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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튼 커쳐는 이 역활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매우 어려운 일이 였다고 전하며, 스티브를 존경하는 마음과 그의 삶을 묘사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며 전하고 있습니다.

-아래 전문
Choosing to take this role was very difficult. I greatly admire the work that Steve Jobs has done and have many friends and colleagues who knew and/or worked for Steve. So, when I read a screen play that was not entirely flattering to his character I had great reservations.  But I chose to take on the role for a couple reasons.

1. I care. As I read the script I had a knot in my stomach. I imagined actors playing the role and not connecting to the love that went into some of the seemingly irrational decisions that Steve sometimes made. If this film becomes an enduring memory, of a man I admire, I wanted to ensure that it was portrayed by someone who cared about his legacy and took the time to represent him in a way that people who were close to Steve felt to be authentic.

2. The idea of playing the role terrified me. I’ve found that the greatest rewards I’ve received in my life have come from jumping at the opportunities to take on things that scare me. The chance to portray someone who not only lived but who is still very relevant and alive in the zeitgeist seemed to be a once-in-a-lifetime challenge.

3. It was a perfect convergence in my craft and my interests. I’ve spent the last 5 years working with early stage technology companies as an investor and advisor. Whenever you take on a role, it’s like a crash course in the subject matter of the film. So while researching the role I was able to spend countless hours studying tech design, product, and history. It also afforded me the opportunity to meet with several of Steve’s peers who happen to be icons of the tech world.

4. I loved what the film stands for. I think with the state of the global economy inspiring young people to build things is vital. I wanted to remind entrepreneurs that Steve Jobs wasn’t always “Steve Jobs”, that he struggled, that he failed, and that he rigorously persevered to build something great to improve other people’s lives.

http://www.quora.com/Jobs-2013-movie/Why-did-Ashton-Kutcher-choose-to-play-Steve-Jobs-in-the-upcoming-movie-Jobs


Connie Guglielmo, Forbes Staff
I cover the people and technology driving Silicon Valley
FORBES | 10/03/2012 @ 6:00 |348,395 views

Untold Stories About Steve Jobs: Friends and Colleagues Share Their Memories

This story appears in the 2012/10/22 issue of Forbes.

무엇 때문에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PC와 뮤직 플레이어, 전화기와 태블릿을 재발명했는지, 그리고 자기 인생에 대해 전기작가와 이야기를 나눈 덕택에 우리는 스티브 잡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들어보신 적이 없는 “스티브” 이야기는 대단히 많다. 56세의 나이로 10월5일 타계한 잡스의 서거 1년 후, 기술 업계에서 제일 잘 알려진 선각자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동료들이 알려 주었다.

Hide The Porsches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랜디 애덤스(Randy Adams)는 애플로 축출당한 후, 잡스가 새로이 만든 컴퓨터 회사, 넥스트에 오라는 스티브 잡스의 제안을 원래 거절했었다. 그 때가 1985년이었고, 애덤스는 자신이 원래 만들었던 소프트웨어 제작 회사를 매각한 직후였기 때문에 일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애덤스의 전화 자동응답기에는 잡스의 소리가 들어 있었다. “날려버리고 있군요, 랜디. 이건 인생의 기회에요. 그런데도 당신이 날려 버리고 있어요.” 애덤스는 다시 생각해 봤다.

회사를 매각한 후 애덤스는 그 일부를 갖고 포르셰 911을 구매했었는데 마침 잡스도 같은 차를 갖고 있었다. 자동차 문이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사이에 두 세 대 정도의 공간을 비우고 나란히 주차하곤 했었다. 어느 날 잡스가 애덤스의 자리로 와서 자동차를 옮겨야겠다고 말했다. 애덤스는 왜냐고 물었다.

“랜디, 포르셰를 숨겨야 해요. 로스 페로가 와서 우리 회사 투자를 생각할 텐데 우리가 돈이 많은 것처럼 비쳐지면 안 되지.” 그래서 그들은 포르셰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있던 넥스트 사무실 뒤편으로 옮겼다. 페로는 1987년 2천만 달러를 넥스트에 투자했고, 그 후 넥스트 이사가 됐다.

애덤스는 빌 게이츠가 넥스트에 회의하러 왔을 때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1986년 가을, 로비에서 게이츠 씨가 도착했다고 위층의 잡스 자리로 전화했다. “잡스 자리가 제 자리에서 보였어요. 별로 바뻐 보이지 않더라구요.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게이츠 보고 올라오라 하지도 않았어요. 사실 로비에 게이츠를 한 시간 정도 방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경쟁심의 발로랄까요.”

애덤스에 따르면 오히려 넥스트의 엔지니어들이 게이츠가 온 김에, 게이츠에게 몰려가서 질문들을 던졌다고 한다. “재밌었어요. 한 시간 정도 지나고 게이츠랑 얘기하고 나니까 드디어 스티브가 그를 올라오게 하는 전화를 했습니다.”

애덤스는 넥스트 웍스테이션에서 쓰이는 광드라이브 때문에 잡스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넥스트를 나왔다고 한다. 그의 생각에 광드라이브는 너무 느렸다. 그 후, 잡스는 애덤스에게 넥스트용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라며 Sequoia Capital로부터 200만 달러의 투자를 받도록 해줬다. 하지만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 잡스는 애덤스에게 넥스트가 웍스테이션 사업을 그만 두고 소프트웨어에 집중하기로 했다면서 미리 알려주려 한다며 전화를 했다.

“하드웨어 가격이 계속 떨어져서 이제 컴퓨터를 일반 범용 제품이라 생각한다 말하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그럼 PC를 팔지 그래요, 라고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잡스는 ‘PC를 파느니 차라리 개를 팔지.’라 답했었어요.”

애덤스는 넥스트 시절의 잡스에 대해 많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채식주의자인 잡스가 하루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엔지니어들 사이를 지나쳤다. “오, 구워진 동물 살의 냄새라니, 이 얼마나 좋은가!”하면서 말이다. 1986년 잡스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는 직원들에게 $100씩 나눠줬다. 애덤스가 알려준 일화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일을 망치거나 잡스가 안 좋아하는 뭔가를 한 직원들에게 잡스는 항상 “스스로를 해고하시오”라 말했다고 한다. 정말 그럴 요량이었을까? “글쎄요. 해고통지문을 공식적으로 받지 않는다면야 농담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잖았을까요.”

애덤스는 넥스트를 나온 이후 어도비에 들어가서 어도비 Acrobat과 PDF 개발을 이끌었고, FunnyorDie.com 사이트를 공동 창업했다. 그에 따르면 서거 1년이 지난 지금도 업계는 잡스를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그의 카리스마는 전기와 같았어요. 정말 믿을 수 없는 힘을 풍겼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스티브와 같이 있을 때는 뭐든 할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곤 했었어요. 그가 죽었을 때도 그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없죠.”

Scuff Mark in the Mini-Store

2004년 췌장의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고 밝힌 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다. 잡스는 필자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스탠포드 쇼핑센터에 기자들을 소집했다. 새로이 750 평방피트 짜리 “미니” 스토어 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원래의 애플 소매점 크기의 절반인 미니 디자인은 하얀색 천장에 후광이 비쳤으며, 일본에서 만든 스테인리스-스틸 벽과 파워맥 G5를 방불케 하는 통풍구가 달려 있었다. 바닥은 빛나고 새하얀 색이었으며, 잡스의 말에 따르면 “비행기 격납고에서 사용하는 재료”로 만들었다 했었다.

하지만 미니 스토어 앞을 드리우고 있던 거대한 커튼을 열기 전, 겨우 몇 분 전에 잡스는 외부에 스토어를 보여 주고 기자를 맞이하기 거절했다. 왜였을까? 도면상에서야 무척 근사해 보였던 스토어 디자인이 실제로는 도면과 같지 않아서였다. 문제는 벽과 바닥이었다. 개장 준비를 위해 작업했더 사람들 때문에 벽에는 지문, 바닥에는 구두 자국이 묻어 있었다.

잡스는 바깥에 있으라 주지해 놓고 기자들 앞에서 커튼을 내렸다. 바닥을 봤던 필자는 곧바로 옆에 서 있던 잡스를 바라 보며 그가 디자인의 모든 측면에 포함돼 있었는지 물었다. 그가 그렇다고 답하자 필자는, “자기 인생에서 절대로 바닥 청소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스토어를 디자인했음이 분명해요.”라 말했다. 잡스는 필자를 가늘게 쳐다 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 개월 후, 한 애플 중역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토요일 개장 후, 잡스가 스토어로 디자이너를 모두 다 불러 모은 다음, 밤새 그들보고 하얀색 표면을 청소하라 시켰다고 한다. 그 후 애플은 현재 애플 스토어 디자인에 널리 퍼진 석재 타일로 바닥을 교체했다.

They’ll Get Used To It

인터넷 브라우저의 개척자이자 벤처 투자자가 된 마크 안드레센(Marc Andresseen)에게는 아이폰이 선보이기 조금 전에 잡스 부부와 더블 데이트를 했던 추억이 있었다. “2006년 가을이었어요. 제 부인인 로라와 제가 스티브, 그리고 그의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부인인 로렌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었습니다. 팔로알토의 캘리포니아 거리에 있는 식당의 대기열에 앉아 있었고 실리콘 밸리 특유의 훈훈한 저녁이었어요. 그 때 스티브가 프로토타입의 아이폰을 청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가지고서는 ‘뭐 좀 보여줄게’라 했습니다. 그러더니 온갖 기능을 설명하더라구요.”

“스티브 말에 맞춰서 감탄 좀 해 줬죠. 그리고는 감히 대들었습니다. 원래 제가 블랙베리 광팬이었기 때문에, ‘스티브, 물리적인 키보드가 없으니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사람들이 과연 화면상에서 타이핑하는 것을 문제 없이 할까요?’라 물었어요. 그랬더니 완전 제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말하더군요. ‘그렇게 될 거야.'”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선보인 이래 2억5천만 대 이상의 아이폰을 팔았다. 아이폰은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린 스마트폰 중 하나이다.

