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스티브 잡스


FEATURES: 19.12

The Revolution According to Steve Jobs

By Steven Levy November 29 | 12:30 pm | Wired April 2011


llustration: Ryan Alexander

스티브 잡스와의 첫 인터뷰 테이프를 찾지 못했다. 1983년 11월에 가졌던 인터뷰였는데 28년이 지나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43 페이지에 이르는 구술기록은 갖고 있다. (물론 당시 기술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담겨 있다. 가령 “리사 기술”을 “기술을 리스(lease)하다”로 잘못 적은 것처럼 말이다.) 그 때가 잡스와 함께 했던 첫 번째 인터뷰였고 그 뒤로도 여러번 하여 책상에 가득 쌓여 있다. 10월 5일 잡스가 사망한 뒤 그간 했던 인터뷰 자료를 뒤져봤었다. 그동안 잡스가 구축한 특유의 개성을 이제야 이해하지 싶다.

첫 번째 인터뷰는 쿠퍼티노의 한 식당에서 고기가 없는 피자를 먹으며 했었고 주제는 당시 애플이 첫 선을 준비하고 있었던 매킨토시였다. 필자는 롤링스톤(Rolling Stone)지에서 매킨토시 기사를 다뤘는데 잡스는 일단 필자가 일하던 잡지에 대한 공격부터 퍼부었다. 표지인물에 자기가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발끈한 것이었다. (매킨토시 기사가 나갔을 때의 표지인물은 폴리스(Police)였다.)

한바탕 호통을 치고 나자, 청바지와 파란 스웨터를 입고 있었던 잡스는 열정적인 매킨토시 지지자이자 인내심 깊은 매킨토시 강사로 변했다. 그는 매킨토시에 대해 거의 전염병이라도 걸린듯 낙관적이었다. “좋으십니까?” 매킨토시가 “미치도록 훌륭하다(insanely great)”라는 자신의 신념에 당연히 필자도 같이 하리라 여기고 물은 질문이었다. 1983년의 잡스는 다소 거친 인물이었다. 주의깊고 약삭 빠르게 언론을 조절하던 후의 잡스와 비교하면 특히 그 때의 잡스는 거칠었다. 그는 정말 신경썼던 연애가 “수포로 돌아갔기에” 느꼈던 우울감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왜였을까? “매킨토시라는 또다른 여인과 스트레스 때문이었죠. 매킨토시는 제 인생에서 제일 말쑥한 물건입니다. 저는 매킨토시라는 훌륭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어요. 정말 매킨토시와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요. 물론 매킨토시가 여인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요.”

만약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맥이 당시 오류가 많았던 애플 III처럼 실패할 경우 닥칠 결과가 혹시 두려운지도 물어봤다. “예.” 하지만 그 이유가 좀 달랐다. “맙소사. 두려워 한다면서 다시 한다면 도대체 그게 뭡니까?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평생 쓰기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은 많이 벌어 놓았습니다. 왜 하냐고요? 사랑하니까 합니다. 완전히 실패해리고 더 실패한다면 아예 제가 이 업계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겠죠. 시를 쓴다거나 등산이라도 한다거나, 아무튼 다른 걸 해야 할 겁니다.”

매킨토시가 당신의 커리어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겠냐고 질문하자 그는 필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제게는 커리어가 없습니다.” 자신은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것 이상의 존재라고 하는듯한 차가운 답변이었다.

당시에도 잡스는 애플이 “과학과 미학의 교차점”에 서 있노라는 말로 애플을 묘사했었다. 필자가 그의 디자인에는 선사상의 면이 있다고 주장하자 그도 인정하면서 처음 광고책자에는 하얀 칠판 앞에 사과 이미지 하나만 있었다고 말했다.

