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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Macintosh User Group

Posts in the 컴퓨터 category

1980년대 초, 애플 컴퓨터 및 태블릿 디자인


hartmut esslinger’s early apple computer and tablet designs

첫 번째 이미지
하트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의 초기 애플 컴퓨터와 태블릿 디자인, ‘애플 맥폰(apple macphone)’ 이미지, 하트무트 에슬링거 제공 
 
Frog design의 창업자인 독일 디자이너 하트무트 에슬링거의 새로운 책, design forward은 ‘전략적 디자인’과 함께 특히나 제일 성공한 미국 기업인 애플의 혁신적인 진보가 소비자 시장의 창조적인 변화를 어떻게 일으키는지를 다루고 있다.

2012 홍콩에서 열린 디자인 위크(BODW) 기간 동안 바우하우스로부터 독일 디자인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독일 디자인 표준’ 전시회 개장 행사 때 그의 책이 첫 선을 보였다. 동 전시회는 홍콩 디자인관(HKDI)과 독일 에센에 있는 디자인 박물관, 뮌헨에 있는 국제 디자인 박물관인 Neue Sammlung의 공동 주관이다.

본지는 홍콩에서 기조연설이 있기 직전 에슬링거를 만나 그의 책을 한 권 받았다. 그는 우리를 애플의 전략계획 및 스티븐 잡스와의 개인적인 우정을 소개해줬다. 이 기사에서 본지는 80년대 초, 이미지 문서의 프로토타입과 개념, 노트북, 태블릿 등 에슬링거 디자인을 되돌아본다.  


apple snow white 3 ‘macphone’, 1984

“애플 디자인이 컴퓨터 업계 최고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 스티브 잡스

1982년, 애플은 창립 6년째였으며 창업자이자 사장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28세였다.

훌륭한 디자인에 대해 집착하면서 직관적이었던 스티브는 애플 IIe를 제외하고는 애플이 위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외 애플 제품은 IBM PC 제품들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고, 특히 애플 III와 뒤이어 나올 리사 등 모두 못생겼었다.

이전의 애플 CEO였던 마이클 스코트(michael scott)는 모니터와 메모리 드라이브를 포함, 각 제품라인마다 별다른 사내 조직을 창설했었다. 각 조직별로 디자인 책임자를 별도로 가졌고, 원하는 식으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애플 제품에는 각자의 공통 디자인 언어, 혹은 전체적인 통합이 거의 없었다. 본질적으로 나쁜 디자인은 애플 기업이 병환에 걸린 이유이자 증상이었다. 스티브는 애플 브랜드와 제품라인을 혁명화시키고 회사의 미래 궤도를 바꾸며 가전제품과 통신 기술에 대한 생각과 사용을 재편성할 정도의 전략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낳으려면 서로 분리된 기존의 방식을 끝내야 한다고 봤다.


apple snow white 1 ‘tablet mac’, 1982

이 프로젝트를 위한 아이디어는 제록스와 함께 일하던 디자인 사무소인 Richardson Smith의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제록스의 여러 부서와 협력하여 고위의 단일한 ‘디자인 언어’를 만들어서 제록스가 전체 조직에 동 디자인 언어를 구현할 수 있도록 했었다. 공동의 디자인 언어를 만들기 위해 애플 II의 디자이너이자 매킨토시 부의 디자인 책임자였던 제리 마녹(Jerry Manock)과 애플 II 부의 책임자인 로브 제멜(Rob Gemmell)은 애플 본부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디자이너들을 초대하여 인터뷰를 벌였다. 그 결과 후보가 둘 나타났다.

애플은 최종 승자를 선택하여 그의 디자인을 새로운 디자인 언어의 기본 뼈대로 사용할 계획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애플의 계획을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디자인-기반의 전략과 돈보다 혁신을 추구하는 애플의 방식이 애플을 전세계적인 성공으로 이끄는 과정에 속해 있었다.

(글은 design forward에서 인용)


apple snow white 1 ‘sony style’, 1982

(…) 스티브 외 여타 간부들과 많은 대화 끝에 우리는 세 가지의 컨셉을 하기로 결정내렸다.

컨셉 1

컨셉 1은 ‘소니가 컴퓨터를 만든다면?’이었다. 소니와 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아이디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스티브는 소니의 단순하고 멋진 디자인 언어가 좋은 벤치마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소니야말로 하이테크 가전제품을 더 똑똑하고 더 작게, 더 휴대하기 편하게 만드는 모범이라 주장했다.

(글은 design forward에서 인용)


apple snow white 2 ‘americana’, 1982

컨셉 2

컨셉 2는 ‘아메리카나’로 표현돼 있다. 하이테크 디자인과 전통적인 미국 디자인을 표현한 컨셉이기 때문이다. 특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의 깔끔한 Studebaker와 그 외 자동차 회사용 디자인, 그리고 엘렉트롤룩스의 가전제품, Gestetner의 사무용 제품, (자연스럽게도) 코카콜라 병에서 영감을 받았다.