Blunt, But With Taste

1984년 맥을 처음 선보였을 때이다. 애플의 수석 에반젤리스트이자 맥 개발 커뮤니티 관계를 맡고 있었던 가이 가와사키(Guy Kawasaki)의 자리로 잡스가 한 사내를 뒤에 데리고 다가왔었다. 잡스는 가와사키에게, Knoware라는 맥 개발사의 프로그램에 대해 의견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 프로그램에 대해 잘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바를 말해 드렸죠. 극도로 부정적이었어요. 말한 뒤, 스티브가 뒤의 사내를 쳐다 보고는, 다시 저를 쳐다 봤습니다. ‘가이, 사실 이 분은 Knoware의 CEO야.’, 이러는 겁니다.”

가와사키는 이 이야기야말로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직원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리는” 잡스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라 말한다. “일반적으로 스티브를 말해주는 사례이죠. 스티브의 팬이라면 ‘자질구레한 겉치례를 그가 이렇게 돌파하는군!’이라 말할 테고, 스티브의 팬이 아니라면 사교성이 전혀 없다 말할 겁니다.”

“사람들을 이처럼 대하기는 했지만 훌륭한 인재들을 스티브가 데려와서 일하게 했었죠. 다른 보스들 대부분과는 달리 스티브는 훌륭한 일을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두 가지 있어요. 잘하거나, 잘하지 못 할 때를 아는 취향, 그리고 과감하게 말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취향은 없지만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죠.”

“위대한 일을 하고 싶으시다면 애플에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가 따라요. 공개적으로 수치를 느껴야 한다는 거죠. HP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HP 방식이 아니에요. 반대로 말하자면, HP에서는 누구 하나 훌륭한 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HP에서는 최고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디에서 일하시겠습니까? 애플입니까, HP입니까?”

A Little Hand In the Screen

1974년 잡스를 고용했던 아타리(Atari)의 창업자인 놀란 부시넬(Nolan Bushnell)은 잡스의 격렬함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아침에 와 보면, 저녁 내내 일하다가 책상 밑에서 웅크려 누워 있는 스티브를 발견하곤 했었어요.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죠. 그의 성공이 행운이라거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났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지만,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한다면 스스로의 행운을 갖고 정말 멋진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철학적인 관계도 갖곤 했어요. 그는 큰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즐겨 얘기하곤 했습니다. 제품 만들기, 그리고 제품을 언제 시장에 내놓아야 할지가 항상 그의 관심사였어요.”

1980년대 초, 부시넬은 프랑스 파리에 15,000평방피트 짜리 집을 구입하고, 실리콘 밸리 친구들을 모두 집들이 파티에 초대했다. 밴드와 산더미같은 음식, 음료를 준비했고 친구들은 모두 정장을 입고 왔다. 단, 아타리를 떠나 1976년 애플을 창업했던 잡스만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들어왔다.

부시넬은 파티 다음 날, 파리의 레프트 뱅크(La Rive gauche)에 스티브와 함께 앉아서 파리를 바라 봤다. 그는 커피를, 스티브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창조성의 중요함에 대해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애플 II의 수명이 점점 다 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애플 III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막 리사 아이디어를 생각하기 시작했었죠. 리사가 곧 매킨토시가 되죠. 우리는 트랙볼과 조이스틱, 마우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화면 상에 있는 작은 손 아이디어도 얘기했죠. 결국은 마우스 얘기였습니다.”

“사망하기 1년 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봤었어요. 매우 말랐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더라구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 이거 이겨낼 거예요.’라 말하더군요.”

A Christmas Story

원래 애플의 오리지날 마케팅 전문가였던 리지스 매케나(Regis McKenna)는 오토바이를 몰고 당시 22살의 잡스를 만나러 갔었다. 그는 잡스와 함께 애플을 어떻게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 것인지를 얘기했었고,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애플 간부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 후로 둘은 가까운 친구로 지냈었다.

“1998년, 부인과 저는 다섯 대의 아이맥을 손자들 성탄절 선물로 샀었어요. 선물 포장 뜯는 광경을 지켜봤죠. 5살 짜리 손녀딸인 몰리가 자기 아이맥을 열면서 ‘인생 참 좋아’하더라구요. 그런데 불행히도 몰리의 아이맥은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몇 시간 쓰고 나니까 디스크 드라이브 문이 열리지 않더라구요. 판매자는 애플 정책 때문에 컴퓨터를 새 컴퓨터로 바꿔주지 못한다고 말했었습니다. 수리에는 수 주일이 필요하다더군요. 그래서 전 스티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애플의 아이맥 교환/환불 정책이 어떤지 물어 봤습니다. 보내고 난 뒤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울리더라구요. 스티브였습니다. 문제가 무엇이고 판매자가 누구였는지를 묻더니 다시 걸겠다면서 끊더군요. 그랬더니 몇 분 뒤에는 판매자가 매우 미안해 하면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손녀분을 위해 새 아이맥을 드리겠습니다.’라 말하더군요. 그래서 감사의 이메일을 스티브에게 보냈습니다. 손녀의 성탄절을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랬더니 스티브가 즉각적으로 간단한 답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Ho, ho, ho’였어요.”

매케나는 다른 이야기도 들려 줬다. 1985년 당시 CEO 존 스컬리와 이사진들로부터 축출당한 그 다음 주, 잡스는 매케나에게 다음 단계에 대해 말했었다. “스티브는 자기가 떠난 덕택에 애플이 도움을 받으리라 말했었어요. 새로운 회사가 아마 애플이 사용하고 회사에게 이익이 될 기술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더군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성공적인 제품 라인을 새로 개발하여 애플의 제품 라인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에요. 애플이 우리를 인수하겠지.’ 그 때는 그의 말이 어떻게 정확히 실현될지 그도 예측을 못 했었죠.”

1996년 애플은 잡스의 넥스트를 2억 4,900만 달러에 인수했고 잡스는 애플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미국 기업사상 제일 성공적인 부활을 일으켰다.

A Friend In Need

현재 벤처 투자자인 하이디 로이즌(Heidi Roizen)은 1980년대 맥용 소프트웨어를 만들던 T/Maker의 사장이었다. 그녀는 잡스와 함께 “성격 구축”이라 부르던 경험을 많이 가졌다고 말한다. 다만 개인적인 사례가 한 건 있었다.

“1989년 3월1일이었어요. 스티브가 거론할 일이 있다고 전화를 했었어요. 하지만 스티브가 전화를 하기 직전에, 바로 전 날 저녁 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었어요. 저는 그 때 파리 출장중이었죠. 그래, 무슨 일인가요라고 스티브에게 묻자 스티브는 ‘도대체 왜 지금 일하고 계십니까? 집에 가셔야죠. 저도 곧 가겠습니다.’라 말하더군요.”

실제로 잡스는 그녀의 집으로 와서 그녀가 2시간 동안 흐느껴 울 동안 바닥에 앉았다. “예. 소파가 있긴 했지만 스티브는 소파에 앉기를 싫어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뭐가 중요하고 뭘 제일 좋아했는지에 대해 말하라 하더군요. 마침 스티브의 어머니도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 느낌이 어떤지, 뭘 얘기해야 할지 각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 때 제게 준 위로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해 할 겁니다.”

He Notices Everything

넥스트에서 스티브 잡스를 위해 홍보팀에서 일했던 에밀리 브라워 오차드(Emily Brower Auchard)는 아무리 사소한 디테일이라도 잡스는 “알아차리는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스티브와 언론 인터뷰에 참가해서 노트를 적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인터뷰 직전, 신발을 서로 다르게 신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아침에 옷을 워낙 빨리 입어서 다른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상사에게 어떻게 할까요라 전화를 하니까 그녀는 반드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스티브가 못 알아차릴리 없다면서요. 그래서 미친년처럼 스탠포드 몰로 가서는 Nordstrom의 신발을 한 켤레 사갖고 곧바로 넥스트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내 생에 제일 빠른 쇼핑 결정이었을 거예요.”

Disarm, Rather Than Charm

구매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1989년, 넥스트는 IBM의 OS/2 컴퓨터용으로 넥스트스텝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논의할 회의 일정을 잡았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넥스트의 한 간부는 넥스트가 이 일이 꼭 이뤄지기 바랬다고 한다. (실제로 IBM은 그 해 말, 6,500만 달러를 들여 넥스트 소프트웨어를 라이선스했다.)

양사 간부진이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있던 넥스트의 회의실에 모두 모였고 잡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잡스는 들어왔고, IBM의 수석대표에게 다가가서 “당신네 인터페이스는 썩었습니다.”라 말했다. 양사 간부진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가 얼마나 협상을 잘 하는지 알려주는 사례입니다. 욕을 해대면서 사람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버리죠. ‘당신네 제품이 워낙 썩었지만 우리가 해 준다’는 식이에요. 과도하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언제나 얻어냈습니다.”

Okay to Lie

1990년대 후반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때 같이 일했던 한 간부의 증언이다. “스티브는 정말, 정말, 정말 1대1 대화에 능숙합니다. 대화를 할 때 전혀 꾸미지를 않거든요. 하지만 방 안에 두 명 이상 있다면 그도 마케팅을 합니다. 꾸몄죠. 가령 나로부터 원하는 바가 뭔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친절해야 합니다. 애플에 복귀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애플은 당시 혼란 상태였고, 넥스트는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같이 일할 인재가 필요했어요. 아이포드, 그리고 아이폰으로 성공을 거듭하고 나면서 그는 더 오만해졌습니다. 이전의 스티브죠.”

“뭔가를 하겠다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 점을 지적하니까 이렇게 답하더군요. ‘그래, 그래. 알아요. 하지만 마음을 바꿀 필요가 있었지.’ 마음 속으로는 거짓말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Brilliant

애플이 오에스텐을 발표했을 때다. 오에스텐은 맥의 새로운 운영체제로서 이전의 시스템과 연동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개발자들도 애플리케이션을 재작성해야 했다. 그래서 잡스는 어도비에게 제일 잘 팔리는 제품군을 오에스텐으로 포팅해주시라 요청했지만 어도비는 망설였다. 기능 개선도 아니고 시스템 호환성만을 위해 소비자들이 과연 돈을 내려 할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도비는 결국 오에스텐용으로 제품 업데이트를 했지만 잡스는 업데이트의 시기를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한 전직 어도비 간부의 증언이다.

“그는 오에스텐 호환성을 오에스텐이 나오자마자 맞추기 바랬어요. 하지만 어도비가 바람만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서 화가 났었습니다.” 어도비가 마침내 오에스텐 버전을 선보였을 때 잡스는 맥월드 이벤트에서 어도비 제품을 소개하겠노라 확신했었다. “실제로 했죠. 어도비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 플랫폼 전용으로 나온다는 말이기 때문이었어요.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이 뭔지 그는 정말 잘 알았습니다. 뛰어났죠.”

