏟는 나머지, 광고료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봤다. 그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AppNexus와 같은 기업들이 광고 기술에 있어서 야후를 앞서 있으며, 야후는 차라리 그들 중 한 곳과 파트너를 맺고 광고 기술을 작업하는 직원들을 해고하는 편이 나았다.

헤크먼은 메이어에게 자신이 파트너 광고 기술이 곧바로 야후의 광고율을 올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광고 기술에 종사하는 직원들을 해고할 경우 야후는 거기서 벌충한 자금으로 헐리우드 제작사들로부터 고품질의 영상 콘텐트를 살 수 있었다. 그는 야후의 콘텐트 질이 더 높아질 경우 광고주들이 기꺼이 광고비를 더 높게 내려 하리라 주장했다. 천 번 노출당 $2가 단번에 $20로 상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헤크먼의 비전에 따르면 Yahoo.com은 기술 제품 기업보다는 거대한 시청자 규모를 지닌 유선방송국에 더 가까웠다.


Steve Ballmer was ready to give MSN.com to Yahoo.

헤크먼은 자신이 이미 구글의 광고 기술을 사용하기로 구글 중역, 카스트로(Henrique De Castro)와 협상을 해 놓았으며, 야후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에도 같은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잉이 실제로 비행기 엔진을 만들다기 보다는 GE와 롤스로이스, 프랫-휘트니가 보잉 비행기용 엔진을 만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그는 메이어에게 자신이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와도 협상을 했으며, 야후가 전체 검색 사업 특허를 마이크로소프트의 온라인 미디어 사이트인 MSN.com과 교환하고, 장기적으로 현금 확보를 보장받는 내용이라 설명했다.

헤크먼은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면 야후의 정직원 수는 4천 명으로 충분하며 현재의 1만 5천 명과 계약직 직원 수 천 명에 비해 훨씬 적다고 언급하면서, 메이어가 자신의 계약을 허락할 경우 야후의 EBITDA (이자,세금,감가상각비 이전 기업이익, Earnings Before Interest, Taxes,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가 50% 상승하리라 말했다.

메이어는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계속 노트를 해 놓았다. 그리고 24시간 이내에, 메이어는 헤크먼에게 그의 계약 모두를 취소할 것이며, 야후에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없으리라 통보했다. 헤크먼은 스페인의 Ibiza로 30일 간의 휴가 여행을 떠났다.

메이어는 이제 자기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야후에 온 첫 수 개월 동안 영입한 가장 큰 인물은 헤크먼이 협상하고 있었던 구글 중역, 카스트로였다.

메이어는 카스트로를 야후의 COO로 임명하고 그에게 4년 동안 6,20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 (여기에 매년 있는 주식 증여는 포함이 안 돼 있다.)

로스 레빈슨이 원래 야후의 광고 영업을 맡기기 위해 구글로부터 영업했던 바렛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바렛은 레빈슨이 고용한 인물이었지만, 메이어의 야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바렛은 메이어가 자신을 대체할 인물을 영입하려 알아보는 중이라는 루머를 들었지만 그녀에게 직접 그 사실을 물었을 때, 메이어는 누구도 그의 상관을 알아보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특히 카스트로는 아니라 답했었다. 심지어 그녀는 바렛이 야후의 COO가 될 수도 있으리라 힌트를 줬다.

그렇지만 바렛은 카스트로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AllThingsD.com에서 보고 말았다.

상처를 받았지만 신중했던 그는 메이어의 사무실로 전화해서 카스트로 영입을 축하했고 자신의 퇴사를 논의하기 원했다. 전화는 메이어의 비서가 일단 받았다. 비서는 매리사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며, 전화를 당연히 받고 싶어하리라 확신한다고 전했다. 전화를 바렛 씨에게 해달라고 청할까요?

바렛은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렛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을 때 메이어는 바렛에게 전화했다.

전화기를 들자, 그는 메이어가 자신을 속였음을 사과하리라 기대했었지만, 메이어가 했던 말은, “전화했나요?”가 전부였다.

왜 전화 했었는지 모르는 척 하건, 실제로 이유를 몰랐건 바렛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예, 카스트로가 들어와서 축하하려 했을 뿐이에요. 정말 잘 하셨습니다.”

메이어가 답했다. “그에게 접근중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어요. 기분 나뻐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전혀요.”

그 이후로 바렛과 메이어는 한 번도 대화를 하지 않았으며, 바렛은 수 백만 달러 어치의 퇴직금을 받고 야후를 떠났다.


Henrique De Castro’s nickname is “the most interesting man in the world,” after the Dos Equis spokesman.

디 카스트로(De Castro)는 구글 광고 부문에서 상당히 분명한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모두들 그가 날카롭고 효율적이라 보지만, 악센트가 무겁고, 거만하다는 평가도 많이 받으며, 경구 인용하기를 즐겨 한다. 그의 별명은 맥주 브랜드인 Dos Equis에 나오는 말을 딴, “세상에서 제일 흥미로운 사나이(the most interesting man in the world)”이다.

카스트로 다음으로 영입한 거물로는 오랜 기간 자산 투자자였던 재클린 리세스(Jacqueline Reses)이 있다. 중요하기도 하지만 탈도 많았다. 인사에 전혀 경험이 없는 리세스를 야후의 인사 책임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메이어는 야후 직원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계획으로 실패한 신생 기업들을 푼돈으로 대량 인수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리세스를 영입했다.

메이어는 리세스가 그런 거래에 있어 전문가이리라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 메이어가 야후에 들어간지 1년만에 야후는 20개 이상의 기업을 인수했다.