(글은 design forward에서 인용)


apple ‘baby mac’, 1985

컨셉 3

컨셉 3은 내 멋대로 만든 개념이었다. 될 수 있는 한 급진적이면서 도전하기 제일 어렵게 만든 개념으로서, 컨셉 1과 컨셉 2가 증빙된 표현에 기초하고 있으니 컨셉 3은 수수께끼의 종착지로 향한 나의 여행 티켓이었다. 컨셉 3이 승자가 될 것이었다. (…)

(글은 design forward에서 인용)


apple ‘baby mac’, 1985


Apple IIc, 1983


Apple snow white ‘Macintosh studies’, 1982


Apple snow white ‘Macintosh studies’, 1982


Apple snow white 1 ‘Lisa workstation’, 1982


Apple snow white 2 ‘Macbook’, 1982


Apple snow white 2 ‘flat screen workstation’


Hartmut Esslinger

Hartmut Esslinger (1944)

1970년대 중반에 그는 처음 소니 트리니트론과 웨가 제품 작업을 소니와 함께 했었다. 1980년대 초, 그는 애플과 작업을 같이 하기 시작했고, 그 시기 동안 애플의 공통 디자인 전략은 애플을 ‘실리콘밸리의 초기기업’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그는 ‘snow white’ 디자인 언어를 창설했으며, 이 언어는 전설적인 애플 IIc와 매킨토시 컴퓨터에 구현됐으며, 1984년부터 1990년 사이의 애플 디자인을 지배했다. 스티브 잡스가 떠난 이후로, 에슬링거는 애플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넥스트로 잡스를 따라 나섰다.

다른 주요 고객으로는 루프트한자의 디자인 및 브랜드 전략, SAP의 기업 정체성 및 소프트웨어 사용자 인터페이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브랜딩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지멘스, NEC, 올림푸스, HP, 모토로라 및 제너럴 일렉트릭이 있다.

1990년 12월, 에슬링거는 1934년 당시 레이먼드 로위 이래 유일하게 존경받는 생존 디자이너로서 비지니스위크 표지기사를 장식했다.

에슬링거는 독일 칼수루에(Karlsruhe)에 있는 Hochschule fuer Gestaltung의 창립 교수이고 2006년부터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Universität für angewandte Kunst Wien의 집중적 산업디자인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현재 에슬링거는 중국 상해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인 북경덕도교육기구(DTMA, 北京德稻教育机构)의 전략디자인 마스터이다.

hartmut esslinger's early apple computer and tablet designs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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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19일(화요일) 직원용 맥 컴퓨터 여러 대가 해킹을 당했다고 밝혔습니다.

애플과 페이스북은 이른바 ‘워터링 홀’이라는 해킹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북은 금요일 블로그 게시글을 통해, 회사 컴퓨터 로그에서 의심스러운 인터넷 도메인이 발견돼 역추적해 보니 어떤 직원의 노트북이 해킹됐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설명했다.

맨디언트는 상하이에 등록된 해커들의 IP주소를 추적한 결과 최근의 해킹 공격들이 중국 군대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http://kr.wsj.com/posts/2013/02/20/페이스북에-이어-애플-보안망까지-뚫은-해킹-중/

MINISTRY OF INNOVATION / BUSINESS OF TECHNOLOGY

Make mainframes, not war: how Mad Men sold computers in the 1960s and 1970s

Celebs, comics, and—at times—computing itself helped sell the young technology.
by Matthew Lasar – May 20 2012, 10:30am KST


Cover photo for a 1964 brochure for the PDS 1020 Digital Computer

매디슨가의 컴퓨터 홍보 전략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변화하였다. 처음 시기 광고의 주안점은 신뢰성과 속도였으나 1960년대의 팸플릿을 보면 정원 안의 대형 시스템 옆에 패션 모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PC가 시장에 등장하자 주안점은 다시금 바뀌었다. 컴퓨팅은 가족처럼 친밀하게 됐고, 빌 코즈비(Bill Cosby)와 윌리엄 스내처(William Snatcher), 심지어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등장했다. 컴퓨터 역사 박물관의 “컴퓨터 혁명 팔기” 전시회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1983년, 광고의 개척자,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는 자신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광고를 예술의 형태나 오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정보 수단일 뿐이다. 광고카피를 작성할 때 광고가 ‘창의적(creative)’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재밌으니 그 제품을 사고 싶다는 말이 듣고 싶다. 아테네의 웅변가, 아이스키네스(Αἰσχίνης)가 웅변을 하면 사람들은 ‘얼마나 말을 잘 하는가’라 했었다. 하지만 라이벌인 데모스테네스(Δημοσθένης)가 웅변을 할 때면, ‘자, 이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Φίλιππος,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를 탄핵하자!’고 외쳤었다.”

헬레니즘의 이 고사(古事)가 시사하는 사실이 있다. 오길비의 지적이 50년 전 광고를(Mad Men 드라마 시리즈는 그것 외에도 주인공들의 삶이 어땠는지 보여준다)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오길비의 말이 획기적인 광고 아이템을 떠오르게 해주지도 않는다. 너무 유행에 뒤떨어져서 동네 전자제품 판매에 도움이나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1950년대와 1960년대 당시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마케팅을 살펴보자. UNIVAC나 PDP-5로 채운 방 사진이 나오는 3색 광고지를 보고, 설마 오늘 그 기계를 주문하시겠는가? 혹시 수집가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 역사박물관의 훌륭한 전시회, “컴퓨터 혁명 판매하기“덕분에 사업가와 소비자에게 이들 머신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비쳐지도록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전시회에 따르면 컴퓨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상당히 변화하였다. 첫 10년 동안 광고와 팸플릿 업체들은 주로 엔지니어들의 관심을 끌려 노력했다.

