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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글래스의 탄생


Glass Works: How Corning Created the Ultrathin, Ultrastrong Material of the Future

By Bryan Gardine September 24, 2012 | 6:30 am


Molten glass cools to become so gummy it can be cut with scissors.
Photo: Max Aguilera-Hellweg

돈 스투키(Don Stookey)는 알고 있었다. 실험을 자기가 망쳐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1952년의 어느 날, 코닝글래스웍스(Corning Glass Works)의 화학자 돈 스투키는 감광성 유리의 샘플을 용광로에 넣고 온도를 600도로 맞춰 놓았다. 용광로가 돌아가자 불완전한 컨트롤러가 온도를 900도로 올려버렸다. 스투키는 녹은 유리 방울과 폐허가 된 용광로를 예상하고 문을 열어 보았는데, 수상하게도 그의 리튬 규산염은 우유 빛깔의 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판을 제거하려 하자, 그가 집어 넣었던 샘플은 집게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깨졌을까? 아니다. 튀어 올랐다.

미래의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될 화학자 스스로는 몰랐지만, 그는 막 최초의 인조 유리-세라믹을 발명했고 코닝 측은 나중에 이 인조 세라믹을 강화 내열 유리, 즉 파이로세럼(Pyrocerum)이라 이름 붙였다. 알루미늄보다 가볍지만 고탄소강보다 더 단단하고 보통의 소오다 석회 유리보다 수 배는 더 강력한 유리로서, 파이로세럼은 미사일 노즈콘에서 실험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쓰였다. 심지어 파이로세럼은 전자렌지에도 사용할 수 있었으며 1959년 코닝은 우주시대의 접시, 코닝웨어(Corningware)의 라인을 선보였다.

카이로세럼은 코닝의 효자 상품이었으며 코닝은 곧 머슬(Muscle)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유리를 강화할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거대 연구개발 프로젝트였다. 과학자들이 고온의 칼륨 소금 안에 유리를 적시는 등, 강화 작업을 수정해 보자 또다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칼륨 소금 안에 적시기 전에, 알루미늄 산화물을 집어 넣자 유리의 내구성이 한 층 더 강화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곧 9층 짜리 연구소에 설비를 갖다 넣고 유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 0317, 얼린 치킨이라 알려져 있던 이 유리는 1평방인치 당 10만 파운드의 압력도 견딜 수 있었고 어떠한 각도로도 굽히거나 휠 수 있었다. (보통의 유리는 7천 파운드 정도만 견딜 수 있다.) 1962년, 코닝은 켐코(Chemcor) 브랜드로 이 유리를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공중전화기의 유리나 감옥의 창문, 안경 등에 쓰이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관심은 많이 받았지만 실제 매출은 느렸다. 안경용으로 소량 주문한 기업들이 있기는 했어도 안경이 깨질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서 리콜하는 경우 또한 있었다. 켐코는 좋은 자동차용 바람막이 창이 될 수 있었으나 American Motors의 Javelin에 실제로 달려 나왔을 때, 제조업체 대부분은 새로운 강화 유리에 더 돈을 써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30년대에 개발한 합판유리로 충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코닝은 아무도 원치 않은 값비싼 업그레이드를 발명한 셈이었다. 충돌 테스트에서 탑승자 가속도가 현저히 줄어든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켐코의 판매에는 도움이 되지 못 했다.

포드 자동차나 다른 업체에 대한 판매 노력이 무산되자, 머슬 프로젝트는 문을 닫았고 켐코 역시 1971년 생산이 중단됐다. 올바른 문제가 나타날 때까지는 아직 기다려야 할 솔루션이었다.


When glass is hardened and strengthened it can withstand huge amounts of force from a lever press.
Photo: Max Aguilera-Hellweg

하늘에서 보면, 북부 뉴욕에 있는 코닝의 본사는 Space Invaders의 외계인 같은 모습이다. 90년대 초, 케빈 로슈(Kevin Roche)라는 건축가가 디자인한 건물로서 블럭을 여기저기 펼쳐 놓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에서 보면 색깔이 들어간 창문과 처마때문에 본사 빌딩은 빌딩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미래형 일본 궁전같은 느낌이 든다.

2층에 있는 코닝 CEO인 웬델 윅스(Wendell Weeks)의 사무실에서는 셔멍 강이 보인다. 바로 이 사무실에서 스티브 잡스는 당시 53세였던 윅스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의뢰했었다. 존재하지도 않던 초박형이면서 초강력 유리를 수 백만 장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아, 그리고 6개월 안에 하시지요.

자기가 주문한 기능이 가능하다면서 아예 유리의 원칙에 대해 윅스에게 강의까지 했던 잡스와 윅스 간의 협력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그런데 코닝이 실제로 어떻게 이 유리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윅스는 1983년에 코닝에 들어왔고 2005년 최고 지위에 올라서기 전에는 텔레비전과 특수 유리 사업을 맡고 있었다. 유리에 대해 물어 보면 그는 유리를 뭔가 아름답고 이국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과학자들이 이제서야 유리의 잠재성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는 투이다. 그 이야기는 감동과 진심을 담아 라디오-주파수와 투명 성질에 대한 강의로 이어진다. “유리의 디자인적 가치에는 근본적인 진실같은 면이 있습니다.” 그는 말끔한 조약돌을 들어 올렸다. “오브제-트루베(objet trouvé, 발견된 사물의 의미로서 일상적인 물건을 미술작품으로 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같은 것입니다. 부드럽지만 표면이 있죠. 이걸로 정말 원하는 바는 바로 살아 있는 겁니다. 완벽한 제품이에요.”

윅스와 잡스는 디자인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둘 다 디테일에 집착했으며, 둘 다 큰 도전과 아이디어를 중시했다. 그러나 잡스의 경영 스타일이 독재적인 데에 반해, 윅스는 코닝사의 여러 전임자들처럼 불복종을 어느 정도 독려하는 경향을 지녔다. 그의 말이다. “과학 연구원과 저 사이에는 구분이 없습니다. 여전히 고도의 긴장감이 존재하지만 매우 느슨한 방식으로, 작은 팀에서 같이 일할 수 있죠.”

코닝은 큰 기업이다. 2011년만 해도 79억 달러 매출액에 29,0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닝은 여전히 작은 기업처럼 생각하고 움직인다. 상대적으로 좀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서 더 쉬운 구석도 있다. 이직률이 거의 1% 대에 머무른 덕분에 구조적인 자산이 거대하게 쌓여 있다. (현재 97세인 스투키와 그 외 코닝의 전설과 같은 여러 인물들은 지금도 코닝의 연구개발 설비인 설리반파크의 연구소를 돌아다니고 있다.) 윅스의 설명이다. “우리는 모두 평생 코닝에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서로 알아 왔고 성공과 실패를 같이 여러 번 경험했죠.”

윅스가 잡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 주제는 유리와 관계 없었다. 코닝의 과학자들은 합성한 녹색 레이저 광선을 더 낫게 사용하기 위한 마이크로프로젝션 기술을 다루고 있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 조그마한 휴대폰 화면으로 보고 싶어 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영사(projection)는 자연스러운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마이크로프로젝션에 대해 잡스와 얘기를 나눌 때, 잡스는 영사는 멍청한 아이디어라 일갈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더 나은 것을 작업하고 있으며, 표면 전체가 화면인 기기라 언급했다. 아이폰이었다.