Jackie Reses is Mayer’s executive bagman.

메이어는 “걸걸”하고 “사무적”인 리세스에게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사형집행인이었다. 2012년 12월, 리세스는 뉴욕지부의 간부인 캇츠(Michael Katz)에게 전화하여 Dos Caminos라는 멕시코 식당에서 한 잔 하자고 요청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캇츠는 하누카(유대교 축제) 이튿날 밤이어서, 그는 리세스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그런 시간에 전화를 했으랴 싶었다. 리세스는 캇츠와 한 잔 하면서 그를 해고했다. 그런데 캇츠가 수 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기 겨우 수 주일 전이었다(그래서 캇츠는 고소까지 했다).

메이어는 레빈슨의 마케팅 책임자였던 몰리 스필먼(Mollie Spillman)도 8월, 스필먼이 휴가중일 때 교체했다. 새로운 책임자는 쾌활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빗(Kathy Savitt)으로서, 10대를 위한 대형 소매점인 American Eagle Outfitters의 마케팅 책임자로 있다가 2009년 기업을 하나 세우기도 했었다.

Alibaba의 주식을 Alibaba에 되판 후, 야후의 현금 보유고는 거의 80억 달러가 됐다. 바로 그 때 CFO인 모스(Tim Morse)도 2012년 9월 말에 회사를 떠났다. 메이어는 골드먼(Ken Goldman)으로 CFO를 교체했다.

첫 해 동안 메이어가 계속 고용했던 레빈슨 사람들도 있었다. 미디어 책임자인 로즌(Mickie Rosen)은 2013년 7월 말까지 야후에 있었다.

In the middle of all this, a baby

2012년 9월 30일, 메이어는 아들을 낳았다. 메이어와 보그 부부는 아들을 한동안 “BBBB”라 불렀다. “Big Baby Boy Bogue”라는 의미였다. 결국 아이의 이름은 매컬리스터(Macallister)로 정해졌다.

메이어의 임신은 언론과 전세계 여자들, 그리고 야후 직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모두들 그녀가 수 십억 달러 어치의 주식 회사 운영과 육아를 어떻게 병행할지 궁금해 했다.

하지만 메이어의 육아 부문은 쉬워 보였다.

메이어의 출산 휴가는 딱 2주일 뿐이었다.

출산 두 달 후, 메이어는 직장 여성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 쪽이 모두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습니다.”

메이어가 말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엄청난 재산과 야후에서의 권력 덕분에 메이어는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집에서 그녀는 24시간 붙어 있는 보조가 있으며, 회사에서도 그녀는 사무실 벽 한 쪽을 헐어서 아기방을 따로 만들었다. 이 방 안에 매컬리스터와 유모를 둬서 매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이 때문에 분노한 여자들이 매우 많았다. The Huffington Post의 벨킨(Lisa Belkin)은 메이어에게 공개 서한을 올렸다. “친애하는 매리사 메이어 씨. ‘아이’와 ‘쉽다’를 같은 문장에 넣으면, 우리가 대단히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가 되실 겁니다.”

2013년 봄, 메이어가 재택 근무를 금지했을 때 많은 여자들이 메이어에게 이 문제를 문의했다. 재택 근무는 육아와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메이어가 어째서 재택 근무에 반대한단 말일까?

메이어는 의도치 않은 표현이었다고 답했다. 야후 사무실 안에 사람들이 더 오기를 바랬을 뿐이라면서 말이다. 여자들의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해서는 이런 답변도 했다.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였다.

Mayer goes missing

2012년 가을 중순, 야후 안에 있었던 메이어에 대한 동지애와 열광이 부풀어오고 있던 때다. 메이어는 야후에 들어오자마자 기업 문화 개혁을 차례로 일으킨다.

그녀는 구글 초창기의 고-에너지, 고-생산성의 문화를 다시금 만들고 싶었다. 프로그래머로서 주당 100시간 일하는 편이 행복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녀는 음식을 무료로 하고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파티션을 없애고, 낮은 직급 직원들과 이메일을 교환했으며, 블랙베리를 금지 시키고 모든 직원들에게 최고의 스마트폰을 나눠줬다. 그녀는 직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안할 포럼을 개설했다. 오전 10시까지, 그리고 오후 4시부터는 비어 있던 주차장이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채워지기 시작했다.

메이어는 금요일이면 “FYI”라 부르는, 모든 직원이 초대 받는 회의를 개최했다. 그녀는 그녀의 야후 계획과 금주의 “윈(wins)”을 알리면서 질문도 답변했다.

메이어는 황홀했다. 친숙한 분위기였다. 마치 스탠퍼드 시절로 돌아가 바로 지난 해에 배웠던 것을 동료 학부생들에게 가르쳤던 순간 같았다. 금요 회의에 참가했던 한 직원의 말이다.

“금요 회의에 들어가면, 마치 Berkshire Hathaway(투자회사)의 연례 발표회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녀가 무대를 열면 우리가 무대 위에 서서 청중을 바라보죠. 눈 속에서 황홀감을 볼 수 있습니다. 홀딱 반한 10대들 같아요. 믿을 수가 없었죠. 메이어는 신격화 됐습니다. 첫 50줄은 엔지니어링 팀으로 채워졌고 그들이 그녀를 환호했어요. 에너지가 넘쳤고 열광과 자부심이 새로워졌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몇 주일이 채 안 지났지만 야후 직원들의 사기와 생산성은 전에 없이 높아졌다. 다만 메이어의 보좌 간부진으로부터 심각한 불만이 딱 한가지 나왔다. 필요할 때 안 계시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항상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메이어는 보좌진 모두에게 어디에 있건 전화를 받으라 요구했다. 즉 오후 6시의 뉴욕에 있건, 한밤중의 유럽에 있건 간에 전화가 오면 받아야 했다. 그런데 메이어는 한 45분 늦게 등장할 때도 있어서, 유럽의 야후 간부들은 오전 3시까지 전화를 못 끊는 경우도 꽤 있었다.