“속도와 효율성, 경제성, 신뢰성”이야말로 표준적인 유행어였다. 그러나 컴퓨터가 더 작아지고 빨라지며 강력해질수록, 광고는 컴퓨터를 계산기가 아닌 뭔가 더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키 펀치 운영자로 컴퓨터를 처음 돌리는 여성 인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프로그래머와 컴퓨터 구매자를 그 다음에 배치하는 팸플릿도 있었다. 또한 컴퓨터 광고는 거의 유토피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취했었다. 1976년 IBM의 광고를 보자. “원래는 원자력 시대이어야 했습니다만, 이제는 컴퓨터 시대입니다.”

컴퓨터 마케팅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메시지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Well endowed

프레스퍼 에커트(Presper Eckert)의 UNIVAC과 같은 1950년대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는 크고 비쌌다. 방 전체, 혹은 층 전체가 필요할 정도였기 때문에, 주안점은 기업 회계 처리 능력이었다. 예를 들어서, 1958년 팸플릿을 보면 RCA 501은 “속도에 비해 낮은 노동비용과 경제성, 정확성과 함께 이러한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사업 전반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한다.

팸플릿의 사진을 보면 메인프레임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오히려 장점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지의 글 또한 “사실에 대해 재능이 있는 중역 분들을 지향합니다”라 쓰여 있다. 사진에는 양복을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전체 15개의 패널을 가진 RCA 501 프레임을 단일 콘솔 상에서 쉽게 다루고 있는 모습이 나와 있다.


A man and his mainframe: the RCA 501, circa 1958.

UNIVAC 파일시스템UNIVAC의 일반적인 운영을 설명하는 이미지도 위와 유사하다. 여자 직원들이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모습도 있다.

UNIVAC 팸플릿은 묻고 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산업과 거래와 관련된 지루하고 힘든 계산 작업입니까? 아니면 복잡한 과학, 수식 관련입니까? 전통적인 해결 방식으로는 비용이 너무 높아서 문제를 해결하기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물론 팸플릿에는 걱정하실 것 없다고 쓰여 있다. 그들은 기억하기 쉬운 수치를 사용하여 예산을 요약함으로써 프로그래밍 비용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1955년, Bendix G-15 컴퓨팅시스템의 팸플릿 첫 페이지를 보자. “매월 천 달러가 안 나간다면 컴퓨터는 당신께 무엇을 사줄 수 있을까요?” 답변은 “아주 많다(PLENTY)”라며 대문자로 쓰여 있고, 어딘가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운영하고 있는 직원들 사진이 붙어 있다.

팸플릿을 읽다 보면 Bendix에 대한 몇 가지 별도의 사실도 당연히 발견할 수 있다. 한 달 $1,030가 리스(대여) 가격(판매가는 $14,900까지 ‘저렴해진다’)이다. 관심 있는 고객에게 그림을 그려주기 위해 팸플릿은 다음과 같은 처리 시간 비교를 올려 놓았다.

BENDIX G-15 SPECIFICATIONS
Execution Times
Add and subtract:
Single precision—0.27 msec.
Double Precision—0.54 msec.
Multiply and divide:
Single precision—2.16 to 16.4 msec.
Double precision—2.16 to 32.8 msec.

1950년대 컴퓨팅의 가격을 고려해 보면, 프로세서 사양과 속도에 대해 주의깊게 표시해 둬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세한 정보 제공은 10년이 흐르면서 점차 옅어진다.

New levels of responsiveness

메인프레임이 더 작아지고 가격도 적당해지면서 광고의 조류도 바뀌었다. 시즐 광고, 그러니까 스테이크를 팔 때 지글지글 소리 광고를 내세우는 식이었다. 팸플릿 사진은 이제 시스템을 외부에 갖다 놓았다. 물론 여자 운영자와 프로그래머의 사진이 계속 붙어 있기는 했지만 장식적인 의미로 여자 모델을 사용한 경우도 생겨났다.

아래 EAI 640 디지털 컴퓨터 시스템 사진을 보시라. 640은 팸플릿에 따르면 “균형 잡힌 컴퓨터”였다. “가격과 성능,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규모성과 경제성 간의 올바른 균형”을 잡았다는 의미다. 흰색 옷을 입고 일광욕을 하는 여자와 분수대, 왼쪽 아래의 꽃이 조화로운 시스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Sky above; hardware below: a 1966 outdoors portrait of the EA 640 Digital Computing System.

아마도 주안점은 뭔가 “새로운(outside of the box)” 느낌을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팸플릿에 따르면 EAI는 “전통적인 컴퓨터 설비 디자인과 사용 컨셉 이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새로운 애플리케이션과 비범한 시뮬레이션, 컴퓨팅의 수학적인 분석과 프로그래밍 기술, 시스템, 로직 디자인, 새로운 전자부품 개발을 연구, 개발중”이라고 한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범용 디지털 컴퓨터 HITAC-10 팸플릿은 컴퓨터를 짙은 청색 하늘 아래 과감하게 놓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사진은 특별히 뭘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젊은 여자가 기계 옆에 있는 모습이다. 다음 사례를 보자. 인어가 디지털 테이프를 들고 있다. 인어가 아이를 들고 있는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다. Beckman 포트란-언어에 기반한 시스템의 광고이다.

메시지가 무엇일까 Beckman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컴퓨터 양측 모두를 위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었다. 동 컴퓨터의 다른 광고기획사는 인어이니 뭐니를 버리고 헐리우드/라스베가스 스타일의 이미지를 택했다. 1966년의 운영체제 광고는 아래와 같다.