잡스가 녹색 레이저를 일축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녹색 레이저는 코닝 하면 떠오르는 혁신을 대표하는 기술이었다. 워낙에 코닝의 대표적인 혁신 기술이었기에 코닝은 매년 매출액의 10%를 레이저 연구개발에 투입해 오고 있었다. 경기가 좋건 나쁘건 말이다. 2000년 통신사 거품이 터지고 광통신 주가도 폭락하자, 코닝의 주가 역시 2002년 주당 $100에서 $1.50으로 급락했다. 당시 CEO는 과학자들에게 제아무리 주가가 떨어져도 코닝은 연구를 계속 할 터이고, 연구개발이야말로 번영으로 되돌릴 길이라고 안심시켜 줬다.

코닝이 일으킨 혁신의 역사를 연구해 온 하바드 비지니스스쿨의 레베카 헨더슨(Rebecca Henderson) 교수는 코닝이 기술기반 기업으로서는 정말 보기 드문 사례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정기적으로 재발명하는 보기 드문 사례에요. 말하기야 쉽지만 실제로 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성공의 이유가 무엇일까?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기술을 대규모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도 할 줄 알기 때문인 이유가 있다. 실제로 코닝이 어떠한 성공적인 신기술을 개발했을 때에도, 지속가능한(그리고 이윤도 가능한) 혁신 시장을 찾기에 수 십 년이 걸릴 때도 종종 있었다. 헨더슨의 지적에 따르면 코닝의 혁신은 실패한 아이디어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다른 곳에 응용했기 때문이다.


Glass starts out as a mixture of very fine powders like limestone, sand, and sodium borate.
Photo: Max Aguilera-Hellweg

2005년에 실패한 켐코의 샘플에 얹혀 있는 먼지를 걷어 내보자는 아이디어는 애플이 등장하기 이전에 나왔다. 당시 모토로라는 레이저 V3이라는 폴더형 휴대폰을 선보였었고, 전형적인 내충격성 플라스틱 대신 유리 화면을 장착하고 있었다. 코닝은 소규모 그룹을 결성하여 0317과 같은 유리를 휴대폰과 시계와 같은 기기에 넣어서 기술을 되살릴 수 있는지를 조사하도록 했다. 예전의 캠코 샘플은 두께가 4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됐지만 더 얇게 만들 수도 있었다. 시장 연구를 하고 나자, 코닝의 간부진은 코닝이 이 특별한 제품으로부터 돈을 좀 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때 탄생한 프로젝트가 바로 고릴라 글래스(Gorilla Glass)였다.

잡스로부터의 전화는 2007년 2월에 있었다. 그당시 고릴라 글래스의 진척도는 그리 나아가지 않은 상태였지만 애플은 갑자기 1.3-mm 두께 유리의 대량생산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 유리는 화학적으로 강화된 유리로서 대량생산은 커녕 아직 만들어진 적도 없었다. 역시 대량생산된 적이 전혀 없었던 켐코를 과연 그 정도 규모로 생산해낼 수 있을까? 자동차 바람막이용으로나 생각했던 유리를 갑자기 초박형으로 만들면서도 그 강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화학적 강화 공정이 그런 유리에 대해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CEO라면 으레 그러하듯 윅스는 해 보겠다고 말했다.

유리는 너무나 친숙해서 실질적으로 안 보일 정도이지만, 현대적인 유리는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 표준형 소다 석회 유리는 병이나 전구용으로 적합하지만 그 외 용도로는 대단히 부적합하다. 날카로운 조각으로 깨지기 쉽기 때문이다. 파이렉스(Pyrex) 유리와 같은 붕규산염 유리는 온도 변화에 강력하지만 녹이는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게다가 평판 유리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방법은 단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퓨전드로(fusion draw)이고, 다른 하나는 플로우트 프로세스(float glass process)로서, 둘 다 녹인 유리를 녹인 주석에다가 붇는다. 단 유리 회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가지 있다. 원하는 특성을 다 갖춰서 조합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이를 실제 생산공정에다가 돌려야 한다는 점이다. 즉, 어떠한 한 유리를 만들어내는 산식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나온 유리를 실제로 생산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Corning is working on new flexible glass formulations that will ship on spools.
Photo: Max Aguilera-Hellweg

조합을 어떻게 하건 간에 거의 모든 유리에서 제일 많이 들어가는 요소는 이산화염 규소(즉, 모래)이다. 단 1,720도에 달하는 용해점을 갖기 때문에 산화나트륨과 같은 화학물질은 유리 혼합물의 용해점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그래야 생산 비용이 떨어지고 제품 만들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화학물질 다수는 엑스레이에 대한 저항성이라든지, 고온에 대한 저항성, 빛 굴절성, 색상 분산성과 같은 특수한 성질을 유리에다가 입혀 준다. 물론 문제점은 있다. 유리 조합이 바뀌면, 즉, 조금이라도 조합을 수정한다면 대단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가령 바륨이나 란타늄과 같은 밀집적인 원소(dense elements)가 들어가면 용해점은 낮출 수 있지만 균일한 조합을 얻지 못 할 위험성이 생긴다. 게다가 유리의 전체적인 강도를 최대화시킬 경우, 상처가 생길 때 격렬하게 금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유리는 등가교환의 재료이다. 이 때문에 특정 제조 공정용으로 유리 조합을 수정하는 방법을 기업들마다 최대의 비밀로 다루고 있다.

유리 제조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단계는 바로 냉각이다. 표준형 유리의 대량 생산에 있어서 유리를 점진적으로 냉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내부적인 스트레스틑 최소화시켜야 깨질 가능성을 줄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담금질(annealing)이라 한다. 하지만 강화유리의 목표는 유리의 안쪽과 바깥쪽 레이어 사이에 스트레스를 추가시키기이다. 역설적이지만 스트레스를 추가시키면 유리가 더 강력해진다. 유리에 열을 가하여 외부 표면이 부드러워지면 급속도로 냉각시키거나 불을 끄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집어 넣는다. 그러면 외부는 빠르게 수축하지만 내부는 녹아 있는 상태로 남는다. 유리의 중앙부분은 냉각하면서 수축되려 하고, 외부를 잡아당기게 된다. 그러면 중앙 부분에는 팽팽한 부분이 생겨나되, 바깥 표면은 한층 더 압축된다. 단, 단단해진 외부 압축 레이어를 팽팽해진 구역으로 집어 넣으면 강화 유리도 결국 깨지며, 내열 강화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냉각으로부터 유리를 얼마나 수축시키느냐에 따라 내구성이 정해지게 마련이고, 대부분의 조합은 보통 정도로 수축할 것이다.

압축과 팽팽함 간의 상호 작용은 루퍼트 왕자의 구슬(Prince Rupert’s drop)으로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다. 용해된 유리 방울을 냉수에 부어 형성시키는데, 급속 냉각 및 압축된 올챙이같은 유리는 망치로 직접 여러 번 두둘기는 등, 대량의 힘을 가해도 견딜 수 있는 유리가 된다. 단, 꼬리 부분 말미에 있는 얇은 유리 부분은 취약하며, 깨뜨리는 경우 금이 시간당 2,000 마일의 속도로 퍼져 나간다. 내부 장력을 배출시키기 위해서이다. 격렬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루퍼트 왕자의 구슬 실험을 하다 보면 섬광 효과를 배출할 정도로 격렬하게 폭발할 때가 있을 정도다.