“과일, 사과 하납니다.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궁극의 세련됨이죠.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정말 단순해 보입니다. 복잡한 건 이해를 못 하거든요. 해결책이 너무 간단했는데 해결이 안 되더라, 싶으면 다시 문제를 들여다보죠. 이제 이렇게 복잡하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복잡한 해결책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중단해요. 어찌 됐건 해결은 되니까요. 하지만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면 계속 탐구하여 문제의 핵심적인 원칙을 발견해냅니다. 그 다음에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해결책을 내게 되죠. 우리가 맥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당시 28세였던 잡스는 나머지 인생을 좌우할 철학을 그 때 이미 깨치고 있었다. 60년대 세대였던 잡스는 필자에게 애플에 대한 자신의 이상주의적인 비전을 말해줬다. 영혼을 잃지 않는 100억 달러 어치의 회사다. 초창기 시절, 애플 엔지니어들 또한 필자에게 잡스의 모토는 “해군에 입대하느니 해적이 되는 편이 낫다”라 말해줬었다.

해적이 낫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그에게 물어봤다. “사실 어느 때건 간에 훌륭한 일을 하지는 않죠. 그러리라 기대하지도 않고 시도를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일을 해라가 여기 문화야’라는 말은 아무도 안 하잖아요. 하지만 한 번 해 보면, 생각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해적이 되라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나가 보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유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벌써 자기가 선배급이 됐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 업계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은 축에 듭니다. 빌 게이츠보다도 일찍 태어났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벌써 7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식사가 끝난 후 그는 피곤하다며 미안해했다. “정말 힘든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재밌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니까요.”


llustration: David O’Brien

열광적인 평가와 광적인 팬을 일으킨 매킨토시였지만 실적은 애플의 기대치를 밑돌았고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축출됐다. “광야에서 헤맨 나날”동안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를 창립하고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했으며, 필자와의 만남은 극히 드물었다. 1997년 애플의 임시 CEO가 됐을 때, 필자는 뉴스위크에 있었고 다시금 그를 인터뷰하게 됐다. 임시 CEO 취임소식 이후, 동료인 케이티 해프너(Katie Hafner)와 필자는 그가 과연 애플을 다시 거머쥘까 그에게 물어봤다. 전화상으로 그는 애플의 정식 CEO가 될 생각은 전혀 없으며 자신의 역할은 일시적이리라 주장했다. 자기는 여전히 픽사를 운영하고 있으며(사실 당시 잡스는 디즈니와 공동제작 협약을 체결했었다), 가족도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연애도 하는 일은 가능했음이 드러났다.)

“인생은 위대합니다. 제 나이 이제 42살이고, 디즈니와의 협력도 발표했어요. 정말 훌륭한 생일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애플로 돌아오기 원하냐는 한 애플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잡스는 애플의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애플에 리더쉽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 말했다. “수영을 하고 육상을 한다 하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팀스포츠입니다. 맥을, 애플을 만들 때 필요한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그들이 사랑하는 애플 영혼의 상징이 저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잡스는 애플이 “자신의 가치를 다시금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면” 당연히 스스로 재생하리라 말했다.

그는 운동에 대한 비유를 계속 제시했다. “애플은 다시 몸매를 되찾기 위해 체육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겁니다. 제가 트레이너로서 역할을 좀 맡을 수는 있겠죠.”

트레이너라니. 당연히 절제된 표현이리라 생각했었다. 필자는 잡스가 아이맥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났었다. 1997년의 5월 어느날, 우리는 애플 본부의 5층 스위트룸에서 만났고, 수 개월 전의 CEO였던 길 아멜리오(Gil Amelio)가 이 방을 사용했었다. 당시 잡스는 짧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었으며, 아멜리오가 일했던 이 거대한 사무실에서 그는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손보고 있었다. “사실 전 여기 절대로 안 옵니다. 그가 개인용 화장실을 50만 달러 들여서 설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아세요?” 우린 잡스가 선호하는, 더 작은 사무실로 옮겼고 연이어 오는 전화를 두 번 받았다.첫 번째 전화는 픽사의 한 중역이었다. 내용은 토이스토리 2의 생산가치를 더 늘릴 수 있는 대규모의 지출승인이었다. 두 번째는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였다. 그는 자신의 투나잇쇼에 애플의 유명한 “다르게 생각하라” 광고영상의 사용에 대해 잡스와 의논했다. (잡스에 따르면 자기 가족이 유일하게 보는 텔레비전 쇼가 사인펠드의 쇼라 말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이사진 회의실로 들어섰다. 길다란 회의 탁자 위에는 검정색 천으로 싸인 상자 비슷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일단 그 물체를 무시하면서 잡스는 자신이 애플로 복귀하게 된 정황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줬다. “애플이 있어야 세상이 보다 좀 나아지리라 결정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이제 전 40대이고 최선을 다 해 일을 할까 합니다. 저를 위해서에요. 회사에 대해 제 마음 속의 뭔가를 위해서이죠.”