A brochure for the Burroughs 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 “A new level of computer responsiveness.”

아니다. 디트로이트의 도로에서 최신 셰비, 혹은 Ed Sullivan 쇼에 나타나는 디나 쇼오(Dinah Shore)가 아니다. 포트란이나 해군 수학자인 그레이스 호퍼(Grace Murray Hopper)당시 소개된 COBOL 언어를 돌리는 Burroughs Data Processing System의 광택지 광고다. 팸플릿에는 “새로운 수준의 컴퓨터 반응성”이라 적혀 있다.

Burroughs가 앞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1969년(아폴로 달착륙 우주선이 나온 해이자 스타트렉 첫 번째 에피소드가 나온지 3년 후이다), UNIVAC은 멀리 떨어진 달표면의 9400 시스템 광고를 내보냈다.


Welcome to the Moon: a UNIVAC 9400

“UNIVAC 9000 시리즈(9200-9300-9400…) 그리고 더 나옵니다.” UNIVAC 시리즈가 몇 가지 더 나올 기세였지만, 그 이후의 미래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였다.

Against technophobia

PC, 혹은 1970년대 어느 때인가 불렸던 “마이크로-컴퓨터”의 등장은 마케팅의 풍경을 급속도로 바꿔 놓았다. 갑자기 컴퓨터 광고에 알려져 있지 않던 이미지가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레저, 부모님과 아이들이 IBM PC, 그리고 거의 잊혀진 자매품인 IBM PCjr의 광고에 등장했다. “모두를 위한 쉬운 컴퓨터”가 모토였다.

아래 그림을 보시자. IBM PCjr는 너무나 쉬워서 찰리 채플린도 돌릴 수 있을 정도다. 컴퓨터 역사박물관이 관찰했듯, 가정적이고 친숙한 유명인사를 광고에 넣은 회사가 IBM만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토크쇼 사회자인 딕 카벳(Dick Cavett)은 애플 컴퓨터 광고에, 빌 코즈비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광고에, 윌리엄 섀트너(William Shatner)는 코모도어, 앨런 알다(Alan Alda)는 아타리 광고에 나왔다.


The IBM PCjr, beloved by the whole family, plus Charlie Chaplin.

여자들이 컴퓨터를 구매하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여자들은 광고에서 장식물의 역할을 더 맡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재무관리자이고 프로그래머였으며, 사업체의 임원이었다. IBM PCjr 팸플릿을 보면 가정용 스프레드쉬트를 설정하는 여자가 나온다. “가계부를 정리하려 앉았을 때 쥬니어에게 일을 시키세요. 쥬니어가 있으면 회계학이나 장부 경험이 없어도 됩니다. 자금 관리가 얼마나 쉽고 정확해지는데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ATS-960 광고를 보면 PC 모듈과 부품, 모듈 테스팅을 다루고 있는 오퍼레이터의 모습이 나온다. “ATS-960 시스템 프로그래머와 오퍼레이터 훈련은 텍사스 휴스턴의 TI가 무료로 제공합니다. 구매한 곳에서의 훈련도 선택 가능합니다.”


From left: Carrying an Osborne 1; running a Texas Instruments ATS-960; setting up a spreadsheet on an IBM PCjr

PC의 개념을 확장시킨 마케팅도 있었다. 가방 크기의 오즈본(Osborne) 1 광고 “개인 사무용 컴퓨터”를 보자. 첫 번째 페이지를 보면 거리에서 컴퓨터를 갖고 다니며 행복해 하는 사장님이 나온다. 그의 넥타이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지만 PC치고는 여전히 좀 커 보이는 컴퓨터가 오즈본이었다. 그래서 팜플랫은 O1을 “기술에 두려움을 가진 분”을 위한 컴퓨터로 묘사했다.


Advertisers tried to make lugging an Osborne 1 micro-computer look easy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유용한 형태로 기술을 전달하면 두려움을 잊을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세요. 디지털 하이파이,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커피 머신, 자동화된 전화기가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은 프로그램 작성법을 배우고 있고, 자동차 안에 있는 컴퓨터는 가솔린이 얼마나 남았고 자주 가는 곳이 어딘지를 알고 있습니다. 기술 수단을 이해하신다면 이것은 진보입니다. 기술 공포증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즈본은 약간의 두려움을 메시지에 넣기도 했다. 오즈본은 “앞서나가고 싶어하는 모두를 위한 컴퓨터”이자 “뒤쳐지기 싫은 분을 위한 컴퓨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1983년에 나온 Apple PC도 비슷한 메시지이되 좀 더 부드러웠다. “세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이제 아셨으니 1등으로 접하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Small was beautiful

개인용 컴퓨터가 시장을 지배하자 대형 시스템 광고 또한 제품 크기를 줄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라도 줄이려 했었다.) Control Data Corporation 스토리지 드라이브의 1970년 광고를 보면 체스판의 관점으로 네트워크로부터 운영을 하는 오퍼레이터의 사진이 들어 있다.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있던 Tymeshare라는 회사는 한 층 더 나아갔다. Decision Support System을 Go라는 일본 게임과 시각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IMSAI 8080은 “다루기 쉬운 마이크로컴퓨터 시스템”이었다. (어디가 다루시 쉬운지 광고는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형 시스템은 불행히도 조류를 역행하고 있었다. 1970년대의 메시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였다. 그러나 광고주들은 자기 제품을 과거의 대형 머신과 시각적으로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카세트테이프로 돌리는 Wang 2200의 광고는 이러하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이 새롭고 주목할만한 계산기가 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A 1974 ad for the HP-65 programmable pocket calculator; note the mainframe in the background.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주머니용 계산기, HP-65의 자랑스러운 팸플릿을 보자. “이분은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작은 ‘컴퓨터’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메시지를 가정에게도 전달시키기 위해, 광고의 앞면에는 1950년대의 메인프레임 앞에 서 있는 한 엔지니어를 보여주고 있다. Zilog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는 아예 만화책, “Captain Zilog”을 만들었다. 주인공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복잡한 컴퓨터망을 가진 시간과 공간의 정복자, Dibolicus와 싸운다.”