60년대 개발된 강화 유리 제조기법 중 하나인 화학 처리(chemical strengthening) 기법도 이온교환을 통해 강화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고릴라 글래스처럼 알루미노규산염의 조합에는 이산화규소와 알루미늄, 마그네슘, 나트륨이 들어가 있다. 고릴라 글래스를 용해된 칼륨염 안에 집어 넣으면, 고릴라 글래스는 온도가 올라가면서 확장된다. 나트륨과 칼륨은 둘 다 원소 주기율표에서 같은 열에 위치하기 때문에 움직임도 비슷하다. 칼륨염에서 나오는 고열은 나트륨 이온을 유리에서 계속 빼내며, 나트륨 이온과 유사한 칼륨 이온이 떠 다니다가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칼륨 이온이 나트륨 이온보다 거대하기 때문에 이들은 공간으 더 타이트하게 차지한다. (소형차로 가득찬 주차장을 대형차로 채워 넣는다 생각하시라.) 유리가 냉각되면 이들은 좁아진 공간에서 서로를 쥐어 짜고 유리 포면상에 응력(compressive stress) 레이어를 형성시킨다. (코닝은 시간과 열과 같은 요소를 조절해서도 이온 교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열로 강화시킨 유리와 비교해 볼 때, 화학 처리에 따른 “stuffing”이나 “crowding” 효과는 고도로 높은 응력을 낳는다. (보통의 강화유리보다 내구성이 네 배까지 올라간다.) 게다가 어느 모양이든, 어느 두께이든 만들 수도 있다.


Engineers at Corning use an array of torture devices to test the limits of its products.
Photo: Max Aguilera-Hellweg

3월 말, 코닝은 제조법 공식을 거의 마쳐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량 제조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완성에 수 년이 필요한 새로운 제조 공정의 발명은 가능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애플이 제시한 기한을 맞추기 위해 코닝의 과학자, 애덤 엘리슨(Adam Ellison)과 매트 데즈네카(Dejneka)에게 임무가 떨어졌다.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공정을 수정하고 조절해서 대량 생산 기법을 알아내라는 임무였다. 대량의 얇고 깨끗한 유리를 몇 주 안에 대량생산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선택은 단 한 가지, 퓨전드로(fusion draw)였다. 퓨전드로 기법은 일단 탱크에 있던 용해된 유리를 꺼내서 아이소파이프(isopipe)라 불리는 구유로 보낸다. 이 아이소파이프 안에 모인 용해된 유리가 아이소파이프를 넘쳐나면, 아랫쪽에서 다시 합류하여 정해진 요율에 따라 롤러가 매끈한 면으로 밀어낸다. 더 빨리 밀어낼 수록 유리도 더 얇아진다.

퓨전드로 공법이 가능한 코닝의 공장은 켄터키 주의 해로즈버그(Harrodsburg)에 있다. 2007년 초, 코닝의 플랜트에 있는 15-피트-높이의 탱크 7기 모두가 가동돼 시간당 1,000 파운드 이상의 텔레비전 패널용 LCD 유리를 찍어내고 있었다. 애플의 초기 요구사항에 맞는 탱크가 1기 있었는데, 우선은 예전의 켐코 조합식을 다시 구성해야 했다. 이제 두께 1.3mm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공중전화 박스보다 더 나은 선명도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엘리슨과 그의 팀은 6주 안에 그 일을 완수해야 했다. 퓨전드로 공정과 맞추기 위해 유리는 꽤 낮은 온도에서 츄잉검처럼 신축성을 가져야 했다. 단, 신축성을 높이려면 보통, 용해시키기가 더 어려워진다. 조합의 개별 부분 7개를 동시에 변형(여러 가지 산화물 수준을 바꾸고, 비밀 첨가물을 새로 집어 넣는 등)시킨 끝에 과학자들은 더 빠른 이온교환과 압축력을 지닌 유리를 생산하는 동시에 점착력도 늘릴 수 있음을 발견했다. 탱크는 2007년 3월, 생산을 시작했으며, 6월경, 코닝은 축구장 7곳의 필드를 채울 만한 고릴라 글래스를 생산해냈다.

5년만에 고릴라 글래스는 하나의 재료로부터, 우리가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는 디지탈 현신(現身)이라 할 수 있을 기기의 물리적인 부분을 미학적으로 나눠주는 하나의 칸막이로 바뀌었다. 외부 유리를 손대고, 움직임이 데이터로 전환되면서 화면과 몸체 사이, 전자가 흐르는 서킷에 우리의 몸을 댄다. 노트북과 태블릿, 스마트폰, 텔레비전 등 그러한 기기가 전세계적으로 33개 브랜드에 750개 제품으로 나와 있다. 일상적으로 손대고 스치며 어루만진다면, 여러분도 고릴라 글래스를 만지는 것이다.

고릴라 글래스로 벌어들이는 코닝의 수입은 2007년 2천만 달러에서 2011년 7억 달러로 치솟았다. 고릴라 글래스는 비단 터치스크린에만 쓰이지 않는다. 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발에서 주요 애플 스토어 디자인 책임자 중 하나인 에커즐리 오캘리헌(Eckersley O’Callaghan)은 고릴라 글래스로만 제작한 구불구불한 조각상을 선보였다. 심지어 고릴라 글래스는 바람막이 창으로도 다시 쓰이고 있다. 코닝은 현재 스포츠카 모델에 고릴라 글래스를 장착시키는 협상중에 있다고 한다.

오늘날, 두 대의 노란색 로보트 팔이 5 평방피트 너비의 고릴라 글래스 패널을 집어 든다. 여기에 잔여물을 소거하는 석션컵(suction cup)이 유리를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놓는다. 해로즈버그로부터 루이즈빌(Louisville)까지 운송된 유리는 서쪽행 기차에 오른다. 서부 해안에 도착하면 유리는 화물선에 오르거나, 중국에 있는 코닝의 “최종공장(finisher)”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고릴라 글래스는 용해 칼륨 안으로 들어가서 만질 수 있는 사각형 유리로 잘린다.

이와 같은 마술과 같은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고릴라 글래스도 깨진다는 소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종종 심하게 깨지는 경우도 있다. 휴대폰을 떨어뜨리거나 굽힐 때 깨지고, 깔고 앉으면 부숴진다. 어찌 됐건 고릴라 글래스도 유리이다. 그 때문에 코닝의 소규모 팀에서 고릴라 글래스를 박살내는 데에 시간을 하루 종일 보내고 있다.