메이어의 전직 구글 동료들에 따르면 시간에 늦는 메이어의 버릇은 구글에 있던 13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Even executives hired by Mayer, like CMO Kathy Savitt, felt ignored by her early on.

“에릭과 래리, 세르게이도 항상 늦습니다. 그래서 회사 내 모두들 늦게 만들었죠. 계속 대기하게 하면 다들 늦어질 수밖에 없어요. 다음 회의도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나면 모든 직원들이 다 늦어지는 것이죠. 조직 내에 늦는 문화가 다 퍼졌습니다. 매리사 메이어가 언제나 늦었냐고요? 예, 맞습니다. 하지만 구글 자체에 늦는 문화가 만연해 있었죠.”

당연히 메이어의 지각 습관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2012년 가을 초, 메이어의 보좌진은 이내 익숙해졌다. 사실 그들은 메이어가 늦게 회의에 들어오는 것을 더 반겼다. 적어도 완전히 회의를 날려 버리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야후에서의 첫 1년 동안 메이어에게 직접 보고하는 직원은 약 25명 정도 됐다. 이론적으로 그녀는 매주 있는 정기 회의 때 그들 모두에게서 보고를 받아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언질 없이 수 주일을 그냥 보낼 때도 있었다. 워낙 메이어가 바빠서였다.

한 때 25명의 보좌진은 메이어가 자기들 중에서 누구누구를 골라내지 않냐 여겼다. 메이어가 들어오기 전부터 야후에 있던 직원들은 그녀가 자신을 곧 해고하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리세스와 사빗 등 메이어가 들어올 때 고용했던 사람들조차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고용해놓고 왜 무시하실까?

하지만 월요일 오후 3시 이후, 기나긴 대기 시간동안 있었던 한 대화가 모든 비밀을 풀어줬다. 간부들끼리 잡담을 좀 한 다음, 한 간부가 “혹시 면담을 또 취소한 적 있나요?”라 물었다. 그러다 제3의 다른 간부가 끼어들었다. “앗, 당신도 당하셨군요?”

방 안의 모두가 메이어로부터 면담 취소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 때 있었던 한 간부의 말이다.

“모두들 자기만 취소 당한 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 다들 깨달았죠.”

일정이 잡혀 있던 면담을 취소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런 것이라도 없으면 메이어를 보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메이어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 면담 일정 잡기입니다. 그녀를 우연히 만나거나, 회의에 들어갔더니 있더라와 같은 기회는 많지 않고요. 그런데 그녀 일정에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입니다.”

메이어로부터 연이어 취소를 당한 한 인물에 따르면 이러하다. “당신과 같지 않을 수 있겠지만, 사업 중 상당 부분을 제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 천 명이 제게 보고하죠. 설명 없이 제가 회의를 놓칠 가능성은 없어요.”

“우선 제가 그런 회의를 놓치지 않죠. 물론 사고가 나서 1년에 한 번 정도 놓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면 전화를 들고 사과하고 미안해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정을 짜서 알리겠다고 하죠. 5분 이상 기다리지 않게 합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그 분들도 하니까요. 그들도 다 인간이에요.”

보좌진 회의 동안 메이어는 특히 매출이나 광고 기술, 배급과 관련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았다. 1주일당 계약 3건 정도만 하고, 항상 제품과 관련하여 얘기하기를 더 선호함이 빠르게 드러났다. 단 리세스가 야후로 유능한 관리자를 불러올 인수-고용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면, 메이어는 그 건을 최우선으로 돌린다. 새로운 날씨 앱에 대해 애플과의 파트너십을 의논해야 한다면, 그 또한 꼭 논의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메이어가 늦고 회의를 그냥 지나쳐 보내며 회의 중에도 제품 논의에 중점을 두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야후에 들어오기 전, 메이어는 야후의 많은 문제점이 결국 하나라고 결정 내렸다. PR에서 마케팅, 제품 등 모두가 다 오류 투성이라는 문제였다. 첫 수 개월 동안에는 즉각 오류를 멈추는 것이 메이어의 계획이었다.

정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구멍이 난 댐을 메꾸는 일이었고, 메이어는 자신의 손가락 발가락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 했다.

“Who is this woman and what is she actually saying?”

메이어가 야후에 들어온 지 1주일 후, 한 야후 직원이 보라색으로 만든 매리사 메이어의 HOPE 포스터를 야후의 복도에 붙여 놓은 사진을 찍어서 워크(Hunter Walk)라는 구글 직원에게 보냈다. 워크는 이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고, 그것만으로도 뉴스가 되었다.

구글에서 메이어의 부하 중 하나였던 스탠튼(Katie Jacobs Stanton)은 당시 트위터의 부사장이었고 워크의 트윗을 봤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공공 계정에서 워크에게 답변을 올렸다. “그거 UI 검토 후에 올린 것이었기를 바랍니다.

이 농담은 메이어가 검색 제품 조직에서 제거되기 전, 그러니까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소비자가 보게 되는 구글의 웹 제품 모두에 대해 메이어가 워낙 사용자 인터페이스 검토를 강조해서 했던 농담이었다. 스탠튼은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보고 드렸던 메이어라면, 곧 야후 전체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쉬두르리라고 봤다. 특히 일반인이 볼 야후의 모든 것을 메이어는 강력히 통제하려 할 것이었다.