Captain Zilog은 감명받지 않는다. “Zilog은 이름이고 마이크로프로세싱은 나의 게임이다!”고 그는 Zilog Z8000 칩을 휘두른다.

Dibolicus는 비웃는다. “그렇게 작은 것 갖고? 날 웃게 하지 마라!”


Captain Zilog and his nemesis, Diabolicus, comic book creations of the Zilog Microprocessor Company, circa 1979

누가 마지막에 웃는지는 당연히 아시리라. 1976년, 컴퓨터 시대임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그 시대를 상징하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IBM 광고를 보면 이미 기업이 선호하는 광고전략을 마스터했다. IBM의 컴퓨팅 역사는 빅블루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놓고 다른 회사는 모조리 다 제외시켰다. (2011년, IBM은 실제로 자신이 PC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1976년 IBM 광고의 시작을 보시라.
“IBM의 데이터프로세싱 시장 진입과 그에 잇따른 컴퓨터 혁명의 이야기가 다음 페이지에 나옵니다.” 단 애플 광고주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시고 자신만 다루는 것에 별 의도가 없었다. LISA용으로 나온 1983년 광고를 보자.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를 발명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이 20분이면 배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200년이 걸렸습니다.”

리스 비용을 설명하는 Bendix 팸플릿 이후로 시장은 기나긴 길을 거쳐 왔다. 시간을 더하고 빼면서 말이다. LISA 광고를 보자. “이미 어떻게 사용할지 아실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진보했습니다.” 이 주장은 근시일 내의 미래 표준으로 실현됐다.

Matthew Lasar / Matt writes for Ars Technica about media/technology history, intellectual property, the FCC, or the Internet in general. He teaches United States history and politics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ta Cruz.

Make mainframes, not war: how Mad Men sold computers in the 1960s and 1970s | Ars Technica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RoughlyDrafted Magazine

Daniel Eran Dilger in San Francisco

Apple’s 15 years of NeXT

December 21st, 2011

15년 전, 애플은 넥스트 소프트웨어 인수를 발표했었다. 결국 20년 전 공동창립했던 회사로 스티브 잡스를 복귀시킨 인수였다.

애플의 넥스트 인수 이후 15년이 흘렀고, 애플은 이제 완전한 기업으로서 재탄생하였다. 넥스트 출신의 간부진과 엔지니어를 포함하여 잡스가 이끄는 새로운 경영팀이 완전히 새롭게 애플을 바꾸는 동시에 넥스트의 신기술과 방향을 얻어내면서 말이다.

NeXT before Apple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기 이전, 넥스트 소프트웨어는 1993년 하드웨어 사업을 갑자기 철수한 이래 자신의 진보적인 운영체제 기술을 어떻게 판매할 수 있을지 힘든 해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넥스트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넥스트 컴퓨터 시장을 충분히 확보하는데 실패한 바 있었다.

소프트웨어 회사로서 3년을 거친 넥스트는 선(후에는 HP)과 파트너쉽을 맺어 오픈스텝(OpenStep) 계획을 발표했다. 오픈스텝은 넥스트스텝 운영 및 개발환경상에 구축해 놓은 개방형 스펙으로서, 선의 솔라리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NT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영체제상에서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선과 HP 모두 결국 넥스트와의 파트너쉽에서 물러나게 된다. 선은 자바에 집중하고 HP는 애플과 IBM의 탈리전트(Taligent)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탈리전트는 넥스트 기술을 그대로 복제한 기술 프로젝트였다.


넥스트는 또한 넥스트스텝의 객체지향 개발툴로 다이나믹한 웹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해 사용하는 툴인 웹오브젝트(WebObjects)도 개발했다. 잡스는 웹오브젝트를 넥스트의 핵심 자산으로 여겼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가 점차 지배해가고 있는 시장에서 써드파티 대안형 운영체제를 팔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웹오브젝트를 택했기 때문이다.

Apple before NeXT

1996년, 애플은 이제 윈도 외에 살아남은 유일한 주요 컴퓨팅 플랫폼이었고, IBM의 OS/2와 선의 솔라리스, BeOS, 넥스트스텝과 같은 대안형 라이센스 OS와는 달리 직접 매킨토시 하드웨어를 판매했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안형 라이센스 OS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인 라이센스 계약에 종속적인 PC 시장에서 충분한 수의 구매자와 개발자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다고는 해도, 애플의 상황 역시 좋지 않았다. 원래의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현대화시키려는 애플 스스로의 노력은 실패했고, 컴퓨터 업계에서도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애플은 IBM(후에는 HP)과 연합하여 넥스트스텝-류의 시스템인 탈리전트를 개발하고, 스스로도 코플랜드 운영체제를 시도했지만 그 어떠한 노력도 실제 제품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애플은 아직 실험적인 운영체제였지만 매킨토시 라인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Be와 협상을 시작했다. 단 BeOS가 맥 하드웨어에서 이미 돌아갈 수는 있었지만, 기존 맥오에스의 대체용으로 팔 수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고 출력 아키텍쳐와 같은 핵심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애플을 되살리기 위해 영입됐던 당시 애플 CEO인 길 아멜리오(Gil Amelio)는 넥스트를 조사했다. 급속도로 나이를 먹어가는 맥오에스를 대체할 완성되고 입증된 데스크톱 OS로서, 또한 관련 개발툴인 웹오브젝트와 적당한 기업시장을 갖고 있는 곳이 넥스트였다.