나무 상자에서 금속제 실린더를 꺼내면서 제이민 아민(Jaymin Amin)은 “우리는 이걸 노르웨이 망치라 부릅니다”라 말한다. 보통은 비행기 엔지니어들이 비행기의 알루미늄 동체가 얼마나 견고한지 테스트할 때 쓰인다. 고릴라 글래스의 새로운 제품 개발을 관장하는 아민으로서는 스프링이 달린 이 망치를 갖다가 2줄(joule)에 달하는 힘을 1mm 두께의 유리에 내리쳐서 테스트를 해야 한다. 이 정도 힘이라면 나무에 큰 흠을 낼 정도의 힘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릴라 글래스의 성공때문에 코닝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도전이 생겼다. 코닝으로서는 이렇게 빠른 회전율을 보이는 수요가 처음이다. 고릴라 글래스의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실제로 사용할 때의 신뢰성과 견고성을 테스트하고 감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민의 팀은 고릴라 글래스가 산산조각 난 휴대폰 수 백 대를 모아들였다. 수석 연구 과학자인 케빈 레이맨(Kevin Reiman)의 말이다. “크건 작건 한 번 깨지는 것은 어느 한 부분때문이에요.” 그는 거의 보이지 않는 칩을 가리켰다. 그의 앞에는 몇 개의 깨진 휴대폰 중 하나인 HTC Wildfire가 놓여 있었다. 어느 부분이 시작점인지를 알아내면, 압력이 어떻게 유리로 전파되는지를 알아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 과정을 되풀이할 경우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지도 연구해낼 수 있다. 조합을 바꾸든지 화학처리를 바꾸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고 나면, 나머지 그룹이 정확하게 같은 결함을 낼 때까지 반복해서 해당 결함을 다시 만들어낸다. 레버프레스를 사용하거나 화강암과 콘크리트, 아스팔트 표면에다가 떨어뜨리고, 자유낙하 실험 등 여러가지 다이아몬드 날로 만든 고문장비로 괴롭혀 본다. 심지어 굴곡과 오류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초당 100만 프레임으로 촬영하는 고속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파괴와 통제 실험은 성과를 냈다. 첫 번째 버전과 비교해 볼 때 고릴라 글래스 2.0은 20% 더 강력해졌다(세 번째 버전이 내년 초에 나올 예정이다). 코닝의 유리 성분 조합 과학자들이 압축력을 한계까지 추구함으로써 거둔 성과다. 첫 번째 버전의 고릴라를 만들 때에는 보수적이었다. 압축력을 늘렸을 때 일어나는 폭발적인 파손을 피하도록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리는 그 자체로 부러지기 쉬운 물질이다. 그리고 잘 부러지는 물질은 압축에 대단히 강력하기는 하지만, 장력이 증가하면 극도로 약하기도 하다. 유리를 굽히면 깨진다. 장력이 재앙적으로 유리를 점령하지 않도록, 그리고 금이 유리를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는 역할이 압축 레이어에 있으며, 그것이 바로 고릴라 글래스의 핵심이다. 처음에는 휴대폰을 떨어뜨려도 화면은 깨지지 않는다. 단 두 번째로 떨어뜨리면 심각하지 않다 하더라도 치명적일 수 있다. 모든 것이 등가 교환으로 이뤄지는 물질로 하는 작업의 불가피한 결과 중 하나일 텐데, 고릴라 글래스는 완벽하게 감지할 수 없을 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해로즈버그의 플랜트로 돌아가 보자. 검정색 고릴라 글래스 티셔츠를 입고 있는 한 남자가 100-미크론 두께의 유리판을 롤러 사이로 만들어내는 것을 지도하고 있었다. 기계는 마치 출력기처럼 보였고 유리는 투명하고 빛나는 거대한 종이를 구비구비 풀어내는 것과 같았다. 놀라울 정도로 얇고 두루말이를 할 수 있는 이 물질을 윌로우(Willow)라 부른다. 갑옷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고릴라 글래스와는 달리 윌로우는 비옷에 더 가깝다. 내구성이 있고 가벼우며 잠재력이 거대하다. 코닝은 윌로우를 말 수 있는 스마트폰 디자인, 그리고 초박형으로 말 수 있는 OLED 디스플레이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 신축성 있는 태양광 셀에 윌로우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코닝은 심지어 유리 페이지를 가진 전자책도 상상하고 있다.

결국 윌로우는 영화 필름처럼 거대한 실패와 같은 유리-패의 형태로, 패 하나당 500 피트의 유리를 둘둘 말 것이다. 이 패는 주문용이다. 지금으로서 유리-패는 해로즈버그의 공장 바닥에 놓여 있다. 올바른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이 될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Bryan Gardiner (bgardiner@gmail.com) also writes about anatomical models made of borosilicate in this issue.

Glass Works: How Corning Created the Ultrathin, Ultrastrong Material of the Future | Wired Science | Wired.com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Steve Jobs Almost Named The iMac The MacMan, Until This Guy Stopped Him

WRITTEN BY: Ken Segall
KEN SEGALL, THE MAN BEHIND APPLE’S LEGENDARY “THINK DIFFERENT” CAMPAIGN, RECALLS HOW HE WRANGLED ONE OF THE MOST DIFFICULT CLIENTS OF ALL TIME.

다음의 내용은 저자의 책, “Insanely Simple: The Obsession That Drives Apple’s Success(Penguin Portfolio)”에서 발췌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물체는 정말 수수께끼와 같았고 모두들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종이 덮개 아래 숨겨져 있던 그 물체에서 그 어떤 디테일도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했다. 일단은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언제나처럼과 마찬가지인 제품 브리핑이 될 테지만 저 종이 아래 놓인 가정용 컴퓨터가 애플을 살려낼 터였다.

과도하게 오버할 이유는 없겠지만 스티브 자신은 정말 감격하리라 장담하던 터였다. 그가 처음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광고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미 암시했던 제품이 이것이었다. 스티브는 첫 제품이 아예 가정용 컴퓨터를 다시 생각한 제품이 되리라 말했었다. 그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에게 위대한 일에 도전하라 했었고 드디어 그 결과물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계속 베이지색 상자형 컴퓨터나 계속 찍어내서는 애플 스스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외양으로나 기능으로나 수 백 수 천가지 PC와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이 첫 제품이 사람들 눈을 열고 애플이 되돌아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바랬다.

“IF STEVE REALLY WAS BETTING THE COMPANY ON THIS COMPUTER, IT HAD TO BE BRILLIANT.”

그 때는 1998년 봄, C1이라는 코드명으로만 알려져 있던 이 새로운 컴퓨터를 처음 본사에서 보게 된 날이었다. 코드명의 “C”는 “소비자(consumer)”를 뜻했는데 당시의 애플은 별다른 고민 없이 코드명을 정하던 때였다. 그 때 이미 우리는 이미 기나긴 세월을 보냈다 느끼고 있었다. 다르게 생각하라는 광고 캠페인을 전세계의 텔레비전과 도로변, 잡지 뒷면에 전략적으로 놓고 있던 때였다. 광고는 일단 브랜드-구축의 역할을 맡았다. 실제 제품은 바로 이 C1이었으며, 브랜드 캠페인이 한낱 거품만이 아니었음을 드러내야 할 증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C1 바로 앞에 우리가 앉아 있었다. 그 모든 작업의 결과가 실제로 어땠는지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스티브가 정말로 이 컴퓨터에 회사의 운명을 걸고 있다면 그 컴퓨터는 정말 멋져야 했다. 애플에게는 시간이 부족했으며, C1은 상황을 뒤바꿔야 할 컴퓨터였다. 광고 에이전시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여섯 명은 됐으며 이들은 광고와 고객 담당자들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애플의 제품 관리자는 두 명이었으며, 소개와 인사말 다음, 실제 발표가 있었다.

관리자 한 명이 C1 앞에 다가가서 종이덮개를 젖혔다.

바로 거기에… 아이맥이라 알려진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우주가족 젯슨(The Jetsons)에서 막 나온 듯한 컴퓨터였고, 모두들 입이 벌어져 있었다. 보고 있던 대상에 대해 모두들 빠져들고 환영하고 있었다. 컴퓨터라면 으레 이래야 한다는 인식의 모든 면을 여지 없이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맥은 화려한 색상의 단일 본체로서 반투명한 덮개 아래 내부 회로도도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임을 우리 모두 확신했을 정도로 우리가 똑똑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광고 에이전시 팀끼리 아이맥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을 말했을 때, 우리 모두 느낌이 같았었다. 일부는 충격과 탄성,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분명 자기가 뭘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혁명적인 컴퓨터라면 그 자체만으로 너무 충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THIS REVOLUTIONARY COMPUTER MIGHT JUST BE TOO SHOCKING FOR ITS OWN GOOD.”