스탠튼의 예측은 정확했다.

야후를 통제하게 되면서 메이어는 일반인이 보게 되는 야후의 모든 것을 조사하고 수량화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고, 그대로 통제에 나섰다. 여기에는 야후의 모든 부문, 대외 홍보도 포함됐다. 가을 내내 매주마다 야후의 PR 부서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기자의 이름과 사업 목표를 붙인 커다란 스프레드시트를 완성해야 했다. 이 스프레드시트는 야후 PR 책임자인 에스피리투(Anne Espiritu)에게 보고됐고, 에스피리투는 다시 메이어에게 보고를 올렸다. 메이어는 결재를 내리거나 모든 통화나 이메일을 거절하고 다시 밑으로 돌려 보내거나 했다.

야후의 홍보 직원들이 이런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경우 에스피리투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었다.

야후의 제일 거대하고 중요한 팀인 야후 제품 제조 및 개발과 디자인, 업데이트를 다루는 수 백 명의 직원들만큼 자율적인 그룹은 없을 것이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매리사 메이어는 블로그 글을 통해 새로운 버전의 웹, 윈도 8, 아이폰, 안드로이드용 야후 메일을 발표한다. 메이어의 글이다.

“이메일은 궁극적인 습관입니다. 아침에 제일 먼저 확인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것이 이메일입니다.”

이 말이 웹에서 히트를 치기 3개월 전, 메이어와 디자이너, 제품 관리자, 엔지니어 30명이 야후의 커다랗고 전통적인 회의실 내 큰 테이블 주위에 둘러 앉았다. 메이어는 빠르게 얘기했다. 가까이에 앉은 두 명이 그녀의 말을 미친듯 빠르게 적어서 구글 Docs에 노트를 해 놓으려 노력중이었다.

이 그룹은 한 달 동안 1주일에 세 번을 만났고, 회의실을 아예 디자인 스튜디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방 한 쪽 벽에 창이 드리워져 있고 다른 벽에는 천장에 달린 프로젝터가 화면을 뿌렸다. 프로젝터 영상 사이에 야후의 홈페이지와 새로운 야후 이메일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적혀 있는 20~30개의 거대한 폼코어(foam core)가 세워져 있었다.

탁자 주위에 앉은 30명에게는 지난 한 달 간 메이어와의 회의가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동안 야후에서 CEO는 범접할 수 없는 인물로서 중간 관리자급 이상을 만나서 디자인이나 기술, 제품 등의 큰 전략을 세우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메이어는 그런 과정을 다 생략했다.

한 목격자의 증언이다. “그녀는 마치 ‘그래요, 그래, 그래. 할 것이에요. 우선은 실제로 돌아가는 일을 먼저 합시다.’식이었어요.”

직원들 누구도 적응해본 바 없었던 철저한 검토였다.

메이어는 신제품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 “게걸스러울 정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으며, 메이어는 “심오한 디테일”을 보여줬다. 그녀는 마침내 서기를 두 명 곁에 두고 나중에 메이어의 모든 아이디어와 결정 사항을 “공유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했다. 서기 중 한 명은 생각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이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방 안의 30명은 메이어가 하는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속도에 대한 불만도 커졌지만 기여하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 메이어는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지 알았으며, 신뢰받는 사람들은 신뢰감을 더 키우기 위해 더 많은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곧, 무서웠던 회의가 드디어는 친숙하고 재미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농담이 막 나왔다. 한 참여자의 말이다.

“따뜻해졌죠. 그녀와 강도 높게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나니까, 그녀는 부드러워졌고, 상호 대화도 더 빈번해졌습니다. 그녀를 보면, 미소를 짓고 있더군요!”

그 순간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순간이었다.

메이어는 Philosophy 160A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늦게까지 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추진했다. 그녀는 3천 명의 스탠퍼드 학부생들을 가르쳤다. 25년 전의 춤을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수 억 명과 한 번에 공감을 하기 위해 그녀는 구글에서 배운 바와 마찬가지로 데이터를 사용했다.

한 참여자의 말이다. “그녀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모든 가능성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자기 경험과 원칙만 얘기해도 말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디에서 오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연결도 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도왔습니다.”

메이어의 강렬함은 전염병과 같았다. 11월이 되자 야후 메일 팀은 밤낮, 주말 가릴 것 없이 12월 초의 시한에 맞춰서 질주했다. 메이어와 메일팀 책임자인 샤시 세스에게는 장려할 만한 일이었다.

마침내 메일 팀은 11월 말에 작업을 끝냈다. 결과에 대해 자랑스러웠고, 그럴만했다. 야후가 그렇게 빠르게 메일 버전을 만들어서 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야후가 메일을 손 봤을 때는 제품 만들기에만 18개월이 걸렸고 실제로 가동하는 데에는 6개월이 더 필요했었다.

하지만 그 때 야후는 제품 만들기에 있어서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CEO로서 매리사 메이어가 있을 때의 제품 만들기다.

야후 메일이 새로 나오기 하루 전, 메이어는 CMO인 캐시 사빗과 샤시 세스, 그리고 전체 제품 및 엔지니어링 리더십 팀을 소환했다. 전부 10명 쯤 모였으며, 이들은 수 개월 전, 로스 레빈슨이 야후를 위한 대안을, 그에게 흥미 없는 이사진에게 들려줬던 바로 그 회의실인 Phish Food실에 들어왔다.