당시 맥 사용자들은 넥스트보다 Be에 더 친숙했다. BeOS의 소비자/취미가를 향한 집중도 그렇지만 잡스가 애플을 떠난 이후 애플이 넥스트의 소비자시장 진출을 계약으로 막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잡스는 애플을 나갈 당시 주요 애플 엔지니어를 같이 데리고 나갔었다. 하지만 아멜리오는 넥스트를 확신했다. 1년 정도면 “랩소디” 전략상 넥스트스텝을 돌리는 맥을 출하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

Apple + NeXT

1996년 12월20일, 애플은 4억 2,900만 달러의 현금과 150만 주를 잡스에게 주고 넥스트 인수를 발표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더군다나 잡스도 인수 이후 애플에 고문으로 들어왔고, 넥스트의 웹사이트는 애플의 인수를 “합병”으로 묘사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지배받는 개인용 컴퓨터 업계는 넥스트 인수 후에도 애플을 주요 업체로 취급하지 않았다. 애플이 재빠르게 넥스트스텝 운영체제를 새로운 맥오에스로 만들고, 옐로박스 레이어로 오픈스텝을 전환시키겠다는 전략을 발표되자, 심지어 넥스트의 기존 고객들조차도 애플을 피했었다.

특히 웹오브젝트를 자사 온라인스토어에 채용하고 있던 델은 넥스트와의 기업관계를 청산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여 새로운 온라인스토어를 구축했다. 선과 HP 또한 넥스트와의 오픈스텝 파트너쉽을 포기했다. 결국 넥스트 기술에 대한 애플의 지원이 상업적으로 지속 가능하리라 본 기업은 거의 없었다.

애플은 보다 심각하고 복잡한 유닉스-기반 운영체제의 채택을 맥 사용자들이 주저하자, 목표를 바꿨다.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어도비와 매크로미디어,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맥 개발사들이 옐로박스에 대해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들은 기존 코드에 최소한의 변화만 거쳐도 돌릴 수 있는 뭔가 현대적인 기술을 애플이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완벽한 파트너로 보였던 애플의 넥스트 인수가 엉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애플은 하드웨어 업체와의 맥오에스 라이센스 계약에 묶여 있기도 했다. 맥오에스 라이센스는 클론 업체들이 매상을 올리면서, 기존에 의도했던 맥 시장 확장보다는 OS만 줘버리고 하드웨어 이윤을 잃는 효과를 가져왔었다.

애플은 또한 양판점에서 싸구려 PC 옆에 아무런 차이 없이 애플 컴퓨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경쟁력이 분명한 제품이 없으면 팔 방법이 없으며, 개발자들을 끌어모아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 앞이 안 보이던 때였다. 매킨토시의 전망은 꽤 암울해 보였다.

매킨토시 외 유일한 주요 제품으로는 뉴튼 메시지패드가 있었다. 태블릿 컴퓨터였던 뉴튼은 훨씬 단순하고 저렴한 팜 파일럿(Palm Pilot)에게 추월당하고 있는 중이어서 애플의 관심과 노력이 상당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Jobs turns Apple around

넥스트 인수 다음 날, 잡스는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10년째 되면서 매킨토시에 의지해온 산업이 느리게나마 맥의 혁명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베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며, 애플보다 이런 혁신을 더 잘할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컴퓨터 산업을 애플 말고 누가 이끌었습니까? 처음에는 애플 II, 그 다음에는 매킨토시와 레이저라이터를 선보인 곳이 애플입니다. 이번 합병을 통해 넥스트의 진보적인 소프트웨어와 애플의 매우 거대한 하드웨어 플랫폼과 마케팅 채널이 만나 기존 플랫폼을 혁명적으로 뛰어 넘고 향후 10년 이상 애플과 업계의 따라쟁이들을 부추킬 것입니다. 애플에 대해 대단히 깊은 감정을 지금도 갖고 있고, 덕분에 애플의 미래를 구성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처음, 애플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던 잡스는 1997년 7월, 여름 맥월드에서 자신이 아멜리오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임시 CEO를 맡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사실 아멜리오 축출을 이끈 장본인은 잡스였고(1997년 맥월드 엑스포에서는 둘 다 모습을 드러냈었다), 아멜리오가 내린 결정사항들을 곧바로 뒤엎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아멜리오가 분사시켰던 뉴튼도 들어 있었다. 잡스는 뉴튼을 새로이 애플의 산하 부서로 편입시켰었다. 당시 잡스는 애플 제품 라인업을 단순화시켰다.