그 날 알려진 것이 C1의 모양과 디자인만은 아니었다. C1에 딸려온 마우스로 놀랍고 새로웠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컴퓨터처럼 그런 마우스 또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존재였다. 아이맥과 마찬가지로 친숙한 색상에 둥그스럼했다. 우리는 “이건 좀 와일드(wild)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마우스는 나중에 대단히 멍청했음이 드러났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그런데 벽 쪽에 면해 있는 탁자에는 또다른 컴퓨터가 덮개에 쌓여 있었다. 무척 놀랐다. 형제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컴퓨터는 전문가형 타워 모델로서 C1에 바로 뒤이어 발표될 새로운 파워맥 G3였다. 파워맥 G3는 투명하지 않았으나 디자인 면에서 C1과 공유하는 점이 많았다. 위아래로 놓여 있는 거대한 핸들과 같은 플라스틱스러운 곡면이 매우 많았다. 파워맥 G3는 똑같은 옷을 걸친듯한 별도의 모니터와 같이 등장했었다. 당시로서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CRT 모델이었기 때문에 모니터 또한 거대했고 파란색과 하얀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다른 젯슨가족 소품이었고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컴퓨터의 마우스 또한 C1의 마우스와 같았다.


파워맥 G3를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한 탄성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모델은 좀 신경쓰이는 면이 있었다. 프로를 지향한다고는 하는데 소비자용 컴퓨터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파란색은 천박했다. 물론 디자인 책임자인 조니 아이브와 그의 팀은 새 아이맥 디자인 개념에 너무 흥분해서 프로 모델에도 동일한 디자인을 했을 터였다. 다시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스티브 스스로 알기를 바래 보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물론 스티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실제로 잘,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가 모든 것을 정확히 맞추지는 못했어도 너무 많은 부분을 맞췄기에 그는 컴퓨터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WE ALREADY HAVE A NAME WE LIKE A LOT, BUT SEE IF YOU CAN BEAT IT.”

다음 회의에서 스티브는 C1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무척 듣고 싶어했다. 그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같은 모습이었다. C1은 애플의 초점이었고 스티브는 분명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이 제품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랑했고, 그 사실을 세상과 나누고 싶어했다. “우리 컴퓨터 뒷면은 그네들 컴퓨터의 앞면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스티브는 거듭 말했다.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생각을 할 시간이 충분했었다.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지나가자 우리는 C1이 어떻게 혁명적인 제품이 될지를 이해했다. 우리는 신봉자였다. C1을 위한 광고캠페인을 당장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우리에게 숙제를 줬다. 일단 C1을 위한 작명이었다. C1은 곧 생산이 이뤄질 예정이었으며 제조와 포장 디자인을 위해서 이름을 빨리 지어야 했다. 스티브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우리가 좋아하는 이름을 생각해 뒀어요. 하지만 여러분들 혹시 근사한 이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은 이름은 ‘맥맨(MacMan)’이에요.”

THE “I” OF MY APPLE

여러분들 생각에도 끔찍한 이름이었을 텐데, 잠시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제품 이름짓기의 기술에 대해서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함을 원한다. 제품의 이름이야말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제일 극명한 사례일 것이다. 어떤 회사의 제품은 “아이폰”이고, 다른 회사의 제품은 “Casio G’zOne Commando”이거나 “Sony DVP SR200P/B DVD player”이다. (실제 이름이 저렇다. 과장한 것 아니다.)

혹시 제품 이름짓기란 결국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만 해당하는 얘기 아닐까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조직에서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면 좋은 제품 이름짓기의 원칙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보고서 제목이라거나 회의 주제 짓기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여러분이 원하는 뭔가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제품 이름짓기는 단순성에 있어서 궁극의 기술이다. 단어 하나(혹은 둘) 갖고 마음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회사의 정수를, 혹은 자신의 성격을 이름으로 보여줘야 한다. 단순성을 이루려면 이런 도전을 극복해야 하건만 유감스럽게도 복잡성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품들 이름을 보다 보면 이런 전쟁에서 복잡성이 이기는 사례도 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다.


C1으로 돌아가 보자. 아니, 그 때는 맥맨이었다. 우리 에이전시는 스티브가 “맥맨”과 같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이름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마음이 찢어진 느낌이었다. C1이라는 제품 그 자체에 우리는 충격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건만 “맥맨”은 전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너무나 많이 틀렸건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몰랐다.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방에 들어오자 스티브는 “맥맨”이 필의 아이디어라 밝혔다.

“THE NAME JUST GAVE US HIVES, BUT WE’D NEED TO BE A BIT MORE TACTFUL.”

스티브는 맥맨이 “소니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좀 있다고 봅니다”라 말했다. 당연히 소니의 전설적인 워크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소니랑 좀 닮아도 되잖겠습니까. 소니는 유명한 가전업체잖아요. 맥맨이 소니에서 나오는 제품처럼 보인다면 그것대로 좋겠죠.”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아니 다른 여느 회사도 아니고 애플은 그 스스로의 고유성으로 움직이는 회사였다. 다른 회사 스타일 느낌이 너무나도 확연한 이름을 짓는 것은 애플답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맥맨”의 “맨”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분명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어서였지만, 이름 자체 때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요령이 좀 필요할 때였다.

모두들 갖고 있을, 클라이언트 다루기의 문제점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당신이 싫어하는 뭔가를 클라이언트가 무척 좋아한다면 더 나은 것을 보여주기 외에 방법이 없다. 스티브는 “맥맨”을 능가하는 이름을 지어 보라며 우리를 초대까지 했으니,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는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애플을 빠져나가기 전에 스티브는 몇 가지 지침도 알려줬다. “뭣보다도 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맥’이라는 단어는 꼭 있어야겠다는 말씀이죠.” 그렇다. 맥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모양만 빼면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맥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모두들 인터넷에 들어가고 싶어하잖아요. C1은 인터넷에 들어갈 가장 쉬운 수단입니다. 식은 죽 먹기에요.” EarthLink 인스톨러가 시스템에 미리 들어가 있기에 컴퓨터를 켜고 등록서를 채우고나면 곧바로 네티즌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메일 주소도 새로 받을 수 있었고 말이다. (그 당시로서는 장담컨데 상당히 큰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브가 말한 요구사항은 두 가지였지만, 이 두 가지에 빠져들어서도 안 되었다. 스티브는 “C1은 완전한 맥이지만 C1을 장난감으로 볼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너무 경망스러워도(frivolous) 안 됩니다. 위에 손잡이가 달려 있으니 무슨 노트북처럼 생각할 위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컴퓨터는 무겁습니다. 손잡이는 집 안에서 움직이기 좋으라고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휴대성을 연상케 하는 이름도 안 됩니다.”라 말했었다.

그의 지침에 따라 우리는 궁리를 거듭했다. 일단 스티브가 “맥맨”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스티브의 지침을 깨뜨리는 이름이 바로 “맥맨”이었다. 맥맨은 패크맨처럼 게임스럽기도 하고 워크맨처럼 휴대성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점은 일단 차치하고 더 좋은 이름을 만들어야 했다. 서로 동의하지 않을 점이 있기는 해도 일단 C1 이름짓기는 정말 근사한 기회였고 우리 팀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1주일 후, 우리는 애플로 돌아와서 C1 이름 후보들을 알려줬다. 기나긴 목록 중 다섯 가지의 선호 목록을 추려낸 후, 이름마다 포스터를 하나씩 만들었다. 각 포스터는 이름을 크고 화려하게 표시한 후, 왜 이 이름이 좋은지에 대한 이유도 몇 가지씩 아래에 써 붙이고 있었다.