Untold Stories About Steve Jobs: Friends and Colleagues Share Their Memories – Forbes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모리타 이후의 소니, 잡스 이후의 애플

TECH | 4/25/2012 @ 1:42PM

Apple=Sony: Brace For The Coming Post-Steve Jobs Decline

By George F. Colony

George F. Colony is Chairman and CEO of Forrester Research. Follow him on Twitter at @gcolony.

스티브 잡스 이후 시대의 애플은 쇠퇴할 것이다.

이유를 밝혀 보겠다.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1947년의 저서, “이상적 조직으로서의 관료제(The Theory of Social and Economic Organization)”에서 조직체계이론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조직의 범주는 세 가지였다. 1) 법적/관료조직 (미국정부나 IBM을 생각하시라.) 2) 전통조직 (천주교회를 들 수 있겠다.) 3) 카리스마적 조직 (특별하고 마술사같은 개인들의 조직이다.).

카리스마적 조직은 카리스마의 원래 그리스어 단어의 뜻인 “은총의 재능(gift of grace)”을 가진 이들이 이끈다. “그는 평범한 이들과 다르며 초자연적이고 초인적인, 적어도 예외적인 힘이나 재능을 특별히 가진 인물이다.” 추종자와 신봉자들은 리더를 절대적으로 믿고 거의 마술적인 권력을 부리는 리더의 일용할 양식을 받는다. “이런 맥락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란, 과거를 거부하는, 특별히 혁명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가? 아담 라신스키(Adam Lashinky)의 책, “Inside Apple”을 보자. “…모든 결정은 잡스가 내렸다.” “취향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자는 잡스였다.” 라신스키는 애플이 모험기업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애플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모험적이지 않다. 그러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다.” 달리 말해서, 중심부에 카리스마적인 기업가가 한 명 있고(위에 보면 포천 매거진에 있던 라신스키의 애플 조직도가 있다), 모두가 그에게 연결돼 있다. 베버의 말을 빌자면, “…집단 관계의 감정적인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카리스마적인 조직의 주된 문제 중 하나는 승계이다. 관료조직은 선거와 같은 형태로 지도자를 새로 뽑는 과정을 거친다. 전통적인 조직은 오랫동안 열리는 의식(시스티나 성당 굴뚝의 연기)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알린다. 하지만 카리스마적인 조직에서 마술적인 지도자를 대체할 새 지도자는 그 역시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 직원과 (애플의 경우) 고객과 감정적인 끈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애플은 잡스를 계승할 증명된, 그리고 능력 있는 간부를 골라 놓았다. 그러나 그의 법적/관료적인 접근은 은총의 재능을 먹고 자라나는 조직과 잘 맞음을 증명시켜야 할 것이다.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여 잡스가 만들어 놓은 애플대학은 어떨까? 다시 베버를 인용하겠다. “카리스마는 각성하거나 시험받을 뿐이며, 학습이나 가르침으로 배울 수 없다.”

필자는 애플 간부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며, 존 아이브나 스콧 포스탈이 애플 CEO로 어울리잖나 생각한다. 그들이라면 카리스마와 거침 없는 디자인 센스로 애플을 적법하게 이끌 수 있을 듯 하다.

스티브 잡스는 서거하면서 세 가지의 능력을 가져가 버렸다. 1) 애플을 한데 묶고 범상치 않게 실력을 끌어낸, 단일한 카리스마적인 리더쉽. 2) 큰 위기를 처리할 능력, 3) 제품 디자인과 비전에 대한 비견할 수 없는 능력이다. 애플의 전성기가 24~48개월동안은 유지될 테지만, 새로운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없다면 애플은 훌륭한 회사에서 그냥 좋은 회사로 바뀔 것이다. 제품 혁신과 판매고 성장도 그만한 수준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다. 모리타 이후의 소니, 랜드 이후의 폴라로이드, 잡스가 떠난 이후의 애플(1985년 이후를 말함이다), 월트 디즈니 사후 20년간의 디즈니가 모두 그러했듯, 애플도 자연스럽게 둔화될 것이다.

Apple=Sony: Brace For The Coming Post-Steve Jobs Decline – Forbes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By John Gruber

Walter Isaacson’s ‘Steve Jobs’

애플은 소프트웨어 회사인가, 하드웨어 회사인가?

끊임 없을 질문이다. 물론 해답은, 애플은 그 어느 회사도 아니다이다. 애플은 경험(experience) 회사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전체적인 제품 경험을 창출하는 일부에 해당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무엇이 더 중요하신가? 들고 다니고 싶을 휴대폰은 무엇인가? 안드로이드나 윈도폰7을 돌리도록 수정한 아이폰 4S인가? 아니면 iOS 5를 돌리도록 수정한 노키아나 삼성, HTC 최신사양인가?

무슨 컴퓨터를 쓰고 싶으신가? 윈도 7을 돌리는 맥북인가, 아니면 맥오에스텐 10.7을 돌리는 레노버 씽크패드인가?

나야 답변은 쉽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이니까 아무 OS나 돌리는 아이폰 4S보다는 iOS 5를 돌리는 노키아 루미나를, 마찬가지로 윈도가 아닌 맥오에스텐을 돌리는 씽크패드를 주저 없이 선택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라면 똑같은 가정 하에서 무엇을 골랐으리라 보시는가?

아마도 잡스라면 그런 기기를 제일 가까운 벽에 던져버렸을 테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잡스 또한 소프트웨어를 택했으리라고 본다.1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둘 다 중요하고, 잡스도 분명히 둘 다 깊게 챙겼지만, 나는 잡스가 궁극적으로 소프트웨어가 보다 더 중요하다 여겼으리라고 본다. 2007년 1월 맥월드 엑스포의 무대에서 버튼 하나짜리 디자인의 아이폰을 설명할 때, 잡스는 당시 기존 스마트폰의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해 얘기했었다. 잡스의 말이다.

필요한지 안 한지, 그곳에 있어야 할지 아닐지 상관 없이 모두들 키보드를 갖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안에 고정된 컨트롤 버튼도 다들 갖고 있죠. 모든 애플리케이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약간씩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다르지고 버튼에 좀 최적화돼있다, 그 뿐이죠. 앞으로 6개월 후에 훌륭한 아이디어가 생각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휴대폰에 버튼을 수정하거나 추가시키지 못 할 겁니다. 이미 고정된 채로 나왔으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버튼과 컨트롤은 바뀔 수 없어요. 각 애플리케이션도 바꿀 수 없어요.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도 그걸 실현시킬 수가 없습니다. 못 바뀌니까요.

자,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흠. 일단 우리는 해결했습니다! 20년 전에도 우리는 컴퓨터로 그걸 해결해냈죠. 원하는 것 무엇이라도 표시할 수 있는 비트-맵 화면으로 해결했습니다. 어떠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라도 띄울 수 있었죠. 그리고 포인팅 기기, 그러니까 마우스로 해결했습니다. 맞죠? 이 문제를 우리는 해결했어요. 그렇다면 휴대기기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버튼을 다 없애버리고 하나의 거대한 화면만 만들면 어떨까?

몇 분 후, 잡스는 이런 말을 했다.

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업계의 개척자라 할 수 있을 앨런 케이(Alan Kay)가 남기신 말씀이 매우 많죠. 최근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그대로 나타내는 말씀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 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소프트웨어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하드웨어를 만들어야 한다.”

아시죠. 그 분은 이 말을 30년 전에 했씁니다. 우리도 그리 생각합니다.

“버튼을 다 없애버리고 하나의 거대한 화면만 만들면 어떨까?” 디자인은 오늘날 업계 전반에 걸친 스마트폰의 표준형 디자인이 됐을 뿐 아니라, 아마 익히 들어보셨을 다른 기기, 즉 아이패드의 디자인도 정확하게 묘사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Design Is How It Works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의 잡스에 대한 전기에 잘못된 부분은 많지만, 소프트웨어를 다룬 부분이야말로 그의 전기에서 보이는 제일 심각한 오류이다. 아이작슨은 소프트웨어와 디자인에 대한 잡스의 열정을 무시하거나 경시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정 반대의 묘사를 일삼았다.

아이작슨은 잡스가 거의 하드웨어에만 몰두한 것인양 만들었다. 사실 하드웨어에만, 이라고 표현한 것도 양반이다. 그는 잡스가 하드웨어의 “외양”, 추상적인 미학에만 몰두한 것처럼 묘사했다.

26장(한국어판은 25장)의 “디자인의 원칙 – 잡스와 아이브의 스튜디오”를 보자. 아이작슨의 글이다. (영문판 344 페이지)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의 말이다. “스티브가 돌아오기 전에는 엔지니어들이 와서 ‘프로세서나 하드드라이브’를 말하며 ‘이것이 바로 요점입니다’하고 갑니다. 그러면 디자이너들이 그걸 갖고 가서 컴퓨터로 만들죠. 그런 식으로 하면 정말 끔찍한 제품이 나와요.” 그렇지만 잡스가 돌아오고 아이브와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디자인 쪽을 더 중시하게 됐다. “스티브는 우리를 위대하게 해주는 것에 있어서 디자인이 필수적이라고 계속 강조했어요. 디자인이 다시금 엔지니어링을 지배했습니다. 그 반대가 아니고요.”

물론 그런 방침이 역효과를 낳을 때도 있었다. 잡스와 아이브가 아이폰 4에 브러쉬드 알루미늄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부렸을 때, 엔지니어들은 안테나를 희생시키리라 우려했다. 하지만 잡스의 복귀 후, 주로 “아이맥과 아이포드, 아이폰, 아이패드” 디자인의 차별성덕분에 애플은 앞서나갔고 번영을 구가했다.

아이작슨은 디자인이 제품의 외양과 느낌이리라 단정짓고 있음이 분며아다. 실제로 일을 하는 역할은 “엔지니어링”에 있다는 믿음이다.

2003년, 잡스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아이포드 기사를 위해 로브 워커(Rob Walker)와 멋진 인터뷰를 했었다.

“디자인은 어떻게 보이느냐로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겉치장이라고 생각해서 디자이너한테 ‘예쁘게 만들어 봐라’고 하죠. 우리는 디자인을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외양만이나 어떻게 느껴지는가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바로 디자인이에요.”

기존의 소스를 자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작슨의 책에는 위의 인용이 빠져 있다. 대신 아이작슨은 예전의 인용을 책에 포함시켰다.”