모두가 앉자, 메이어는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수개월간 새로운 야후 메일의 색상은 파란색과 회색으로 정해져 있었다. 사용자가 야후 메일을 하루 종일 휴대폰에서도 보기 때문에 제일 대조적인 색상을 고른 것이었다.

메이어는 색상을 완전히 바꾸고 싶어했다. 파란색과 회색이 아니라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말이다.

곧바로 세스의 몸이 반응했다. 그는 기가 꺾인 듯 했으며, 팀에게 가서 새 소식을 전달해야 했다.

야후 메일과 같은 제품에서의 색상 전환은 쉽게 들리지만, 실상은 쉽지가 않다. 메이어의 결정은 곧 불행한 그룹이 손수 가서 말 그대로 수 천 곳의 색상을 일일이 바꿔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두 시한에 맞춰서 말이다.

세스의 팀은 결국 색상을 바꿔냈지만, 메이어의 결정은 영 좋지 않은 피해까지 일으켰다. 야후 메일 팀의 수석 디자이너는 회사를 그만 두고 구글로, 야후 메일 제품 관리자는 디즈니로, 수석 엔지니어는 아예 회사를 따로 차렸다. 세스 자신도 메일을 새로 선보인지 1개월 후, 야후를 2013년 1월에 떠났다.

이 사건에 좌절한 직원에 따르면, 그는 야후 메일 덕분에 스스로 이룬 성취를 자랑스러워 하기 바랬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도 앞으로 몇 년은 회사에 더 있어야 했다. 그의 말이다.

“완전히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죠.”

하지만 다른 관측도 있었다.

메이어는 완성이 안 됐다 여긴 제품의 최종 결재를 거부했다는 관측이다. 제품의 색상이 피상적일 수 있겠지만 메이어는 데이터에 집착하는 인물이었기에 색상은 피상적인 뭔가가 아니었다. 야후 규모의 회사에서 색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경우 0.01%까지 방문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만 해도 수 백만 달러가 오간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미 메이어는 사람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내몰아서 최대한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낸 셈이다. 즉, 그녀는 야후의 새 시대를 열었다. 야후 메일을 도왔던 한 인물의 말이다.

“고생한 덕에 다음 프로젝트는 쉬워졌습니다. 야후다움이 뭔지 이제 편안해졌습니다.”


Mayer put Adam Cahan in charge of a new group called “Mobile and Emerging Products.”

Yahoo’s mobile problem

2012년, 메이어가 야후에 왔을 때 야후의 모바일 트래픽은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술 기업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야후 모바일 앱 또한 유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메이어가 야후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뭣보다도 소비자들이 매일 같이 사용할 모바일 앱 개발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앱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메이어는 조사를 벌였는데, 그 결과때문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 걸기와 문자, 지도처럼 휴대폰으로 매일같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았다. 이메일과 날씨 확인, 뉴스, 주식, 스포츠 경기, 연예계 뉴스, 사진 공유, 그룹별 커뮤니케이션, 질문 던지기 등.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야후 웹으로 향한다는 사실 때문에 메이어는 웃었다. 야후의 제일 큰 제품은 야후 메일과 야후 뉴스, 야후 파이낸스, 야후 스포츠 등이었다.

2013년 5월 뉴욕에서 그녀가 한 연설에 따르면 이렇다. “휴대폰에서 원하는 기능과 콘텐트가 야후에 있습니다. 이들을 앱과 모바일 앱에 넣어서 실제로 휴대폰에서 소비가 가능하도록 할 필요가 있어요.”

야후에 온지 1년 동안 메이어는 모바일 면에서의 사업 확장으로 크게 두 가지를 이뤘다.

첫째는 “모바일 및 신흥 제품(Mobile and Emerging Products)” 그룹 책임자로 새로이 애덤 칸(Adam Cahan)의 임명이었다. 칸은 야후가 모바일 신생 기업인 IntoNow를 2011년, 2천만 달러에 인수했을 때 야후에 들어 왔었다.

야후에게는 그런 그룹에 들어갈 모바일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이어는 2012년 말에서 2013년 8월까지 2억 달러를 들여 20개소 이상의 신생 기업을 인수했다. 거의 매번 야후는 신생 기업의 제품을 폐쇄하고, 그 엔지니어링과 제품 개발 인력을 2년 내지 4년 짜리 계약으로 칸의 팀에 흡수 시켰다.

둘째는 모바일에서 야후의 지위를 개선한 것이다. 그녀 전체 커리어 상에서 최대 거래라 할 수 있을 테고, 여기에만 11억 달러가 들어갔다.

Could Mayer close the deal?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저녁, 26세의 데이비드 카프(David Karp)는 자신의 아이폰을 들여다 봤다. 페이스북 COO인 셔릴 샌버그가 그에게 음성메일을 보냈었다.


David Karp, founder and CEO of Tumblr.

메시지를 들으니, 샌버그가 한 말은 자기에게 전화 좀 해 달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말을 다 한 셈이었다.

텀블러(Tumblr)라 불리는 블로그 네트워크의 창업자인 카프는 자신의 투자 은행가인 Qatalyst Partners의 조너선 터너(Jonathan Turner)에게 샌버그로부터 메시지가 왔더라는 말을 해 줬다.

그래서 그들은 야후에게 전화를 해서 샌버그가 전화 했더라는 말을 알려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날, All Things D의 기자인 스위셔와 그녀의 동료인 피터 카프카(Peter Kafka)는 야후가 텀블러와 심각한 협상중이라 보도했다.