잡스가 없앤 것 중 큰 건 중에는, 진보기술그룹(Advanced Technology Group: ATG)이 있다. 이 그룹은 QuickTime TV와 QuickDraw 3D, OpenDoc, HotSauce, Macintalk 음성인식, 뉴튼 필기인식 등 돈을 전혀 벌지 않는 제품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낸 곳이었다. 잡스는 또한 클론 업체와의 계약을 종료시켜서 매킨토시의 운명을 애플이 통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러가지 시험삼아 하는 프로젝트를 없애고, 뒤얽힌 영업망의 강화를 위해 컴팩으로부터 팀 쿡을 영입한 잡스는 웹오브젝트를 사용하여 델이 포기한 것과 유사한 온라인스토어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애플은 사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개별사양”으로 맥을 팔 수 있게 됐다.

또한 잡스는 여러가지 매킨토시 제품도 없애고 기본적으로 타워형과 노트북 G3만을 남겼고, 여기에 새로운 아이콘으로서 아이맥을 추가시켰고, 1999년에는 소비자용 아이북 노트북도 선보였다. 새 하드웨어를 발족시키면서 잡스는 클래식 맥오에스에도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넥스트스텝에 기반한 맥오에스텐을 작업하면서도 코플랜드 프로젝트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살려서 맥오에스의 업데이트를 행했기 때문이다.


한편 잡스의 애플은 맥 판매를 증대시키기는데 집중했다. 애플 고유의 소매점을 짓기 시작하면서 주요 소프트웨어 개발사를 인수하여 프로 앱 패키지를 만들고, 아이라이프와 아이웍 등 소비자용 제품도 만들었다.

Apple goes open

애플 고유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더해 넥스트-중심적인 개발팀은 맥오에스텐의 코어 유닉스 OS 파운데이션을 다윈이라는 이름의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애플 자신의 개방형 코드와 더불어 애플은 OpenGL(퀵드로 3D를 대신한다)과 같은 공개사양의 채택으로부터 CUPS(맥오에스텐과 무료 유닉스, 리눅스 배포본이 사용하는 개방형 출력 아키텍쳐)의 매입 및 지속적인 관리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프로젝트의 오픈소스 개발에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애플은 또한 오픈소스 웹킷 프로그램을 토대로 고유의 사파리 웹브라우저를 만들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로부터 웹의 권력 균형을 오픈소스 쪽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넥스트스텝의 BSD 유닉스 코어에 대한 오픈소스 전략과 더불어 웹킷은 제일 유명한 웹브라우저 엔진이 됐고 특히 휴대용 기기에서는 유일한 주요 브라우저에 올라섰다.

애플은 GNU/Linux의 GNU 컴파일러 컬렉션 개발 툴체인(toolchain)을 진보적이고 새로운 LLVM 컴파일러 아키텍쳐로 완전히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LLVM은 어배너-섐페인(Urbana–Champaign)의 일리누이 대학교에서 개발중인 아키텍쳐로서 BSD 스타일의 오픈소스로 제공됐고, 애플은 여기에 LLDB와 Clang을 추가시켰다. 이로써 애플은 유닉스-류 소프트웨어의 미래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OpenGL 지지와 함께 애플은 GPU 하드웨어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목적의 고속처리를 돌리기 위한 OpenCL 사양을 만들어냈다. OpenCL은 그래픽 업체의 지지를 받기 위해 중립적인 중개자의 역할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애플은 한편 인터넷 파일과 달력, 주소록과 연동하는 공개표준으로서 WebDAV와 CalDAV, CardDAV의 발전에 주된 역할을 했다.

추가적으로 애플은 개방형 오디오재생을 자가 고유 표준으로 바꾸려 시도했던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계획을 물리쳐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MP3와 AAC, MPEG H.264 오디오 스트리밍 및 비디오 인코딩, 배포세계를 열었다. 마찬가지의 노력으로 어도비 플래시의 스트리밍 비디오 장악노력도, 애플은 시장력을 동원하여 플래시의 통제를 깨고 비디오를 모두에게 열어주었다.

Jobs’ golden decade of Apple

넥스트를 인수한지 5년이 지난 2001년, 애플은 최초의 소매점을 열고 맥오에스텐의 첫 번째 빌드를 출하했으며, 아이포드를 발표하여 소비자 가전 시장으로 진입하는 강수를 뒀다. 아이포드 자체는 애플 컴퓨터사에서 ‘컴퓨터’를 빼버리는 역할을 할 정도로 애플의 사업에 지극히 중요했다.

잡스는 여러가지 디바이스의 중심에 아이맥을 놓는 디지탈허브 전략을 제시했다. 맥오에스텐의 코어 기반을 개선하고 하드웨어를 끊임 없이 진보시키는 애플이 2000년대 내내 채택한 전략이었다.

2000년대 중순, 잡스는 PowerPC에서 인텔로의 이주를 단행했다. 이로써 맥 사용자도 윈도를 돌릴 수 있었고, 덕분에 윈도와 계속 어울려야 하는 기업 사용자 등도 맥을 사용할 여지가 생겨났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애플은 태블릿 컴퓨터 개발에 돌입하였고 결국 2007년에는 아이폰이라는 결과를 냈다. 아이폰은 미니 버전의 맥오에스텐으로서 iOS라 불리었고, 매킨토시 자체보다도 더 큰 규모로 자라났다.

2010년, 잡스는 대성공을 거둔 아이폰이 닦아 높은 길을 통해 태블릿 컴퓨터인 아이패드를 적절한 가격에 선보였다. 아이폰의 경쟁은 심해졌지만 아이폰은 시장을 깊게 형성시켜서 기존 업체를 모두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제일 잘 팔리는 휴대폰 중 하나가 됐다. 예전에 아이포드가 그러했듯 아이패드는 자신의 시장을 크게 형성시켰다. 이전까지는 어느 경쟁자도 형성시키는데 실패했던 시장이었다.