잡스와 아이브가 공유한 근본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디자인은 제품이 표면상으로 비치는 외양만이 아니다. 제품의 본질을 반영해야 한다. 애플에서 권력을 되찾은 직후 포천지와 인터뷰에서 잡스는 이런 말을 했다. “디자인은 겉치장이다는 인식을 대부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디자인의 의미를 더 발전시킬 수가 없어요. 디자인은 사람이 만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입니다. 외부 레이어를 통해 드러나죠.”

잡스도 포천지에 말한 그대로 말했으리라 본다. 똑같은 핵심적인 사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바로 디자인이에요”의 문장이 애플 철학에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아이작슨의 말마따나 “제품의 본질”이나 잡스의 말인 “사람이 만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은 엔지니어링이라는 차가운 과학으로부터 디자인의 예술을 개념적으로 분리시켜줄 따름이다. 딱 5 어구,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바로 디자인이에요”야말로 엔지니어링이 디자인의 예술을 어떻게 이루고 어떻게 일부가 되는지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해준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은 실로 반대의 위치에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엔지니어링에서의 제약이 디자인에 영향을 끼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은 별도의 개념이 아니다. 누가 누구의 위에, 혹은 아래에 있느냐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실러가 아이작슨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잡스가 애플에 돌아온 이후 디자인이 엔지니어링의 끝에서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잡스 이후 엔지니어링은 디자인 과정의 한 요소가 됐고, 이 변화는 세상을 다르게 만들어버렸다.

아이작슨은 이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 안테나게이트 이야기를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26장에서 인용했다.

물론 그런 방침이 역효과를 낳을 때도 있었다. 잡스와 아이브가 아이폰 4에 브러쉬드 알루미늄을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부렸을 때, 엔지니어들은 안테나를 희생시키리라 우려했다.

아이폰 4(그리고 현재의 4S)의 모서리가 안테나다.2 그리고 이 안테나는 브러쉬드 알루미늄으로 만들지 않고, 비드블라스트 처리(bead blasted)가 된 스테인레스를 사용한다.3 엔지니어의 우려는, 알루미늄이 안테나를 희생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외장 안테나가 수신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서 한 것이었다. 안테나를 왼쪽 가장자리 바깥으로 내어 놓음으로써 캐터리와 다른 부품이 들어갈 자리가 더 커졌고, 휴대폰 자체도 더 얇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슨은 엔지니어들이 아무리 우려하더라도 잡스와 아이브가 외양과 느낌만 중시한 것처럼 묘사했다. 진실은 어떻게 돌아가느냐가 디자인인데도 말이다.

아이작슨은 39장 “안테나게이트: 디자인 대 엔지니어링”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들었다. (39장 제목 자체가 디자인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을 별개로 간주하고 있다.)

제품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하는 디자이너와 제품을 기능에 충실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엔지니어들 간에 긴장이 흐르는 소비자 제품 기업은 많이 있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을 모두 다 극한으로 끌고가는 잡스가 있는 애플에서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간의 긴장관계는 일반 기업보다 더 거대했다.

아이작슨은 이 문장으로 스티브 잡스가 가진 “디자인”의 철학을 완벽하게 무시해버렸다.

Serious About Software

분명히 아이작슨은 잡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좋다. 단, 그는 자신의 불신을 이용하여 더 성찰력 있는 질문을 하기보다 단순히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기만 했다. 애플과 오리지날 맥 시절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아이작슨은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를 찾았다. 허츠펠드는 솔직할 뿐만 아니라 비범한 기억력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이작슨은 그 시절 얘기때문에 고생하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허츠펠드 스스로가 그 시절 기억을 잘 문서화시켜 놓았다. 그의 Folklore 웹사이트와 웹사이트의 글을 갖고 걸출한 책, Revolution in the Valley도 만들어냈다.

잡스의 인생에서 문서화가 잘 안 된 시절은 넥스트와 애플 복귀 사이의 기간이다. 이 때의 잡스를 그리기 위해 아이작슨은 지속적으로 빌 게이츠를 만났다.

아이작슨은 책 전체에 걸쳐 잡스의 유명한 “현실 왜곡의 장”을 여러 번 언급했으며, 아이북용 전기에서 찾아볼 경우 서른 번이나 적고 있다. 심지어 11장의 제목 자체가 현실 왜곡의 장이다. 그의 책에서 인용한다.

현실 왜곡의 장은 잡스가 거짓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영리하게 표현한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 현실 왜곡의 장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복잡하다. 진실인지의 여부는 전혀 고려치도 않은 채, 회의에서 아이디어나 세계사의 어떤 사실을 말할 때 잡스가 주장하는 바가 현실 왜곡의 장이었다.

즉… 진실이건 아니건 간에 자기가 뭐라 말하든 사람들이 자기를 믿게 만드는 힘이라는 얘기다. 물론 모두는 아니었다.

잡스가 지닌 현실 왜곡의 장에 저항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 게이츠를 꼽을 수 있다. 그 결과 빌 게이츠는 넥스트 플랫폼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이작슨은 잡스의 현실왜곡의 장을, 제다이 기사들이 가진 포스와 비슷하다고 간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력한 정신력을 지닌 누군가에는 안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아이작슨이 “저항력”에 너무나 골돌한 나머지 잡스가 그에게 틀리다고 한 것을 취급하기로 여긴 모양이다.

다시 말하건데 회의론은 좋다. 그러나 잡스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한다거나 잡스 스스로와 언쟁을 벌일 수 있도록 사실을 알아내기보다, 아이작슨은 단순히 허츠펠드나 게이츠처럼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만 찾아다녔다. 과연 게이츠는 믿을만한 선택일까? 게이츠는 분명 이해관계가 반대인 인물이다. 그의 회사는 잡스 회사와 경쟁했고,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그는 역사적으로 잡스 유일의 경쟁자로 손꼽힌다.

잡스가 아이작슨에게 “사실”이라 말한 것도 아이작슨은 지속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빌 게이츠같은 이들의 말에 매달렸다. 그 말도 사실은 “틀린” 것이라 인용하면서 말이다. 아이작슨은 게이츠의 말을 “사실”이라 논평했다.

뭣보다 23장, 잡스의 재림에서 아이작슨은 1996년, 넥스트의 인수와 잡스의 복귀를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 당시 CEO인 길 아멜리오(Gil Amelio)는 클래식 맥오에스의 계승자를 찾기 위해 외부 기업을 찾으러 나섰으며, Be나 넥스트의 인수, 혹은 선 솔라리스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NT의 라이센스가 후보군에 올라 있었다고 적고 있다. (아이작슨에 따르면, 초기 단계에서 아멜리오가 윈도 NT의 라이센스를 선호했다고 한다. 애플이 당시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를 묘사해주고 있다.) 302페이지의 글을 인용한다.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할 방침이라고 가세에게 알린 다음, 아멜리오는 훨씬 더 불편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빌 게이츠에게 해야 할 통보였다. 아멜리오는 연락이 순조로웠다고 회상한다. 게이츠는 소식이 재밌기는 하지만 잡스가 해냈다는 사실이 아마 놀랍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게이츠는 아멜리오에게 물었다. “스티브 잡스가 정말 뭔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그 기술을 좀 압니다. 좀 데운 유닉스에요. 당신네 컴퓨터에서 돌아가도록 절대로 만들지 못할 거예요.” 게이츠에게도 잡스처럼 스스로를 북돋는 방식이 있었으며 지금 바로 그러고 있었다. “스티브가 기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계세요? 그는 그냥 수퍼-영업사원일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셨어요? … 그는 엔지니어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그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 99%는 틀렸습니다. 도대체 이 쓰레기를 뭐하러 사시는 겁니까?”

게이츠는 놀랍게도 완전히, 전체적으로 틀려버렸다. 이것만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작슨은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게이츠에 대해 변명을 해 주자면, 위에 나오는 넥스트에 적대적인 욕설은 사실 제3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아이작슨은 위 말을 길 아멜리오의 자서전, On the Firing Line에서 따왔다. 게이츠가 아이작슨에게 한 말은 따로 있지만, 별로 정확하지 않다. 다음 장에 나온다.

몇 년 후 그를 만났을 때 질문을 다시 해 봤다. 게이츠는 자기가 그렇게 열내면서 말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게이츠는 넥스트 인수가 애플에게 새로운 운영체제를 주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멜리오는 넥스트를 비싸게 샀어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넥스트 OS는 절대로 쓰이질 않았죠.” 인수 덕분에 에이비 티베이니언(Avie Tevanian)이 애플로 왔고, 그가 기존의 애플 OS를 발전시켜서, 넥스트 기술의 커널에 합쳤다는 것이다. 게이츠는 넥스트 인수가 잡스를 다시금 권력으로 불러들어오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의 양면성이죠. 인수로 해서 데려온 사람이 위대한 CEO가 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어요. 그가 별로 경험이 없어서였죠. 하지만 그는 훌륭한 디자인 감각과 엔지니어링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광기를 가라앉혀서 자신을 임시 CEO로 임명받도록 했죠.”

그 장은 이렇게 끝났다. 아이작슨의 코멘트나 다른 원전으로부터의 인용도 전혀 추가적으로 붙지 않았다. 위의 말은 남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지식이 없는 독자로서 아이작슨을 신뢰한다면, 애플의 넥스트 인수에 대해 위와 같은 언급이 정확하리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보면 저 묘사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넥스트스텝은 “유닉스를 데운” 것만이 아니었고, 맥 하드웨어에서 넥스트 OS는 실제로 돌아갔다. 맥오에스텐 10.0은 맥과 넥스트 기술의 잡종이었지만 맥 기술이 통합된 넥스트 시스템이지, 넥스트 기술이 통합된 맥 시스템은 아니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돌아가는 iOS는 넥스트스텝의 직접적인 후손이다. 심지어 넥스트 기술에 기반하지 않았던 오리지날 아이포드도 넥스트가 개척했던 계층적 네비게이션의 칼럼-뷰 컨셉을 사용했다.

게이츠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가 인재 영입 뿐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는 인재와 기술 모두를 영입했었고, 맥오에스텐과 iOS 모두의 기반에 넥스트 기술이 들어가 있다.