카프와 그의 이사진들, 은행가들은 그 보도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샌버그가 전화했다고 믿었다. 페이스북도 텀블러의 인수에 나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편 텀블러 인수를 둘러싸고 페이스북과 야후 간의 경쟁이 일어남은 특히 투자자와 은행가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터너는 뉴스 보도 때문에 계약이 틀어질까 걱정했다. 메이어는 구글 출신이었고, 구글은 언론을 동원해 흥미를 돋구려 한다 싶으면 인수 협상을 취소 시키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 두 기업들의 느린 행보 때마다 터너는 언론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When Sheryl Sandberg left a voicemail on David Karp’s phone, it threatened to blow up the deal.

텀블러 인수를 위해 원래 야후가 제시한 가격은 8억 달러였다. 하지만 결국 이 금액은 11억 달러까지 상승했고, 상당한 주의가 요구됐다. 기본적으로 협상은 끝난 상태였고 텀블러 이사진은 더 몸값을 올릴 필요는 없다고 여길 때였다.

그래도 샌버그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야후에게 알려야 했다. 두 기업은 서로 “상호 독점” 약정을 체결하여, 다른 접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야후에게 알려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단 터너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샌버그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메이어가 알게 되면, 메이어는 한층 더 인수를 하고 싶어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메이어는 뉴욕 출신인 “걸걸한” 재키 리세스가 이끄는 인수팀으로 가서 그들에게 서둘러 끝내라 명했다. 그녀는 카프와 그리도 자주 만나고 수 개월에 걸쳐 협상을 벌였던 텀블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기업 간의 인수 이야기는 카프가 메이어를 만나기 위해 서니베일로 갔던 2012년 11월에 시작됐다.

2007년에 세워진 텀블러는 당시 한 달에 2억 명의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놀라운 사이트로 성장했었다. 다만 카프는 거대해진 네트워크로 어떻게 돈을 벌지 아직 알아내지 못 한 상태였다.

그는 구글과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야후가 혹시 전략적인 투자를 텀블러에게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서부 해안을 일주했다. 그들 중 한 곳이 어쩌면 텀블러 사이트에 광고를 팔아서 수입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프와 메이어 간의 첫 번째 만남은 서로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메이어는 야후에서 자기가 뭘 하려 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한 채, 두 기업 간의 잠재적인 협력은 주제로 나오지도 않았었다.

만남 이후 카프는 자기 이사진과 은행에게, 야후의 새 CEO가 친절하기는 했지만 계약이 성사되지는 못 하리라 본다고 알렸다. 투자은행 Qatalyst의 터너는 이 소식을 자신의 상사인 전설적인 기술 은행가, 프랭크 콰트론(Frank Quattrone)에게도 알렸다.

콰트론은 닷컴 거품 시기 동안 부유해지고 강력해졌었다. 단 그는 위법 논란에 휩싸였다가 스스로 혐의를 벗어났었다. 그는 자신만만해 하는 인물이며, 특유의 수염 때문에 협상 성사를 시켜서 등을 치는 투자 은행가의 만화 주인공처럼 보였다. 그래도 그는 기술 업계 최고의 협상 해결사일지도 모른다.

콰트론은 메이어에게 텀블러에 대한 흥미를 더 줄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2013년 초, 그는 메이어와 만나서 텀블러가 얼마나 모바일에서 유명한지, 텀블러 최대 강점 중 하나를 지적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텀블러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정확하게 메이어에게 일러줬다. 콰트론은 마술 단어를 말했다. “모바일”

메이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노라 답했다.

매리사 메이어는 한 번 주제에 대해 탐구를 시작하면 피상적으로 하지 않는다. 콰트론과 만난 이후 그녀는 주말 내내 텀블러를 사용하면서 사이트를 헤집고 다니며 데이터를 측정해 봤다.

메이어는 다시 커프와 만나기로 결정한다. 단, 그녀는 텀블러에 대한 광고 계약이나 전략 투자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텀블러를 인수하기 원했다.

텀블러 인수가 이뤄지면, 작업이 좀 필요했다. 카프는 자기 회사를 매각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페이스북과 구글은 이미 인수 협상을 시도했지만 카프가 거부했었다. 심지어 세후 소득 1억 달러 이상의 제안이 들어왔는데도 그는 거절했었다. 자기 회사를 계속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She really took ownership of this, really persuaded David that she would let Tumblr stay independent.”

메이어는 자기가 직접 나서야 할 필요를 느꼈다.

2월, 메이어는 리세스와 함께 뉴욕으로 가서 어느 토요일 저녁, 카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메이어는 그 날 카프를 이겨낼 수 있었다. 텀블러는 훌륭한 제품이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놀라운 툴이라 언급하면서, 젊은이들에게는 페이스북을 이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날 저녁, 메이어는 카프에게 곧 이사진 회의를 소집하겠으며, 텀블러 인수 가능성을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그가 일요일에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카프는 다시 만나자고 했다. 일요일 저녁 후, 메이어는 기술 기업 인수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 설명하고 인수한 기업의 독립적인 운용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말해 줬다. 자기 고유의 브랜드로 그냥 남는 것이었다. 그녀는 구글 또한 유튜브로, 페이스북 또한 인스타그램으로 그렇게 했다면서 야후도 텀블러에 대해 그렇게 하겠노라 말했다.

그들은 새벽 2시까지 같이 있었다. 카프는 메이어에게 야후 간부회의 때 말할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메이어의 1/4분기 이사진 회의 동안, 메이어는 텀블러 인수 건을 거론했다. 그녀는 텀블러가 모바일에서 야후의 지위를 단번에 개선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사용자층을 한층 더 어리게 할 것이라 언급했다. 이사진은 그녀에게 인수를 추구하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말이다.