잡스는 애플 제품군을 칸 4개 짜리 표에 넣겠다는 구상을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해줬다. 그에 따르면 애플은 수많은 제품을 각각 칸에 들어맞도록 줄일 거라 했다. 그 4가지 칸은 소비자용 노트북과 데스크톱, 그리고 전문가용 노트북과 데스크톱이었다. 즉, 나머지 제품은 모두 없어져야 했다. (놀랍게도 그는 포기하기 제일 어려웠던 제품이 뉴튼이었다면서, 뉴튼이 성공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뉴튼 팀이 다시금 애플의 핵심적인 일에 투입돼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탁자 위의 물체에 대해 보여줄 준비를 했다. 과장된 손짓으로 그는 천을 벗겨냈고, 아이맥을 보여줬다. 거의 무대 공연 수준의 제스쳐여서 아주 능숙한 쇼맨이 되셨습니다라 말하자 잡스는 짜증내 하면서 필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를 쇼맨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무슨 서커스단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약이라도 파는 것 같잖아요.”

혹시 떠나 있을 동안 개인적으로 반영시킨 것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뭐가 그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애플을 떠난 뒤로 뭔가 바뀌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그는 “전 똑같습니다”라 답했다. 그래서 바깥에 있을 동안 배운 점은 뭔지 물어봤더니 그는 아예 답변을 거부했다. “저는 저에 대해 최고의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저는 저와 너무나 밀착돼 있으니까요.”

그래도 필자는 돈과 명성이 어느정도 충격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린 애플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고 젊을 때 정말 많은 돈을 벌어들였어요. 하지만 제 인생을 그대로 파괴되지 않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올바른 결정이었죠. 공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로 느낍니다. 저에 대해 써댄 기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쓴 기사도 저는 신뢰하지 않아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합니다.”

원래 잡스는 영혼을 잃지 않은 채 100억 달러 어치의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그 말을 상기시키자 그는 정곡을 찔렀다면서 다른 답변을 했다. 애플은 이제 영혼이 없는 회사, 자기가 바랬던 회사가 결코 되지 못한 교과서적 사례가 됐다면서 말이다. 성장은 어쩔 수 없이 타협을 요구하게 되는 듯 했다. “그래도 저는 제 인생에 걸쳐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그는 “임시”를 CEO 직함에서 떼어내고 성공가도를 달려서 애플을 지구상에서 제일 가치높은 회사로 만들어냈고, 스스로는 이 시대에서 제일 추앙받는 경영자가 됐다. 그가 가졌던 100억 달러의 꿈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작아보일 정도가 됐다.


Illustration: Martin Ansin

그동안 필자는 운좋게도 기술업계의 훌륭한 쇼를 앞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애플이 새 제품을 발표할 때면 으레 미리 구경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구경을 미리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제품 발표 후 잡스와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비록 쇼맨이라는 단어를 갖고 필자를 공격했지만 잡스는 자기 제품 드러내기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훌륭한 쇼맨이 됐다. 1999년 7월, 필자는 다시금 애플 본사 회의실로 초청을 받아 잡스의 미적취향이 들어간 최초의 노트북, 아이북을 미리 볼 수 있었다. 디자인 책임자인 조니 아이브와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필자와 같이, 며칠 뒤에 하게 될 잡스의 기조연설 리허설을 구경했다. 잡스는 애플의 부활부터 거론한 이후 제품을 선보였다. 그 후 블루베리, 혹은 탠저린이 가미된 하얀색 노트북의 놀라운 디자인을 칭송한 다음(“멋져지기 위해서 일부러 어두워질 필요가 없습니다.”라 말했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컴퓨터를 켰다. “여기에 정말 많은 것이 들어가 있죠. 인터넷에 들어가보고 싶다고요? …애플 사이트로 가 보죠… 자, 애플의 웹사이트입니다.”