여기서 빌 게이츠가 얼마나 틀렸는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겠지만, 아이작슨은 게이츠의 말이 진실인양 쓰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작가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은 일이 아니다. 잡스의 커리어는 길고 풍부하며 다양하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책 한 권으로 줄이기 위해 아이작슨은 완전히 잡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이츠를 거울 삼았다. 넥스트가 만든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애플은 끊임 없이 확장시키고 쇄신했다.

잡스는 애플에 돌아오면서 넥스트 소프트웨어를 같이 갖고 왔고, 넥스트는 맥 플랫폼을 살려내고 더 성장시켰으며,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기반으로도 돌아가고 있다. 넥스트 스스로는 시장에서 고전했지만 그 소프트웨어는 궁극적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기간이 거의 20년이 걸렸지만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결코 잃지 않았다.

아이작슨은 뭔가에 대해 틀린 것만이 아니다. 잡스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틀렸다. 넥스트에서 시작된 소프트웨어 시스템에 대한 10년의 이야기를 그는 완전히 놓쳤다.


잡스에 대해 읽고나면 세상에 대한 잡스스러운 흑백논리에 끌리는 마음이 든다. 완전한 쓰레기, 아니면 이 세상 최고로 위대한 것 중 하나다. 즉, 별 0개 아니면 5개다. 물론 그러실 수 있다. 나도 아이작슨의 책에 대해 완전한 쓰레기, 그러니까 별 0개로 평가내릴 수 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 스티브 잡스 전기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좋은 책이지만, 몇 가지 함정과 지독한 실수도 같이 들어 있다.

아이작슨은 소프트웨어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하드웨어를 만든다는 앨런 케이의 인용을 포함시켰으나, 특별히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스티브 잡스의 커리어를 그 말이 완벽하게 인용한다고 깨닫거나, 애플 제품의 엄청난 성공을 설명해 준다고 보지는 않은 듯 하다.

아이작슨이 오만해서 불만이다라는 말이 아니다. 이 책은 위인전이 아니며 실제로 그러하다. 잡스 개인의 잔인함(그리고 잔인해지는 능력), 짜증, 남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이라 하는 경향 등이 문제가 아니다. 아이작슨은 잡스에 대해 우리도 알고 있는 그런 면을 잘 다루었다. 다만 기술적인 부정확함이 너무나 확연하고 잡스의 을 잘못 이해했다. 그는 디자인 과정과 결과로 나온 제품, 소프트웨어에 대한 집중성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스티브 잡스의 일에 대해 알아보려면 아이작슨의 전기보다는 차라리 로브 워커의 2003년 뉴욕타임스 매거진 기사를 보시는 편이 낫겠다. 하지만 그 기사는 아이포드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나머지는 없다. 아이작슨의 책은 잡스의 개인사와 어린시절, 괴벽, 잔인성, 성격, 감정적인 울분 등이 궁금할 때 좋은 책이다. 그러나 잡스의 에 대해서 아이작슨은 마치 비극처럼 심도 깊게 알려주는 것이 없다.

아이작슨은 한 개자식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세상에는 개자식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야기는, 놀랍고도 독특한 기업을 세워 뛰어난 제품을 많이 만들어낸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1. 1997년 애플 복귀 당시의 잡스는 오픈스텝을 돌리는 씽크패드를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기준에 합당한 파워북을 애플이 내놓기 전까지 말이다.

  2.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서리가 안테나”들”이다.

  3. 39장에서 아이작슨은 이렇게 적었다. “안테나로 작동하려면 금속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틈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그는 아이폰 모서리의 목적을 제대로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이 책의 기술적인 면모에 대한 사실 확인이 얼마나 엉성한지 알만하다.

Daring Fireball: Walter Isaacson’s ‘Steve Jobs’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FEATURES: 19.12

The Revolution According to Steve Jobs

By Steven Levy November 29 | 12:30 pm | Wired April 2011


llustration: Ryan Alexander

스티브 잡스와의 첫 인터뷰 테이프를 찾지 못했다. 1983년 11월에 가졌던 인터뷰였는데 28년이 지나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43 페이지에 이르는 구술기록은 갖고 있다. (물론 당시 기술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담겨 있다. 가령 “리사 기술”을 “기술을 리스(lease)하다”로 잘못 적은 것처럼 말이다.) 그 때가 잡스와 함께 했던 첫 번째 인터뷰였고 그 뒤로도 여러번 하여 책상에 가득 쌓여 있다. 10월 5일 잡스가 사망한 뒤 그간 했던 인터뷰 자료를 뒤져봤었다. 그동안 잡스가 구축한 특유의 개성을 이제야 이해하지 싶다.

첫 번째 인터뷰는 쿠퍼티노의 한 식당에서 고기가 없는 피자를 먹으며 했었고 주제는 당시 애플이 첫 선을 준비하고 있었던 매킨토시였다. 필자는 롤링스톤(Rolling Stone)지에서 매킨토시 기사를 다뤘는데 잡스는 일단 필자가 일하던 잡지에 대한 공격부터 퍼부었다. 표지인물에 자기가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발끈한 것이었다. (매킨토시 기사가 나갔을 때의 표지인물은 폴리스(Police)였다.)

한바탕 호통을 치고 나자, 청바지와 파란 스웨터를 입고 있었던 잡스는 열정적인 매킨토시 지지자이자 인내심 깊은 매킨토시 강사로 변했다. 그는 매킨토시에 대해 거의 전염병이라도 걸린듯 낙관적이었다. “좋으십니까?” 매킨토시가 “미치도록 훌륭하다(insanely great)”라는 자신의 신념에 당연히 필자도 같이 하리라 여기고 물은 질문이었다. 1983년의 잡스는 다소 거친 인물이었다. 주의깊고 약삭 빠르게 언론을 조절하던 후의 잡스와 비교하면 특히 그 때의 잡스는 거칠었다. 그는 정말 신경썼던 연애가 “수포로 돌아갔기에” 느꼈던 우울감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왜였을까? “매킨토시라는 또다른 여인과 스트레스 때문이었죠. 매킨토시는 제 인생에서 제일 말쑥한 물건입니다. 저는 매킨토시라는 훌륭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어요. 정말 매킨토시와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요. 물론 매킨토시가 여인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요.”

만약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맥이 당시 오류가 많았던 애플 III처럼 실패할 경우 닥칠 결과가 혹시 두려운지도 물어봤다. “예.” 하지만 그 이유가 좀 달랐다. “맙소사. 두려워 한다면서 다시 한다면 도대체 그게 뭡니까?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평생 쓰기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은 많이 벌어 놓았습니다. 왜 하냐고요? 사랑하니까 합니다. 완전히 실패해리고 더 실패한다면 아예 제가 이 업계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겠죠. 시를 쓴다거나 등산이라도 한다거나, 아무튼 다른 걸 해야 할 겁니다.”

매킨토시가 당신의 커리어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겠냐고 질문하자 그는 필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제게는 커리어가 없습니다.” 자신은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것 이상의 존재라고 하는듯한 차가운 답변이었다.

당시에도 잡스는 애플이 “과학과 미학의 교차점”에 서 있노라는 말로 애플을 묘사했었다. 필자가 그의 디자인에는 선사상의 면이 있다고 주장하자 그도 인정하면서 처음 광고책자에는 하얀 칠판 앞에 사과 이미지 하나만 있었다고 말했다.

“과일, 사과 하납니다.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궁극의 세련됨이죠.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정말 단순해 보입니다. 복잡한 건 이해를 못 하거든요. 해결책이 너무 간단했는데 해결이 안 되더라, 싶으면 다시 문제를 들여다보죠. 이제 이렇게 복잡하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복잡한 해결책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중단해요. 어찌 됐건 해결은 되니까요. 하지만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면 계속 탐구하여 문제의 핵심적인 원칙을 발견해냅니다. 그 다음에 정말 아름답고 우아한 해결책을 내게 되죠. 우리가 맥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당시 28세였던 잡스는 나머지 인생을 좌우할 철학을 그 때 이미 깨치고 있었다. 60년대 세대였던 잡스는 필자에게 애플에 대한 자신의 이상주의적인 비전을 말해줬다. 영혼을 잃지 않는 100억 달러 어치의 회사다. 초창기 시절, 애플 엔지니어들 또한 필자에게 잡스의 모토는 “해군에 입대하느니 해적이 되는 편이 낫다”라 말해줬었다.

해적이 낫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그에게 물어봤다. “사실 어느 때건 간에 훌륭한 일을 하지는 않죠. 그러리라 기대하지도 않고 시도를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일을 해라가 여기 문화야’라는 말은 아무도 안 하잖아요. 하지만 한 번 해 보면, 생각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해적이 되라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이상으로 나가 보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유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벌써 자기가 선배급이 됐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 업계에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은 축에 듭니다. 빌 게이츠보다도 일찍 태어났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벌써 7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식사가 끝난 후 그는 피곤하다며 미안해했다. “정말 힘든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재밌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니까요.”


llustration: David O’Brien

열광적인 평가와 광적인 팬을 일으킨 매킨토시였지만 실적은 애플의 기대치를 밑돌았고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축출됐다. “광야에서 헤맨 나날”동안 잡스는 넥스트 컴퓨터를 창립하고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했으며, 필자와의 만남은 극히 드물었다. 1997년 애플의 임시 CEO가 됐을 때, 필자는 뉴스위크에 있었고 다시금 그를 인터뷰하게 됐다. 임시 CEO 취임소식 이후, 동료인 케이티 해프너(Katie Hafner)와 필자는 그가 과연 애플을 다시 거머쥘까 그에게 물어봤다. 전화상으로 그는 애플의 정식 CEO가 될 생각은 전혀 없으며 자신의 역할은 일시적이리라 주장했다. 자기는 여전히 픽사를 운영하고 있으며(사실 당시 잡스는 디즈니와 공동제작 협약을 체결했었다), 가족도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열심히 일하면서 연애도 하는 일은 가능했음이 드러났다.)

“인생은 위대합니다. 제 나이 이제 42살이고, 디즈니와의 협력도 발표했어요. 정말 훌륭한 생일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애플로 돌아오기 원하냐는 한 애플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잡스는 애플의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애플에 리더쉽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 말했다. “수영을 하고 육상을 한다 하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팀스포츠입니다. 맥을, 애플을 만들 때 필요한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그들이 사랑하는 애플 영혼의 상징이 저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잡스는 애플이 “자신의 가치를 다시금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면” 당연히 스스로 재생하리라 말했다.