그때부터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All Things D 보도와 샌버그의 음성 메시지는 인수 협상을 가속화 시켰을 뿐이었고, 마침내 그 다음주 주말, 카프와 그의 이사진은 야후의 제안을 수락했다.

메이어와 야후에게는 승리였다.

그동안 야후는 주목 받는 신생 기업 인수를 노력했었다. 사용자들 사이에서 더 유명해지고 결국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가적인 야망이 있는 곳들은 야후의 인수 제안을 거절해 왔었다. 차라리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매각 시키는 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메이어로서는 텀블러 인수야말로 그녀가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 보일 기회였다. 교사와 같은 멘토링을 선호하는 그녀는 카프와의 관계를 만들어낸 다음에 불가능해 보였던 인수를 성공 시킬 수 있었다.

현재 사라진 텀블러 이사진에 가까운 한 정보원에 따르면, 메이어가 인수를 위해 기울인 노력때문에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인수에 CEO까지 직접 나서지는 않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었어요. 메이어가 정말 주도했습니다. 데이비드를 설득해서 텀블러의 독립성을 그녀가 보장했으니까요.”

“그녀가 데이비드 마음을 돌린 것이죠. 데이비드는 대단히 주저했어요. 우리들 만큼이나 돈에 구애 받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정말로 텀블러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야후에 매각 시키면 그대로 빨려 들어가버릴까봐 걱정을 했었죠.”

“매리사는 이제 야후가 예전의 야후가 아니며, 자기가 다르게 운영하겠노라 데이비드를 확신 시켰습니다.”


Illustration by Mike Nudelman

이제 야후 CEO 2년째로 접어든 위스콘신 Wausau 출신의 매리사 메이어는 “내 인생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라 말한다.

천성이 교사인 그녀는 20~30대 동안 강사 기술을 갖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기술 제품을 만들도록 독려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수 백만 명이 사용하는 제품들 얘기다. 단 그녀가 40대에 맞이할 도전은 다음과 같다. 마술 같은 제품을 만들어서 재무 성과를 낼 수 있는 보기 드문 완벽한 기술 CEO가 될 수 있느냐다.

일견 보면, 메이어는 첫 번째 해에 정말 믿을 수 없으리만치 잘 해냈다. 데이비드 파일로가 매리사 메이어를 위해 보라색 카페트를 깔았을 때 이후로, 야후 주가가 주당 $15.74에서 2013년 8월 현재 $28까지 뛰어 올랐기 때문이다.

단 메이어의 비전과 실적에 대한 투자자들의 확신이 이제까지 마술과 같은 주가 상승에 큰 역할을 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야후가 지분을 갖고 있는 중국의 인터넷 기업 알리바바 때문에 상승한 탓도 크다. 야후가 알리바바의 후광을 보는 측면은 두 가지가 있다.

메이어가 야후에 들어오기 수 개월 전, CEO였던 스콧 톰슨과 CFO였던 팀 모스는 알리바바가 야후 지분 76억 달러를 사도록 협상을 성사 시켰었다. 그가 여전히 CEO로 있을 때 톰슨은 그 돈으로 야후 자사주를 매입하여 주가를 올렸었다. 메이어가 들어온 이후, 메이어는 이 계획을 계속 진행 시켰다.

첫 번째. 알리바바 때문에 야후는 자사주를 매입하면서 수 십억 달러를 지출해야 했다. 따라서 주식이 줄어들자, 그만큼 수 십억 달러 어치의 수요가 늘면서 주가도 자연스럽게 상승했다.

두 번째. 알리바바는 야후 주식 가치 그 자체를 늘리면서 야후의 주가 상승을 도왔다.

알리바바는 아직 주식 공개를 하지 않았다. 야후가 여전히 알리바바의 큰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투자자들은 야후를 매개로 하여 투자를 벌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런 투자는 만기일이 있는 투자다. 계약의 일부로서 톰슨과 모스는 알리바바가 마침내 주식 시장에 상장됐을 때 더 많은 주식을 팔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리바바와의 협상으로 야후가 70억 달러의 또 다른 현금을 확보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메이어의 실적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또 있다. 그녀가 야후 CEO가 되는 데에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핵심 인사로 책임을 지닌 Third Point의 댄 롭은 2013년 7월, 갖고 있던 야후 지분 대부분을 매각했다. 같은 달, 그와 마이클 울프, 해리 윌슨은 야후 이사를 사임했다. Third Point의 야후 내 지분이 2% 밑으로 줄어들 때의 요구사항에 따른 사임이었다.

Third Point는 야후의 주요 주주로 남아 있지만, 롭의 주식 매각은 야후가 2012년 때보다 현재 그 성장 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강력한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메이어가 그토록 짧은 기간 내에 야후를 크게 개선 시켜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수치로도 알 수 있다. 야후는 메이어의 새 디자인 이후, 야후 메일의 트래픽은 120%, 야후 날씨는 150%, 야후 뉴스는 55% 늘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해에 메이어는 야후 메일 트래픽을 유지 시킬 수 있었고, 심지어 야후 사이트의 트래픽을 약간 늘리기도 했었다. 사람들이 점차 휴대폰으로 메일과 뉴스를 보기 때문에 대형 웹사이트의 트래픽은 이제 줄어드는 시대이다. 2013년 8월 중순, ComScore는 야후의 웹 트래픽이 구글을 능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이트가 됐다는 보도도 했었다.