그 때 필자는 그 아이북에 이더넷 케이블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잡스는 기뻐했다.

“아. 뭔가 알아차리셨군요! 맞아요!!”

사실 애플은 새로 등장한 무선 인터넷(Wi-Fi) 기술을 홍보한 첫 번째 주요기업이 된다. 일부러라도 무선 인터넷을 보여주고 싶었던 잡스는 퀵타임 웹페이지로 가서 제임스 본드 영화 예고편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집어 들어요! 자, 산책이라도 가 봅시다!”

마치 묘기를 부리며 타파스 쟁반을 갖고 들어오는 스페인 웨이터처럼, 그는 몸소 아이북을 집어 들었다. 그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리가 맨 먼저 이쪽에 들어서는 이유가 이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잡스는 말그대로 춤추고 있었다. 실러와 아이브는 활짝 웃었고 잡스는 컨퍼런스 탁자 주변에서 맘보춤을 추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는 쇼맨이 맞다. 하지만 쇼맨 이상이다. 그는 궁극의 애플 팬보이였다.

잡스는 종종 이야기의 주제를 자신으로부터 자기 팀 이야기로 재빠르게 돌리곤 했다. 그리고는 제일 사악한 경쟁자 평가를 말하며 필자에게 펜을 내려놓으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마이크로소프트의 판매-위주의 정신세계를 비판했었다. (2002년, 잡스는 필자에게 고함치듯 말했다. “스티브 발머가 과연 PC를 사랑하나요? 마이클 델이 PC를 사랑하나요? 이 양반들은 자기가 만드는 것을 사랑하질 않아요. 애플은 당연히 사랑하는데도요!”) 잡스는 또한 자기가 없을 때의 애플은 단기이윤을 추구하여 그가 선호해 마지 않았던 장기전략을 내팽겨쳤음을 분명히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보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거의 보기 드물정도로 잡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도 있었다.

1999년 7월: 필자는 잡스에게 혹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이란 영화를 봤는지 물어봤다. 이 영화는 TNT에서 제작한 잡스와 빌 게이츠의 전기 영화였다. 그는 첫 방영할(TV판 영화였다) 때 시청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날 애플에 출근하면 모두들 날 쳐다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날 밤, 래리 엘리슨이 집에 왔어요. 그와 그의 친구, 그리고 제 부인과 제가 같이 영화를 봤습니다. 악랄하고 꽤 비열하더군요. 하지만 배우였던 노와 와일리(Noah Wyle)는 제 버릇과 기벽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와일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말 연기를 잘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영화는 최착이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인생이 그렇죠.”

2004년 1월: 잡스는 맥월드 엑스포 기조연설 때마다 연설 이후 제한적인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기조연설 뒤에 하는 마지막 인터뷰는 상당히 위험했다(물론 그 정도의 가치도 상당했다). 잡스가 만약 피곤해 한다면 몇 분 밖에 못 얻지만, 관대한 날이라면 배당된 15분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자신의 신제품을 앞에 갖다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말고는 아무도 이렇게 못합니다.”

그날, 잡스는 음악-편집 소프트웨어인 거라지밴드(GarageBand)를 막 소개했었지만 필자는 다른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2004년이 매킨토시가 나온지 20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달 앞서기는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20년 전에 나왔던 “미칠정도로 훌륭한(insanely great)” 컴퓨터가 어떻게 변해왔을지 그때는 상상이나 해봤냐고 물어봤다. “정말 완전히 충격받았을 겁니다. 한 번에 하나의 앱만 돌리던 맥은 툴이었어요. 삽이나 곡괭이, 스크류드라이버와 같은 툴이죠. 하지만 이거…” 그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이거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맥은 저의 커뮤니케이션이자 이메일이고 음악이자 저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말 그대로 가족과 같아요. 애플에서 회의를 들어갈 때나 운전할 때, 먹을 때 항상 컴퓨터가 있습니다. 제 인생이에요!”