그는 운동에 대한 비유를 계속 제시했다. “애플은 다시 몸매를 되찾기 위해 체육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겁니다. 제가 트레이너로서 역할을 좀 맡을 수는 있겠죠.”

트레이너라니. 당연히 절제된 표현이리라 생각했었다. 필자는 잡스가 아이맥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났었다. 1997년의 5월 어느날, 우리는 애플 본부의 5층 스위트룸에서 만났고, 수 개월 전의 CEO였던 길 아멜리오(Gil Amelio)가 이 방을 사용했었다. 당시 잡스는 짧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있었으며, 아멜리오가 일했던 이 거대한 사무실에서 그는 프리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손보고 있었다. “사실 전 여기 절대로 안 옵니다. 그가 개인용 화장실을 50만 달러 들여서 설치하려 했다는 사실을 아세요?” 우린 잡스가 선호하는, 더 작은 사무실로 옮겼고 연이어 오는 전화를 두 번 받았다.첫 번째 전화는 픽사의 한 중역이었다. 내용은 토이스토리 2의 생산가치를 더 늘릴 수 있는 대규모의 지출승인이었다. 두 번째는 제리 사인펠드(Jerry Seinfeld)였다. 그는 자신의 투나잇쇼에 애플의 유명한 “다르게 생각하라” 광고영상의 사용에 대해 잡스와 의논했다. (잡스에 따르면 자기 가족이 유일하게 보는 텔레비전 쇼가 사인펠드의 쇼라 말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이사진 회의실로 들어섰다. 길다란 회의 탁자 위에는 검정색 천으로 싸인 상자 비슷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일단 그 물체를 무시하면서 잡스는 자신이 애플로 복귀하게 된 정황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줬다. “애플이 있어야 세상이 보다 좀 나아지리라 결정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이제 전 40대이고 최선을 다 해 일을 할까 합니다. 저를 위해서에요. 회사에 대해 제 마음 속의 뭔가를 위해서이죠.”

잡스는 애플 제품군을 칸 4개 짜리 표에 넣겠다는 구상을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해줬다. 그에 따르면 애플은 수많은 제품을 각각 칸에 들어맞도록 줄일 거라 했다. 그 4가지 칸은 소비자용 노트북과 데스크톱, 그리고 전문가용 노트북과 데스크톱이었다. 즉, 나머지 제품은 모두 없어져야 했다. (놀랍게도 그는 포기하기 제일 어려웠던 제품이 뉴튼이었다면서, 뉴튼이 성공할 수 있다 생각했지만, 뉴튼 팀이 다시금 애플의 핵심적인 일에 투입돼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탁자 위의 물체에 대해 보여줄 준비를 했다. 과장된 손짓으로 그는 천을 벗겨냈고, 아이맥을 보여줬다. 거의 무대 공연 수준의 제스쳐여서 아주 능숙한 쇼맨이 되셨습니다라 말하자 잡스는 짜증내 하면서 필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저를 쇼맨으로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무슨 서커스단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약이라도 파는 것 같잖아요.”

혹시 떠나 있을 동안 개인적으로 반영시킨 것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뭐가 그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애플을 떠난 뒤로 뭔가 바뀌지 않았냐고 물어보자 그는 “전 똑같습니다”라 답했다. 그래서 바깥에 있을 동안 배운 점은 뭔지 물어봤더니 그는 아예 답변을 거부했다. “저는 저에 대해 최고의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저는 저와 너무나 밀착돼 있으니까요.”

그래도 필자는 돈과 명성이 어느정도 충격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린 애플에서 일찌감치 성공을 거뒀고 젊을 때 정말 많은 돈을 벌어들였어요. 하지만 제 인생을 그대로 파괴되지 않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올바른 결정이었죠. 공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로 느낍니다. 저에 대해 써댄 기사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쓴 기사도 저는 신뢰하지 않아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합니다.”

원래 잡스는 영혼을 잃지 않은 채 100억 달러 어치의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그 말을 상기시키자 그는 정곡을 찔렀다면서 다른 답변을 했다. 애플은 이제 영혼이 없는 회사, 자기가 바랬던 회사가 결코 되지 못한 교과서적 사례가 됐다면서 말이다. 성장은 어쩔 수 없이 타협을 요구하게 되는 듯 했다. “그래도 저는 제 인생에 걸쳐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그는 “임시”를 CEO 직함에서 떼어내고 성공가도를 달려서 애플을 지구상에서 제일 가치높은 회사로 만들어냈고, 스스로는 이 시대에서 제일 추앙받는 경영자가 됐다. 그가 가졌던 100억 달러의 꿈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작아보일 정도가 됐다.


Illustration: Martin Ansin

그동안 필자는 운좋게도 기술업계의 훌륭한 쇼를 앞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애플이 새 제품을 발표할 때면 으레 미리 구경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구경을 미리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제품 발표 후 잡스와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비록 쇼맨이라는 단어를 갖고 필자를 공격했지만 잡스는 자기 제품 드러내기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훌륭한 쇼맨이 됐다. 1999년 7월, 필자는 다시금 애플 본사 회의실로 초청을 받아 잡스의 미적취향이 들어간 최초의 노트북, 아이북을 미리 볼 수 있었다. 디자인 책임자인 조니 아이브와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필자와 같이, 며칠 뒤에 하게 될 잡스의 기조연설 리허설을 구경했다. 잡스는 애플의 부활부터 거론한 이후 제품을 선보였다. 그 후 블루베리, 혹은 탠저린이 가미된 하얀색 노트북의 놀라운 디자인을 칭송한 다음(“멋져지기 위해서 일부러 어두워질 필요가 없습니다.”라 말했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컴퓨터를 켰다. “여기에 정말 많은 것이 들어가 있죠. 인터넷에 들어가보고 싶다고요? …애플 사이트로 가 보죠… 자, 애플의 웹사이트입니다.”

그 때 필자는 그 아이북에 이더넷 케이블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잡스는 기뻐했다.

“아. 뭔가 알아차리셨군요! 맞아요!!”

사실 애플은 새로 등장한 무선 인터넷(Wi-Fi) 기술을 홍보한 첫 번째 주요기업이 된다. 일부러라도 무선 인터넷을 보여주고 싶었던 잡스는 퀵타임 웹페이지로 가서 제임스 본드 영화 예고편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집어 들어요! 자, 산책이라도 가 봅시다!”

마치 묘기를 부리며 타파스 쟁반을 갖고 들어오는 스페인 웨이터처럼, 그는 몸소 아이북을 집어 들었다. 그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리가 맨 먼저 이쪽에 들어서는 이유가 이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잡스는 말그대로 춤추고 있었다. 실러와 아이브는 활짝 웃었고 잡스는 컨퍼런스 탁자 주변에서 맘보춤을 추며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는 쇼맨이 맞다. 하지만 쇼맨 이상이다. 그는 궁극의 애플 팬보이였다.

잡스는 종종 이야기의 주제를 자신으로부터 자기 팀 이야기로 재빠르게 돌리곤 했다. 그리고는 제일 사악한 경쟁자 평가를 말하며 필자에게 펜을 내려놓으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전혀 부끄러움 없이 마이크로소프트의 판매-위주의 정신세계를 비판했었다. (2002년, 잡스는 필자에게 고함치듯 말했다. “스티브 발머가 과연 PC를 사랑하나요? 마이클 델이 PC를 사랑하나요? 이 양반들은 자기가 만드는 것을 사랑하질 않아요. 애플은 당연히 사랑하는데도요!”) 잡스는 또한 자기가 없을 때의 애플은 단기이윤을 추구하여 그가 선호해 마지 않았던 장기전략을 내팽겨쳤음을 분명히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보냈지만, 지금 와서 보면 거의 보기 드물정도로 잡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도 있었다.

1999년 7월: 필자는 잡스에게 혹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이란 영화를 봤는지 물어봤다. 이 영화는 TNT에서 제작한 잡스와 빌 게이츠의 전기 영화였다. 그는 첫 방영할(TV판 영화였다) 때 시청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 날 애플에 출근하면 모두들 날 쳐다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날 밤, 래리 엘리슨이 집에 왔어요. 그와 그의 친구, 그리고 제 부인과 제가 같이 영화를 봤습니다. 악랄하고 꽤 비열하더군요. 하지만 배우였던 노와 와일리(Noah Wyle)는 제 버릇과 기벽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다음 날 와일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말 연기를 잘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영화는 최착이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인생이 그렇죠.”

2004년 1월: 잡스는 맥월드 엑스포 기조연설 때마다 연설 이후 제한적인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기조연설 뒤에 하는 마지막 인터뷰는 상당히 위험했다(물론 그 정도의 가치도 상당했다). 잡스가 만약 피곤해 한다면 몇 분 밖에 못 얻지만, 관대한 날이라면 배당된 15분 이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그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자신의 신제품을 앞에 갖다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말고는 아무도 이렇게 못합니다.”

그날, 잡스는 음악-편집 소프트웨어인 거라지밴드(GarageBand)를 막 소개했었지만 필자는 다른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2004년이 매킨토시가 나온지 20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달 앞서기는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에게 20년 전에 나왔던 “미칠정도로 훌륭한(insanely great)” 컴퓨터가 어떻게 변해왔을지 그때는 상상이나 해봤냐고 물어봤다. “정말 완전히 충격받았을 겁니다. 한 번에 하나의 앱만 돌리던 맥은 툴이었어요. 삽이나 곡괭이, 스크류드라이버와 같은 툴이죠. 하지만 이거…” 그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이거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맥은 저의 커뮤니케이션이자 이메일이고 음악이자 저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말 그대로 가족과 같아요. 애플에서 회의를 들어갈 때나 운전할 때, 먹을 때 항상 컴퓨터가 있습니다. 제 인생이에요!”

2003년 10월: 새로운 아이포드의 발표를 언제나 좋아했었다. 새 아이포드가 발표될 때마다 무대 뒤에 가면 탁자 위에 티파니에서 파는 결혼반지처럼 아이포드가 진열돼 있었다. 그러면 어느 색상이 제일 좋냐고 잡스가 물어보곤 했었다. 그 날 오후 잡스는 새 아이포드 소프트웨어를 발표했고, 필자는 잡스에게 그날따라 유독 달랐던 선곡에 대해 물어봤다. 보통은 밥 딜런이나 그레이트풀데드의 노래를 틀었는데 그날은 비틀스의 “In My Life”를 삭막하게 재연구했던 조니 캐시(Johnny Cash)의 곡을 틀었기 때문이다. 잡스는 당시 아내 쥰 카터 캐시가 사망한지 4개월 뒤에 역시 사망했던 캐시에 대한 헌정이어서 그랬다고 인정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곡 중 하나거든요. 그가 사망했을 때 그곳에 가서 조니 캐시의 유품을 들여다 봤습니다. 감동스럽더군요. 부인에게 불렀으리라 생각할 수 있었어요.” 가사는 이렇다. /모든 곳에 추억이 있다/모든 연인과 친구가 지금도 기억난다/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간다/내 인생 모든 것을 사랑했노라./ “노래가 다 빠른 요새 시대에 말입니다. 좀 느린, 이런 곡도 좋더군요.”