“USING ‘MAC’ IN THE NAME WAS MORE OF A REVOLUTION THAN YOU MIGHT REALIZE.”

우리가 좋아했던 이름은 처음에 우연히 생각했던 “아이맥”이었다. 아이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이름같았다. 우선 맥이 들어갔고 i는 이 맥이 인터넷을 위한다는 느낌을 줬다. “맥”에 알파벳 하나만 붙이면 되니 간결하기로도 완벽했다. 장난감스럽지도 않았고 휴대성과도 관련 없었다.한편 제품에 “맥”을 쓰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더 혁명적이기도 했다. 그 당시 모든 애플의 컴퓨터는 “매킨토시”였고, 아직 “맥”은 구어체로 매킨토시를 가리킬 뿐이었다. 단순성과 미니멀리즘을 위해서도 “아이맥”은 완벽해 보였다.

당연한 말인데 아이맥이라는 이름에는 다른 자잘한 장점도 있었다. 애플이 차후 소비자용 제품을 만들 때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언젠가는 다른 “i” 제품을 애플이 또 만들어내지 않을까?

난 스티브를 부추겨서 선호 목록 다섯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게 했다. “미니맥”(맥 미니가 나오기 오래 전 이야기이다)부터 시작해서 “아이맥”으로 끝나는 후보들이었다. 난 “아이맥”이 간결하고 기억하기 쉬울 뿐 아니라 “i”가 다른 것도 의미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터넷과 당연히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개인(individual)”, “상상(imagination)”과도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맥은 스티브에게 원했던 효력을 미치치 못했다. 스티브의 말이다.

“다 싫어. ‘맥맨’이 더 낫구만.”

낙담이었다. 우리는 영웅같은 느낌으로 귀가하리라 기대했지만 상처나 핥으며 작명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 스티브는 “이제 1주일 안으로 더 나은 이름을 갖고 오지 않으면 ‘맥맨’으로 정해버리겠습니다.’라 말했었다. 1주일 후, 우리는 다른 이름도 몇 가지 더 지어왔다. 단 스티브가 “싫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새로 지은 후보에 “아이맥”도 다시 집어 넣었다. 광고계의 한 현자한테 배운 교훈이 하나 있었다. “나누고 싶은 새 아이디어가 있는 한, 전의 것을 다시 보여줘도 된다.”는 말이었다.

“WELL, I DON’T HATE IT THIS WEEK. BUT I STILL DON’T LOVE IT.”

두 번째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러 쿠퍼티노에 들어온 다음, 스티브에게 일단 새 후보들부터 보여줬다. 새 후보를 봐도 스티브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금 “아이맥”을 보여준 다음, 우리가 여전히 이 이름을 좋아한다 말해줬다. 그러자 스티브는 다시금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별로 싫지 않군요. 그래도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며칠 안 남았어요, 이제. ‘맥맨’이 여전히 최고라 생각합니다.” 역시나 낙담했지만 이번에는 좀 희망의 빛줄기가 남아 있었다. “아이맥”을 더 이상 싫어하진 않는다 말했기 때문이다. 뭔가 긍정적인 느낌이 났다.


그 때 이후로 뭔가 급반전이 있었던 듯 했다. 우리 모두 하이파이브를 칠만큼 영광의 순간이 있잖았을까?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런 순간은 없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다음 날 애플 쪽 클라이언트 한 명에게 물어 보니 작명에 대해 뭔가 조치가 있긴 있었다고 한다. 스티브는 “아이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변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고, 아이맥이라는 이름을 실크스크린으로 만들어서 제품에 붙인 다음, 실제 모양이 어떤지 알아보기도 했다.

이 결정에 대한 다른 부분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스티브가 결정을 내리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실제 모델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 분명하며, 주변인들로부터도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맥”이 탄생했다. 이 과정 또한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에게는 의견, 그것도 매우 강력한 의견이 있었다. 당신을 쓰러뜨리고 몇 번이고 거절할만한 의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비합리적이지는 않으며, 성심성의껏 진심어린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전혀 결정을 바꾸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아이맥을 만들 때는 정말 애플에게 중요한 때였다. 단순성에 대한 사랑이 승리했고 그 승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스티브는 훌륭한 제품에게 훌륭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했으며, 단어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맥의 경우, 그는 문자 하나의 힘마저 알고 있었다. 그 작은 “i”가 애플 브랜드에서 제일 중요한 문자가 됐기 때문이다.

KEN SEGALL

Ken Segall worked closely with Steve Jobs for over 12 years, serving as his ad agency creative director for both NeXT and Apple. Ken and his team were responsible for Apple’s legendary Think different campaign, which was an integral part of Apple’s transformation following Steve Jobs’s return. Segall has also led the agency creative efforts for Dell, Intel, and IBM, interacting with the executive teams of those companies. He blogs regularly at Observatory and has also created a popular Apple satire blog at Scoopertino | Unreal Apple news.
Photo ⓒ Doug Schneider
Steve Jobs Almost Named The iMac The MacMan, Until This Guy Stopped Him | Co.Design: business + innovation + design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Steve Jobs Almost Named The iMac The MacMan, Until This Guy Stopped Him

WRITTEN BY: Ken Segall
KEN SEGALL, THE MAN BEHIND APPLE’S LEGENDARY “THINK DIFFERENT” CAMPAIGN, RECALLS HOW HE WRANGLED ONE OF THE MOST DIFFICULT CLIENTS OF ALL TIME.

다음의 내용은 저자의 책, “Insanely Simple: The Obsession That Drives Apple’s Success(Penguin Portfolio)”에서 발췌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물체는 정말 수수께끼와 같았고 모두들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 종이 덮개 아래 숨겨져 있던 그 물체에서 그 어떤 디테일도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했다. 일단은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언제나처럼과 마찬가지인 제품 브리핑이 될 테지만 저 종이 아래 놓인 가정용 컴퓨터가 애플을 살려낼 터였다.

과도하게 오버할 이유는 없겠지만 스티브 자신은 정말 감격하리라 장담하던 터였다. 그가 처음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광고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이미 암시했던 제품이 이것이었다. 스티브는 첫 제품이 아예 가정용 컴퓨터를 다시 생각한 제품이 되리라 말했었다. 그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에게 위대한 일에 도전하라 했었고 드디어 그 결과물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계속 베이지색 상자형 컴퓨터나 계속 찍어내서는 애플 스스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외양으로나 기능으로나 수 백 수 천가지 PC와 구별이 안 되기 때문이다. 스티브는 이 첫 제품이 사람들 눈을 열고 애플이 되돌아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바랬다.

“IF STEVE REALLY WAS BETTING THE COMPANY ON THIS COMPUTER, IT HAD TO BE BRILLIANT.”