2003년 10월: 새로운 아이포드의 발표를 언제나 좋아했었다. 새 아이포드가 발표될 때마다 무대 뒤에 가면 탁자 위에 티파니에서 파는 결혼반지처럼 아이포드가 진열돼 있었다. 그러면 어느 색상이 제일 좋냐고 잡스가 물어보곤 했었다. 그 날 오후 잡스는 새 아이포드 소프트웨어를 발표했고, 필자는 잡스에게 그날따라 유독 달랐던 선곡에 대해 물어봤다. 보통은 밥 딜런이나 그레이트풀데드의 노래를 틀었는데 그날은 비틀스의 “In My Life”를 삭막하게 재연구했던 조니 캐시(Johnny Cash)의 곡을 틀었기 때문이다. 잡스는 당시 아내 쥰 카터 캐시가 사망한지 4개월 뒤에 역시 사망했던 캐시에 대한 헌정이어서 그랬다고 인정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 중 하나거든요. 그가 사망했을 때 그곳에 가서 조니 캐시의 유품을 들여다 봤습니다. 감동스럽더군요. 부인에게 불렀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어요.” 가사는 이렇다. /모든 곳에 추억이 있다/모든 연인과 친구가 지금도 기억난다/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간다/내 인생 모든 것을 사랑했노라./ “노래가 다 빠른 요새 시대에 말입니다. 좀 느린, 이런 곡도 좋더군요.”

잡스가 췌장암을 알았던 때가 바로 그 때였다.

2004년 7월: 그 해 여름 뉴스위크 인터뷰를 위해 본사에서 그를 봤을 때, 잡스는 분명 목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기사 녹음을 위해 사용하고 있던 아이포드를 꺼내들자 그는 아이포드의 플라스틱 케이스가 너무 소름끼치다고 말했다. 너무 혐오스러운 케이스라면서 그는 케이스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이 근사해 보인다고 봐요. 아마 우리와 같아서가 아닐까요? 내년이면 제가 50살이 되잖아요. 저 자신이 스크래치가 좀 나 있는 아이포드같은 느낌입니다.”

당시로서는 좋은 농담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필자도 알고 있다. 잡스가 그 말을 했을 때, 그는 암수술을 받기 겨우 몇 주일 전이었다.

마지막 시절동안 필자는 잡스를 자주 보지 못했다. 병가는 곧 인터뷰도 많이 못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가 와이어드지로 옮긴 이후 그를 많이 다루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그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배경을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생각을 좀 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이메일이나 보냈을 뿐이다. 정말 그럴 요량이 있는 경우 그는 답변을 해 줬지만, 그 경우는 반드시 기나긴 대화로 이어졌다.

올해 초 캘리포니아를 방문했을 당시 잡스는 마지막 병가를 떠난 상태였다. 친구인 존 마코프(John Markoff)가 잡스와 연락이 닿았는데, 마코프는 뉴욕타임스에서 과학과 기술 섹션을 다루고 있으며, 필자보다도 잡스에 대해 더 오랫동안 기사를 쓴 친구였다. 그는 스티브에게 혹시 우리가 방문할 수 있는지를 메일로 물어봤다. 기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산책이나 하기 위해서였다. 스티브는 오시라고 했고, 우린 다음 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노트북이나 녹음기 없이 따뜻하고 서두르지도 않는 대화가 90여분간 이어졌다.

무엇이 자기에게 중요한지 잡스도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 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회사를 위한 일도 하려 했었다. 물론 그 노력은 2011년 10월5일부로 끝났다.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잡스는 애플의 “Think different” 캠페인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어떻게 골랐는지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제 일 중 최고였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뭘 상징하는지,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오랜 시간동안 고민했죠. 그러다가 ‘누가 당신의 영웅인가?’라 물어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영웅이 누구인지 알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죠.”

애플이 그 광고 캠페인을 다시 만든다면, 마지막에 누가 추가되어야 할지, 필자는 잘 알고 있다.

Senior writer Steven Levy (steven_levy@wired.com) also wrote about Jeff Bezos.

The Revolution According to Steve Jobs | Magazine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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