잡스가 췌장암을 알았던 때가 바로 그 때였다.

2004년 7월: 그 해 여름 뉴스위크 인터뷰를 위해 본사에서 그를 봤을 때, 잡스는 분명 목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기사 녹음을 위해 사용하고 있던 아이포드를 꺼내들자 그는 아이포드의 플라스틱 케이스가 너무 소름끼치다고 말했다. 너무 혐오스러운 케이스라면서 그는 케이스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이 근사해 보인다고 봐요. 아마 우리와 같아서가 아닐까요? 내년이면 제가 50살이 되잖아요. 저 자신이 스크래치가 좀 나 있는 아이포드같은 느낌입니다.”

당시로서는 좋은 농담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필자도 알고 있다. 잡스가 그 말을 했을 때, 그는 암수술을 받기 겨우 몇 주일 전이었다.

마지막 시절동안 필자는 잡스를 자주 보지 못했다. 병가는 곧 인터뷰도 많이 못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자가 와이어드지로 옮긴 이후 그를 많이 다루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그에게 특정 주제에 대한 배경을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 생각을 좀 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이메일이나 보냈을 뿐이다. 정말 그럴 요량이 있는 경우 그는 답변을 해 줬지만, 그 경우는 반드시 기나긴 대화로 이어졌다.

올해 초 캘리포니아를 방문했을 당시 잡스는 마지막 병가를 떠난 상태였다. 친구인 존 마코프(John Markoff)가 잡스와 연락이 닿았는데, 마코프는 뉴욕타임스에서 과학과 기술 섹션을 다루고 있으며, 필자보다도 잡스에 대해 더 오랫동안 기사를 쓴 친구였다. 그는 스티브에게 혹시 우리가 방문할 수 있는지를 메일로 물어봤다. 기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산책이나 하기 위해서였다. 스티브는 오시라고 했고, 우린 다음 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노트북이나 녹음기 없이 따뜻하고 서두르지도 않는 대화가 90여분간 이어졌다.

무엇이 자기에게 중요한지 잡스도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 했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회사를 위한 일도 하려 했었다. 물론 그 노력은 2011년 10월5일부로 끝났다.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잡스는 애플의 “Think different” 캠페인에 나타나는 인물들을 어떻게 골랐는지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제 일 중 최고였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뭘 상징하는지,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오랜 시간동안 고민했죠. 그러다가 ‘누가 당신의 영웅인가?’라 물어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영웅이 누구인지 알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죠.”

애플이 그 광고 캠페인을 다시 만든다면, 마지막에 누가 추가되어야 할지, 필자는 잘 알고 있다.

Senior writer Steven Levy (steven_levy@wired.com) also wrote about Jeff Bezos.

The Revolution According to Steve Jobs | Magazine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ANNALS OF TECHNOLOGY

THE TWEAKER

The real genius of Steve Jobs
by Malcolm Gladwell

NOVEMBER 14, 2011

1991년, 아직 신혼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부인과 함께 팔로알토 옛날 구역 쪽의 집으로 이사했다. 잡스는 집의 가구를 들여다 놓을 장소 찾기를 늘상 어려워했었다. 이전에 살던 집에는 매트리스와 탁자, 의자만 있었다. 그는 완벽한 집을 원했고, 이번에야말로 무엇이 완벽할지 알아볼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부인과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아이작슨의 매혹적인 전기, “스티브 잡스”를 보면 로렌 파월은 아이작슨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론상의 가구에 대해 우리는 8년간 얘기를 나눴어요. ‘소파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두고 수도 없이 많이 스스로 되물어봤죠.”

Jobs’s sensibility was more editorial than inventive. “I’ll know it when I see it,” he said.

하지만 정말 짜증날 정도의 순간은 세탁기를 고를 때였다. 잡스는 유럽제 세탁기가 미제보다 세제와 물을 덜 쓰고 옷을 더 쉽게 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유럽제 세탁기는 미국제보다 세탁 시간이 두 배로 더 오래 걸렸다. 무엇을 택해야 할까? 잡스의 설명은 이랬다. “이 세탁기를 구입할 경우의 기회비용이 무엇일지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결국 디자인은 물론 우리 가족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죠. 한 시간 내에 세탁을 하는 편이 좋은지, 한 시간 반만에 하는 편이 좋은지, 혹은 더 오래 걸리더라도 세탁 느낌을 더 신경 쓰는지, 사용하는 물의 양을 우리가 신경 쓰는지를 말입니다. 이 문제만 갖고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2주일간 토론을 거쳤어요.”

아이작슨의 전기가 명확하게 해 주는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스티브 잡스는 복잡하고 진을 빼는 사나이였다. 파월이 아이작슨에게 했던 말이다. “극도로 엉망인 부분이 그의 인생과 성격에 남아 있어요. 그것이 사실이죠. 가감없이 쓰셔야 합니다.” 아이작슨은 실제로 가감없이 잡스에 대해 썼다. 그는 잡스의 커리어에 관련된 모든 이와 대화를 나눴고 20~3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인물들까지 만나면서 대화를 녹음했다. 우리가 알기로 잡스는 골목대장이었다. 잡스의 한 친구가 아이작슨에게 했던 말이다. “스티브는 상대방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상대방을 작아지게 만들고 움찔하게 만드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묘한 능력을 갖고 있었어요.” 여자친구가 임신했을 때 잡스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부정했었고, 장애인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부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는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으며, 한 시간에 100마일씩 달리다가 제지를 받았던 잡스는 경찰이 딱지를 너무 오랫동안 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댄 다음, 다시 한 시간에 100마일씩 달리기도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세 번 물리기도 했던 잡스는 언론 인터뷰를 위해 저녁 10시에 도착한 뉴욕의 호텔에 있던 피아노 위치를 바꾸고 딸기와 꽃이 죄다 잘못됐으니 캘러 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원하는 꽃을 한밤중에 들고 들어오자, 잡스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옷이 “메스껍다”고 말했다.) 아이작슨은 1980년대 후반 잡스가 넥스트를 창립후 지은 공장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기계와 로봇은 그가 고안한 색상에 따라 다시 칠해졌다. 벽은 매킨토시 공장에서처럼 박물관같은 하얀색이었으며, 2만 불짜리 가죽 의자와 별도로 만든 계단이 들어 있었다… 그는 165 피트 짜리 제조설비라인이 서킷보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서 조립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방문객이 갤러리를 보는 것처럼 공장을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슨은 실리콘밸리에서 잡스의 변변찮은 출생과 초창기에 애플로 거둔 성공, 그리고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고마는 굴욕적인 축출로 시작하고는, 픽사의 위대한 승리와 애플의 부활을 다뤘다. 90년대 후반 애플로 복귀한 이후, 잡스는 아마 더 영리해지고 더 친절해지지 않았을까? 자연스러운 기대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 병원에서까지 그는 67명의 간호사들 중에 자기가 좋아할 만한 세 명을 골라냈다. “한 번은 그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후에야 심폐담당자가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려 노력했었다.”

잡스는 마스크를 벗어던지고는 디자인이 싫다면서 쓰기를 거부했다. 거의 말할 수가 없는 상태였지만 그는 서로 다른 다섯 개의 마스크를 가져와보면 자기가 하나를 택하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손가락에 걸어둔 산소 모니터도 싫어했다. 그는 이 모니터가 너무나 못생기고 복잡하다고 말했다.

업혁명 최대의 수수께끼가 있다. 어째서 프랑스나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일어났을까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가령 영국에는 석탄이 충분히 있었고 좋은 특허 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노동비가 높았기 때문에 인건비를 줄이려는 혁신이 생길 여지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올해 초, 경제학자인 랄프 마이젠잘(Ralf Meisenzahl)과 조엘 모키르(Joel Mokyr)가 쓴 논문에 따르면 다른 설명도 있다. 특히 영국이 가진 인적자원을, 그들은 “트위커(tweaker)”라 불렀다. 그들은 숙련된 엔지니어와 기능인이 경쟁국보다 월등이 많았기 때문에 영국이 산업혁명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지략과 창조성을 모두 갖춘 인물들이 산업시대의 상징적인 발명을 하여 변경시키고(tweak) 개선했으며 완벽하게 만들어서 제대로 돌아가게 했다.

1779년, 랭카셔의 은퇴한 천재, 새뮤얼 크롬턴(Samuel Crompton)은 뮬 정방기(spinning mule)를 발명하여 면화산업의 기계화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영국의 진짜 장점은 뮬 정방기에 금속제 바퀴를 추가시킨 호위치(Horwich)의 헨리 스톤스(Henry Stones)라 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바퀴의 가속과 감속을 부드럽게 할 방법을 고안한 토팅턴(Tottington)의 제임스 하그리브스(James Hargreaves), 수력을 덧붙인 글라스고(Glasgow)의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바퀴로 가는 실을 뽑아낸 만체스터(Manchester)의 존 케네디(John Kennedy),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만체스터 출신으로서 트위커 중의 트위커랄 수 있는 정밀머신 툴의 마스터, 리차드 로버츠(Richard Roberts)를 뺄 수 없다. 로버츠는 “자동” 정방기를 만들어냈다. 크롬턴의 원작에 비해 정확하면서 속도가 빠르고 신뢰성 있는 정방기였다. 마이젠잘과 모키르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발명을 해내서 고도의 생산성과 보수를 만들어낼 대규모 급의 발명도 이뤄냈다”고 썼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는 새뮤얼 크롬턴일까, 리차드 로버츠일까? 지난 달 잡스의 사망 이후 추도사들을 보면 잡스를 크게 생각하는 비전가이자 발명가로 언급하는 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이작슨의 전기를 보면, 잡스는 트위커 그 이상이었다. 그는 1979년 그 유명한 제록스 PARC 방문 이후 제록스 엔지니어들로부터 마우스와 화면상의 아이콘이라는 매킨토시의 특성을 빌려왔다. 최초의 휴대용 디지탈 뮤직 플레이어는 1996년에 나왔고, 애플 아이포드는 2001년에 첫 등장을 했다. 기존 뮤직플레이어가 “정말 형편 없었기” 때문에 내놓기로 마음 먹어서다. 스마트폰 또한 1990년대에 이미 나오기 시작했고 아이폰은 10년도 더 후인 2007년에 나왔다. 아이작슨에 따르면, “잡스는 휴대폰에 대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예전의 뮤직플레이어가 그러했듯, 모조리 다 역겨웠기 때문이다.” 아이패드의 아이디어도 원래는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가 착안한 아이디어에서 나왔었다. 이 엔지니어는 잡스 가족의 친구와 결혼했었고, 50세 생일날 잡스 집으로 초대받아 들어왔다고 한다.