수치 이외로 봐도, 메이어는 야후 내 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한 야후 간부가 해준 말이다. “메이어가 오기 전에는 최상층부의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어가 온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려운 결정을 이뤄내고, 올바른 곳에 집중하면서 위급하다는 감각도 갖게 됐거든요. 회사의 품질 컨트롤 리더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온 덕분입니다.”

실제로 야후 제품의 품질은 메이어가 온 이래 개선을 이뤘다. 2013년 아이폰용으로 나온 야후 날씨 앱은 놀라울 정도다. 메이어의 Flickr 재디자인도 놀라운 일이었다.

맞다. 그녀의 직접적이고 사무적인 스타일 때문에 그녀와 여전히 못 어울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의 퉁명스러운 매너가 오만하거나 “모욕적”, 혹은 “자만심”이라는 반응도 종종 있다.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들도 야후가 이제는 그녀의 리더십 하에서 훨씬 더 역동적인 곳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야후에서 그녀와 자주 부딪히는 한 직원의 말이다. “매리사에게 매우 큰 공이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한 일이 싫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한 일이 싫기에, 그녀를 매정하게 평가할 수는 없죠. 그녀는 야후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줬어요. 그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녀가 오기 전 금요일, 주차장은 오전 10시 전까지, 그리고 오후 4시 이후만 되면 텅텅 빈 채였어요. 7개월간은 계속 그런 상태였죠. 그런데 매리사가 온 그 다음 주부터 주차장이 오전 8시면 다 채워지고, 오후 6시 반은 되어야 퇴근들 하더군요.”

“무료 음식과 품질에 대한 집중, 몇 가지는 폐쇄, 금요 회의 때의 개방적이고 솔직한 대처 등, 그녀가 가져온 변화 모두, 매우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줬습니다.”

“그녀가 야후에 안 왔더라면,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회사를 떴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 야후의 종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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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ote on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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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는 주로 수 십 차례의 인터뷰로 이뤄진 보도 기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메이어와 직접 자라나고, 그녀를 가르쳤거나 구글과 야후에서 그녀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분들이 직접 해 준 협력이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는 전현직 야후 직원들로서 커리어에 위험을 끼칠 수 있음을 감수하고 인터뷰를 해 줬다. 다수는 익명을 전제로 했으며, 녹음도 일부 있었다. 녹음된 부분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른 이들을 가리키기 위한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서술 형식으로 된 이 기사는 생각을 포함, 특정 사실의 정보원을 알려주지 않는다. 필자가 취재원의 생각을 보도한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란다. 바로 그 취재원으로부터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중요한 순간을 공유할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서술의 일부로서 필자의 이야기는 대화를 포함한다.

특히 제임스 스튜어트(James B. Stewart)의 책, “DisneyWar”의 말미에 나오는 “note on sources”에 감사한다. 필자 기사의 정보원을 어떻게 묘사할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그의 노트에 따르면, 스튜어트는 그가 정보원과의 대화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나온다. 완벽한 설명이어서 필자의 설명으로서 그의 설명을 인용하고자 한다.

“서술의 일부로서 대화의 흐름을 포함 시켰다. 단어 자체로서 대화는 일종의 사실이다. 필자와의 인터뷰로부터 나온 인용일 이유는 없으며, 인용으로 할 경우 직접 들은 것이 아니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특히 순간 접촉이 가능한 오늘날 세상에서, 개인적인 대화라 여기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지 놀랄 때가 자주 있다. 이 책에 보도된 대화 다수는 청중 앞에서 공개됐거나 광범위한 범위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의사록에 기록된 경우도 종종 있었다. … 스피커폰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사례도 있거나, 화자(話者)의 인식 없이 들리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측이 불가능한 인간 기억을 염두에 둘 때, 독자들은 대화가 실제 녹음이나 대본과는 다르기 일쑤라는 점을 알아 주시기 바란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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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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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thrie, Julian. “The Adventures of Marissa.” San Francisco. Feb. 8, 2008.

Guynn, Jessica. “How I Made It: Marissa Mayer, Google’s champion of innovation and design.” Los Angeles Times. Jan. 2, 2011.

Holson, Laura M. “Putting a Bolder Face on Google.” The New York Times. February 28, 2009.

Marissa Mayer’s IIT commencement address. YouTube.

Weisberg, Jacob. “Yahoo’s Marissa Mayer: Hail to the Chief.” Vogue. September 2013.

Sellers, Patricia. “New Yahoo CEO Mayer is pregnant.” Fortune. July 16, 2012.

Sellers, Patricia. “Marissa Mayer: Ready to rumble at Yahoo.” Fortune. October 11, 2012.

Stone, Brad. “Can Marissa Mayer Save Yahoo?” BloombergBusinessWeek. August 1, 2013.

Swisher, Kara. “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 Whatever: Levinsohn’s Management Moves at Yahoo (Internal Memo).” All Things D. May 17, 2012.

Swisher, Kara. “Ross Still Not the Boss (Yet): Yahoo CEO Selection Now Likely to Take Longer Than Many Expect).” All Things D. July 12, 2012.

Warner, Fara. “How Google Searches Itself.” Fast Company. June 30, 2002.

Unbylined. “From the Archives: Google’s Marissa Mayer in Vogue.” Vogu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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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knowledg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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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grateful to Jay Yarow and Alyson Shontell for reading this story and suggesting edits. Jill Klausen and Liz Wilke saved me with wonderful copy edits. Mike Nudelman contributed excellent illustrations that bring the story to life. I’m grateful to people in California, Wisconsin, and around the world who took my calls and agreed to talk.

Marissa Mayer Biography – Business Insider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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