그 때는 1998년 봄, C1이라는 코드명으로만 알려져 있던 이 새로운 컴퓨터를 처음 본사에서 보게 된 날이었다. 코드명의 “C”는 “소비자(consumer)”를 뜻했는데 당시의 애플은 별다른 고민 없이 코드명을 정하던 때였다. 그 때 이미 우리는 이미 기나긴 세월을 보냈다 느끼고 있었다. 다르게 생각하라는 광고 캠페인을 전세계의 텔레비전과 도로변, 잡지 뒷면에 전략적으로 놓고 있던 때였다. 광고는 일단 브랜드-구축의 역할을 맡았다. 실제 제품은 바로 이 C1이었으며, 브랜드 캠페인이 한낱 거품만이 아니었음을 드러내야 할 증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C1 바로 앞에 우리가 앉아 있었다. 그 모든 작업의 결과가 실제로 어땠는지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스티브가 정말로 이 컴퓨터에 회사의 운명을 걸고 있다면 그 컴퓨터는 정말 멋져야 했다. 애플에게는 시간이 부족했으며, C1은 상황을 뒤바꿔야 할 컴퓨터였다. 광고 에이전시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여섯 명은 됐으며 이들은 광고와 고객 담당자들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애플의 제품 관리자는 두 명이었으며, 소개와 인사말 다음, 실제 발표가 있었다.

관리자 한 명이 C1 앞에 다가가서 종이덮개를 젖혔다.

바로 거기에… 아이맥이라 알려진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우주가족 젯슨(The Jetsons)에서 막 나온 듯한 컴퓨터였고, 모두들 입이 벌어져 있었다. 보고 있던 대상에 대해 모두들 빠져들고 환영하고 있었다. 컴퓨터라면 으레 이래야 한다는 인식의 모든 면을 여지 없이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맥은 화려한 색상의 단일 본체로서 반투명한 덮개 아래 내부 회로도도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임을 우리 모두 확신했을 정도로 우리가 똑똑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광고 에이전시 팀끼리 아이맥을 처음 봤을 때 느낌을 말했을 때, 우리 모두 느낌이 같았었다. 일부는 충격과 탄성,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분명 자기가 뭘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혁명적인 컴퓨터라면 그 자체만으로 너무 충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THIS REVOLUTIONARY COMPUTER MIGHT JUST BE TOO SHOCKING FOR ITS OWN GOOD.”

그 날 알려진 것이 C1의 모양과 디자인만은 아니었다. C1에 딸려온 마우스로 놀랍고 새로웠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컴퓨터처럼 그런 마우스 또한 이제까지 보지 못한 존재였다. 아이맥과 마찬가지로 친숙한 색상에 둥그스럼했다. 우리는 “이건 좀 와일드(wild)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마우스는 나중에 대단히 멍청했음이 드러났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그런데 벽 쪽에 면해 있는 탁자에는 또다른 컴퓨터가 덮개에 쌓여 있었다. 무척 놀랐다. 형제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컴퓨터는 전문가형 타워 모델로서 C1에 바로 뒤이어 발표될 새로운 파워맥 G3였다. 파워맥 G3는 투명하지 않았으나 디자인 면에서 C1과 공유하는 점이 많았다. 위아래로 놓여 있는 거대한 핸들과 같은 플라스틱스러운 곡면이 매우 많았다. 파워맥 G3는 똑같은 옷을 걸친듯한 별도의 모니터와 같이 등장했었다. 당시로서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CRT 모델이었기 때문에 모니터 또한 거대했고 파란색과 하얀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다른 젯슨가족 소품이었고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컴퓨터의 마우스 또한 C1의 마우스와 같았다.


파워맥 G3를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한 탄성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 모델은 좀 신경쓰이는 면이 있었다. 프로를 지향한다고는 하는데 소비자용 컴퓨터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파란색은 천박했다. 물론 디자인 책임자인 조니 아이브와 그의 팀은 새 아이맥 디자인 개념에 너무 흥분해서 프로 모델에도 동일한 디자인을 했을 터였다. 다시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스티브 스스로 알기를 바래 보자”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물론 스티브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실제로 잘,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가 모든 것을 정확히 맞추지는 못했어도 너무 많은 부분을 맞췄기에 그는 컴퓨터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WE ALREADY HAVE A NAME WE LIKE A LOT, BUT SEE IF YOU CAN BEAT IT.”

다음 회의에서 스티브는 C1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무척 듣고 싶어했다. 그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같은 모습이었다. C1은 애플의 초점이었고 스티브는 분명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이 제품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그는 모든 디테일을 사랑했고, 그 사실을 세상과 나누고 싶어했다. “우리 컴퓨터 뒷면은 그네들 컴퓨터의 앞면보다 더 낫습니다”라고 스티브는 거듭 말했다.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생각을 할 시간이 충분했었다.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지나가자 우리는 C1이 어떻게 혁명적인 제품이 될지를 이해했다. 우리는 신봉자였다. C1을 위한 광고캠페인을 당장이라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우리에게 숙제를 줬다. 일단 C1을 위한 작명이었다. C1은 곧 생산이 이뤄질 예정이었으며 제조와 포장 디자인을 위해서 이름을 빨리 지어야 했다. 스티브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우리가 좋아하는 이름을 생각해 뒀어요. 하지만 여러분들 혹시 근사한 이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은 이름은 ‘맥맨(MacMan)’이에요.”

THE “I” OF MY APPLE

여러분들 생각에도 끔찍한 이름이었을 텐데, 잠시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제품 이름짓기의 기술에 대해서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함을 원한다. 제품의 이름이야말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는 제일 극명한 사례일 것이다. 어떤 회사의 제품은 “아이폰”이고, 다른 회사의 제품은 “Casio G’zOne Commando”이거나 “Sony DVP SR200P/B DVD player”이다. (실제 이름이 저렇다. 과장한 것 아니다.)

혹시 제품 이름짓기란 결국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만 해당하는 얘기 아닐까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조직에서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면 좋은 제품 이름짓기의 원칙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보고서 제목이라거나 회의 주제 짓기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여러분이 원하는 뭔가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제품 이름짓기는 단순성에 있어서 궁극의 기술이다. 단어 하나(혹은 둘) 갖고 마음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회사의 정수를, 혹은 자신의 성격을 이름으로 보여줘야 한다. 단순성을 이루려면 이런 도전을 극복해야 하건만 유감스럽게도 복잡성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제품들 이름을 보다 보면 이런 전쟁에서 복잡성이 이기는 사례도 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다.


C1으로 돌아가 보자. 아니, 그 때는 맥맨이었다. 우리 에이전시는 스티브가 “맥맨”과 같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이름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마음이 찢어진 느낌이었다. C1이라는 제품 그 자체에 우리는 충격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건만 “맥맨”은 전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너무나 많이 틀렸건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는 몰랐다.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방에 들어오자 스티브는 “맥맨”이 필의 아이디어라 밝혔다.

“THE NAME JUST GAVE US HIVES, BUT WE’D NEED TO BE A BIT MORE TACTFUL.”

스티브는 맥맨이 “소니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좀 있다고 봅니다”라 말했다. 당연히 소니의 전설적인 워크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소니랑 좀 닮아도 되잖겠습니까. 소니는 유명한 가전업체잖아요. 맥맨이 소니에서 나오는 제품처럼 보인다면 그것대로 좋겠죠.”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아니 다른 여느 회사도 아니고 애플은 그 스스로의 고유성으로 움직이는 회사였다. 다른 회사 스타일 느낌이 너무나도 확연한 이름을 짓는 것은 애플답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맥맨”의 “맨”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분명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어서였지만, 이름 자체 때문에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요령이 좀 필요할 때였다.