2001년부터 2010년 사이 애플 주가는 주당 $10에서 $315로 뛰어 올라 전세계에서 제일 가치가 높은 기업이 됐으며, 수입은 물론 이윤도 제일 많이 벌어들였다. 애플은 컴퓨팅에만 한정돼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 아이포드와 아이튠스에 연동되는 음악과 영화시장을 탈바꿈시키고 휴대폰 업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이제 남아 있는 유일한 경쟁자는 스스로를 무료로 푸는 오픈소스 프로젝트밖에 없다), 최초로 성공한 태블릿인 아이패드를 통해 새로운 휴대기기 시장을 선보였다.

A world without Apple’s NeXT

15년 전 인수했던 넥스트가 없었다면 잡스의 주도와 창조성, 비전도 없었을 것이다. 애플 컴퓨터는 90년대에 인수되거나 어쩌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며, 매킨토시는 아미가와 동급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개인용 오디오 시장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와 PlaysForSure 시스템의 지배를 계속 받으며 음반사의 변덕 하에 CD로 굽는 것만 해도 제한이 여전했을 것이다.

맥오에스텐이 없었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여전이 윈도 2000 버전만 내놓았을 것이며, 윈도 비스타나 윈도 7, 그리고 진보적인 GPU 주도의 그래픽엔진도 없었을 것이다. 맥오에스텐의 쿼츠 컴포지팅이라는 애플의 개척적인 노력의 산물이 GPU 위주의 그래픽엔진이었다.

아이폰이 없었다면 사용하기 쉬운 터치스크린 휴대기기도 안 나오고, 그 대신 아이폰 이전의 안드로이드와 유사했을 것이다. PalmOS와 윈도모바일, 블랙베리의 버튼-중심적인 휴대폰만 있을 것이며 4년 전에 그랬던 바 처럼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블릿 또한 안 나왔을 일이다. 맥북에어와 같은 울트라북에도 딱히 노력이 없었을 테고, 그저 여러가지의 저렴하고 저품질의 넷북만이 나와 있을지도 모를 법 하다.

노키아와 마이크로소프트, 닌텐도, 소니, 팜, HP, 어도비 등은 도전받지 않은 채, 개선에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데스크톱 플랫폼을 위한 저가형 앱스토어를 나서서 만들 일도 없으며, 구글은 여전히 웹브라우징만 할 수 있을 저가형 노트북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들은 현재 지위가 하락중이며 기술업계에서 자신이 어째서 실패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실패를 멈출 수 있을지를 모르고 있다.

What’s next for Apple

2011년, 세상은 애플과 넥스트의 창립자를 잃었다. 잡스는 자신의 비전에 멀어져 있던 애플을 고쳐냈고 기술과 인문 사이의 교차점에서 위대함을 다시 이끌어낼 수 있는 팀을 만들어냈다. 잡스는 애플 경영팀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업체에서건 추종을 받을만한 분명한 업적을 남기고 떠났다.

애플은 기업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 전세계 소매점도 잘 돌아가고 있고 모바일과 데스크톱 제품에서 강력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풍부한 현금으로 최첨단 연구개발도 벌일 수 있다. 15년 전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다.

그러나 현재의 애플은 자신의 실패와 실수를 알아볼 능력도 갖고 있다. 지난 15년간 애플은 설사 전략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돈을 잃었던 난관을 돌파해 왔다. 엑스서브와 엑스서브 RAID, Xsan으로 서버시장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단순히 훨씬 저렴한 대안만 제공하는 것 가지고서는 손수 고객서비스와 지원을 요구하는 시장을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애플은 잘못됐음을 알고 물러나는 것 또한 올바름을 알고 성공을 거두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애플은 마찬가지로 주류시장을 공략할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는 선에서 프로앱스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소수의 전문가 사용자들은 특별한 개발사가 더 잘 보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 경영진은 애플이 뭘 안 할 줄 안다고 매번 되풀이해 말하고 있다.

딱 15년 전의 애플은 아니라고, 맞다고 말할 수 없었으며 계획을 실천한다거나 투자자에게 자신을 믿어달라 확신을 주지도 못했다. 지난 15년은 창립자를 재발견하여 그의 비전에 따라 업계를 재편성한 놀라운 기간이었다.

Daniel Eran Dilger is the author of “Snow Leopard Server (Developer Reference),” a new book from Wiley available now from Amazon as a paperback or digital Kindle download.

Apple’s 15 years of NeXT — RoughlyDrafted Magazine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The New York Times에 따르면, Apple은 몸에 착용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 중에 있는 것 같다며 전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소수의 인원이 참가하여 진행되며, 장치의 개념화와 제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이런 착용가능한 장치를 통해 Siri를 컨트롤, 곡면 유리가 채용 된 손목에 착용 가능한 iPod들이 아이디어로 논의 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Google도 입을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http://bits.blogs.nytimes.com/2011/12/18/wearing-your-computer-on-your-sleeve/

컴퓨터 역사 박물관은 스티브 잡스의 온라인 전시회를 런칭 했습니다.

First, NeXT, One More Thing를 주제로하여 게제되었습니다. 또한 희귀 영상들이 다량 포함 되어 있습니다.

http://www.computerhistory.org/highlights/stevejo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