모두들 갖고 있을, 클라이언트 다루기의 문제점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당신이 싫어하는 뭔가를 클라이언트가 무척 좋아한다면 더 나은 것을 보여주기 외에 방법이 없다. 스티브는 “맥맨”을 능가하는 이름을 지어 보라며 우리를 초대까지 했으니, 그렇게 까다로운 문제는 아닌 셈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애플을 빠져나가기 전에 스티브는 몇 가지 지침도 알려줬다. “뭣보다도 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맥’이라는 단어는 꼭 있어야겠다는 말씀이죠.” 그렇다. 맥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모양만 빼면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맥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모두들 인터넷에 들어가고 싶어하잖아요. C1은 인터넷에 들어갈 가장 쉬운 수단입니다. 식은 죽 먹기에요.” EarthLink 인스톨러가 시스템에 미리 들어가 있기에 컴퓨터를 켜고 등록서를 채우고나면 곧바로 네티즌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메일 주소도 새로 받을 수 있었고 말이다. (그 당시로서는 장담컨데 상당히 큰 선물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브가 말한 요구사항은 두 가지였지만, 이 두 가지에 빠져들어서도 안 되었다. 스티브는 “C1은 완전한 맥이지만 C1을 장난감으로 볼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너무 경망스러워도(frivolous) 안 됩니다. 위에 손잡이가 달려 있으니 무슨 노트북처럼 생각할 위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컴퓨터는 무겁습니다. 손잡이는 집 안에서 움직이기 좋으라고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휴대성을 연상케 하는 이름도 안 됩니다.”라 말했었다.

그의 지침에 따라 우리는 궁리를 거듭했다. 일단 스티브가 “맥맨”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스티브의 지침을 깨뜨리는 이름이 바로 “맥맨”이었다. 맥맨은 패크맨처럼 게임스럽기도 하고 워크맨처럼 휴대성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점은 일단 차치하고 더 좋은 이름을 만들어야 했다. 서로 동의하지 않을 점이 있기는 해도 일단 C1 이름짓기는 정말 근사한 기회였고 우리 팀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1주일 후, 우리는 애플로 돌아와서 C1 이름 후보들을 알려줬다. 기나긴 목록 중 다섯 가지의 선호 목록을 추려낸 후, 이름마다 포스터를 하나씩 만들었다. 각 포스터는 이름을 크고 화려하게 표시한 후, 왜 이 이름이 좋은지에 대한 이유도 몇 가지씩 아래에 써 붙이고 있었다.

“USING ‘MAC’ IN THE NAME WAS MORE OF A REVOLUTION THAN YOU MIGHT REALIZE.”

우리가 좋아했던 이름은 처음에 우연히 생각했던 “아이맥”이었다. 아이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이름같았다. 우선 맥이 들어갔고 i는 이 맥이 인터넷을 위한다는 느낌을 줬다. “맥”에 알파벳 하나만 붙이면 되니 간결하기로도 완벽했다. 장난감스럽지도 않았고 휴대성과도 관련 없었다.한편 제품에 “맥”을 쓰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더 혁명적이기도 했다. 그 당시 모든 애플의 컴퓨터는 “매킨토시”였고, 아직 “맥”은 구어체로 매킨토시를 가리킬 뿐이었다. 단순성과 미니멀리즘을 위해서도 “아이맥”은 완벽해 보였다.

당연한 말인데 아이맥이라는 이름에는 다른 자잘한 장점도 있었다. 애플이 차후 소비자용 제품을 만들 때의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언젠가는 다른 “i” 제품을 애플이 또 만들어내지 않을까?

난 스티브를 부추겨서 선호 목록 다섯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게 했다. “미니맥”(맥 미니가 나오기 오래 전 이야기이다)부터 시작해서 “아이맥”으로 끝나는 후보들이었다. 난 “아이맥”이 간결하고 기억하기 쉬울 뿐 아니라 “i”가 다른 것도 의미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인터넷과 당연히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개인(individual)”, “상상(imagination)”과도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맥은 스티브에게 원했던 효력을 미치치 못했다. 스티브의 말이다.

“다 싫어. ‘맥맨’이 더 낫구만.”

낙담이었다. 우리는 영웅같은 느낌으로 귀가하리라 기대했지만 상처나 핥으며 작명을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났다. 스티브는 “이제 1주일 안으로 더 나은 이름을 갖고 오지 않으면 ‘맥맨’으로 정해버리겠습니다.’라 말했었다. 1주일 후, 우리는 다른 이름도 몇 가지 더 지어왔다. 단 스티브가 “싫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새로 지은 후보에 “아이맥”도 다시 집어 넣었다. 광고계의 한 현자한테 배운 교훈이 하나 있었다. “나누고 싶은 새 아이디어가 있는 한, 전의 것을 다시 보여줘도 된다.”는 말이었다.

“WELL, I DON’T HATE IT THIS WEEK. BUT I STILL DON’T LOVE IT.”

두 번째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러 쿠퍼티노에 들어온 다음, 스티브에게 일단 새 후보들부터 보여줬다. 새 후보를 봐도 스티브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금 “아이맥”을 보여준 다음, 우리가 여전히 이 이름을 좋아한다 말해줬다. 그러자 스티브는 다시금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별로 싫지 않군요. 그래도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며칠 안 남았어요, 이제. ‘맥맨’이 여전히 최고라 생각합니다.” 역시나 낙담했지만 이번에는 좀 희망의 빛줄기가 남아 있었다. “아이맥”을 더 이상 싫어하진 않는다 말했기 때문이다. 뭔가 긍정적인 느낌이 났다.


그 때 이후로 뭔가 급반전이 있었던 듯 했다. 우리 모두 하이파이브를 칠만큼 영광의 순간이 있잖았을까?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런 순간은 없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다음 날 애플 쪽 클라이언트 한 명에게 물어 보니 작명에 대해 뭔가 조치가 있긴 있었다고 한다. 스티브는 “아이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변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고, 아이맥이라는 이름을 실크스크린으로 만들어서 제품에 붙인 다음, 실제 모양이 어떤지 알아보기도 했다.

이 결정에 대한 다른 부분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스티브가 결정을 내리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실제 모델을 보고 마음에 들어했을 것이 분명하며, 주변인들로부터도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맥”이 탄생했다. 이 과정 또한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에게는 의견, 그것도 매우 강력한 의견이 있었다. 당신을 쓰러뜨리고 몇 번이고 거절할만한 의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비합리적이지는 않으며, 성심성의껏 진심어린 의견을 제시했음에도 전혀 결정을 바꾸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아이맥을 만들 때는 정말 애플에게 중요한 때였다. 단순성에 대한 사랑이 승리했고 그 승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스티브는 훌륭한 제품에게 훌륭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했으며, 단어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맥의 경우, 그는 문자 하나의 힘마저 알고 있었다. 그 작은 “i”가 애플 브랜드에서 제일 중요한 문자가 됐기 때문이다.

KEN SEGALL

Ken Segall worked closely with Steve Jobs for over 12 years, serving as his ad agency creative director for both NeXT and Apple. Ken and his team were responsible for Apple’s legendary Think different campaign, which was an integral part of Apple’s transformation following Steve Jobs’s return. Segall has also led the agency creative efforts for Dell, Intel, and IBM, interacting with the executive teams of those companies. He blogs regularly at Observatory and has also created a popular Apple satire blog at Scoopertino | Unreal Apple news.
Photo © Doug Schneider
Steve Jobs Almost Named The iMac The MacMan, Until This Guy Stopped Him | Co.Design: business + innovation + design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