이 태블릿 PC 소프트웨어로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든 노트북 컴퓨터를 없애고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리라고 얼마나 집적댔는지 모르겠습니다. 애플이 앞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를 라이센스받아야 한다나요. 하지만 그의 태블릿은 전적으로 틀렸어요. 스타일러스가 있더군요. 스타일러스가 있는 한 죽은 겁니다. 저녁 내내 한 10번은 말했을 겁니다. 너무 지겨워서 집에 와서는 “엿먹으라고 해, 태블릿이 어때야 하는지 보여주겠어.”라 했죠.

애플 내부에서도 잡스는 다른 이들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양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이맥과 아이포드, 아이폰의 디자이너였던 조너선 아이브는 아이작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디어를 만드는 과정중에 보고는 ‘별로 안 좋군, 안 좋아. 저게 좋군.” 식으로 말할 겁니다. 그리고나서 저를 포함해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서 그게 자기 아이디어라는듯 얘기하더군요.”

잡스의 감각은 발명가적(inventive)이라기보다는 편집가적(editorial)이다. 그는 뭔가 아이디어를 봤을 때(가령 스타일러스가 붙은 태블릿), 바로 그 아이디어를 개선시켜버리는 재능을 갖고 있다. 아이패드의 첫 번째 광고를 보고 잡스는 카피라이터인 제임스 빈센트(James Vincent)를 일부러 수소문 끝에 찾아내서 직접 말해줬다. “당신의 광고는 형편 없소.”

빈센트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니,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뭘 원하시는지 당신도 제게 말할 수가 없잖아요?”

“모르지. 일단 새 광고를 가져와 봐요. 이제까지 보여준 것은 전혀 맞지가 않았습니다.”

빈센트가 다시 한 번 쏘아붙이자 잡스는 분통을 터뜨렸다. 빈센트의 말이다. “제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어요.” 그 스스로도 격정적이었던 빈센트는 잡스에 지지 않았고, 싸움은 격해졌다. 그런데 빈센트가 “원하는 걸 말씀하시란 말이에요!”라고 고함을 지르자 잡스는 물러섰다.

“일단 다른 걸 가져 와봐요. 그럼 알게 될 테니.”

그럼 알게 될 테니. 이것이 자신의 완벽주의로 끝을 볼 때까지 잡스의 신조였다. 소프트웨어 개발팀이 오리지날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를 그에게 보여줬을 때, 잡스는 타이틀바(창과 문서의 최상단에 있는 헤더(header)를 의미한다)를 바라봤었다. 팀은 그가 타이틀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잡스는 개발자들에게 다른 버전을 가져와 보라고 강요했다. 그렇게 해서 20번을 반복하였는데, 매번 다시 가져갈 때마다 대단히 사소한 수정(tweak)을 계속 했다. 결국 개발자들이 저항하자 잡스는 소리를 질렀다. “매일 바라본다고 상상할 수 있겠소? 이건 작은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르게 해 놓아야 할 일이에요.”

그 유명한 애플의 “Think Different” 광고캠페인은 TBWA\Chiat\Day의 잡스 광고팀에서 나왔지만, 잡스는 올바른 슬로건이 나올 때까지 계속 슬로건을 되풀이해서 가져오라고 했다.

그들은 문법문제를 거론했다. 만약 “다르다”가 동사 “생각하다”를 수정할 목적이라면 부사가 돼야 한다. 즉, “think differently”여야 했다. 그러나 잡스는 명사로도 쓰이는 “different”를 고집했다. “think victory”나 “think beauty”처럼 “different”를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한 일상적으로 “think big”을 사용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잡스의 훗날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광고를 올리기 전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두고 씨름했었죠. 우리가 말하려는 바를 생각해보면, 그건 문법적인 문제였어요. 똑같은 것을 생각지 말라, 씽크 디퍼런트였죠. 좀 다르게, 많이 다르게 생각하라. 다르게 생각하라였습니다. 부사형의 ‘Think differently’는 제게 안 맞는 의미였습니다.”

마이젠잘과 모키르의 주장은 이런 종류의 트위킹이 진보에 본질적이라는 의미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현대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이전까지 존재했던 엔진의 효율성을 두 배로 늘렸다. 하지만 트위커들은 증기기관의 효율성 또한 네 배로 더 늘렸다. 새뮤얼 크롬턴은 마이젠잘과 모키르가 “아마도 제일 생산적인 발명”이라 일컫는 산업혁명의 주인공이랄 수 있지만, 그의 진가는 실제로 몇 년 후에 발생한다. 면화 노동자들의 파업이 생길 때였다. 공장주들은 기존 노동자를 비숙련 노동자로 대체할 방법을 찾고 있었고, 결국 자동화된 방적기, 그러니까 방적공을 요구하지 않는 방적기를 들이려 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크롬턴이 아니었다. 크롬턴은 대중의 관심때문에 홀로 있을 시간이 없다며 후회하던,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인내심과 천재성의 과실을 얻기”는 했지만 주인공은 트위커 중의 트위커인 리차드 로버츠였다. 1825년 프로토타입을 만든 로버츠는 1830년에 훨씬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오래지 않아 방적기 회전축은 이제 400개에서 1,000개로 늘어났다. 그는 설계도 한 장으로 세상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트위커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서 그들을 거의 완벽한 솔루션이 될 때까지 밀어부친다. 전혀 폄하되선 안 될 일이다.

잡스의 친구인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은 개인용 제트키를 갖고 있는데 내부 인테리어를 상당히 신경써서 디자인했다. 잡스는 어느 날인가 자기도 비행기를 갖고자 했고, 엘리슨의 디자인을 연구했다. 엘리슨과 동일한 제트기였지만 잡스는 친구의 디자인을 다시 만들었다. 객실간의 문도 똑같고, 구조변경도 엘리슨과 동일하여 실질적으로는 완전히 다시 만든 디자인이랄 수 없었다. 그런데 엘리슨의 비행기에는 “객실 문에 열림과 닫힘 버튼이 각각 놓여 있었지만, 잡스는 버튼을 하나의 스위치 형태로 바꾸기를 고집했다. 또한 그는 버튼의 윤이 나는 스테인레스 스틸을 좋아하지 않아서 브러쉬드 메탈로 버튼을 바꾸었다.” 엘리슨의 디자이너를 고용한 잡스는 “곧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심술과 자기도취증, 무례함을 통해 완벽을 추구한 궤벽이야말로 잡스 인생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의 말이다. “그의 비행기와 제 것을 봤더니, 잡스가 해 놓은 모든 것이 더 낫더라구요.”

글이 개발한 운영체제로 돌아가는 안드로이드 폰이 나타났을 때, 아이작슨은 제일 크게 분노한 스티브 잡스의 모습을 보았다. 잡스는 터치스크린과 아이콘을 가진 안드로이드 휴대폰이 아이폰을 베꼈다고 간주하여 고발하기로 했다. 잡스가 아이작슨에게 한 말이다.

우리의 소송은 이겁니다. “구글, 빌어먹을 자식이 우리 아이폰을, 그것도 대대적으로 베꼈다.” 정말 큰 도적질이에요. 필요하다면 죽을 때까지 애플의 현금 400억 달러를 다 쓰더라도 바로잡겠습니다. 안드로이드는 훔친 제품이에요. 파괴시킬 겁니다. 수소폭탄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이에요. 자기들에게 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두렵겠죠. 검색만 빼면 구글 제품들, 안드로이드와 구글 Docs는 쓰레기(****)입니다.

1980년대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를 선보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윈도는 매킨토시처럼 아이콘과 마우스를 사용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잡스는 너무나 분노하여 게이츠를 애플 본부로 소환시켰다. 아이작슨의 글이다. “그들은 잡스의 회의실에서 만났고 게이츠 주변을 10여 명의 애플 직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잡스의 공격을 보고 싶어했다. 역시나 잡스였다. 그는 호통쳤다. ‘당신은 우리를 베꼈어! 당신을 믿었는데 이제와서 우리를 훔쳐가다니!’

게이츠는 차분하게 잡스를 바라봤다. 윈도우와 아이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게이츠가 말을 시작했다. ‘글쎄요, 스티브. 사물을 바라보는데에는 한 가지 이상의 관점이 있어요. 우리 모두 제록스라 불리는 부자 이웃집을 턴 것 아닐까요? 텔레비전 셋트를 훔치려고 제록스네 집을 들어갔더니 이미 당신이 훔쳐갔더라 이거죠.'”

잡스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가져다가 바꾸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이 자기처럼 하는 것을 싫어했다. 마음 속으로 자기가 한 것은 특별하다 여겼을 것이다. 잡스는 펩시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애플 CEO로 영입하기 위해 1983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평생 설탕물이나 팔고 싶으시오, 아니면 세상을 바꿔보시겠소?” 잡스가 전기집필을 위해 아이작슨에게 처음 접촉했을 때, 아이작슨은 자기가 벤자민 프랭클린과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쓴 적이 있음을 알고 있는지 잡스에게 (“반쯤 농담삼아”) 물어봤다. “혹시 당신 자신을 그 두 인물의 자연스러운 계승자로 여기시나요?” 애플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는 언제나 닫혀 있으며, 잡스는 아이폰과 아이포드, 아이패드 또한 개방시키려 하지 않는다. 자기 눈에 그 제품들은 완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세대 최대의 트위커는 트위크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빌 게이츠 얘기다. 잡스의 동년배들 중에서도 빌 게이츠만이 잡스를 성나게 한 이유일 것이다. 게이츠는 완벽주의의 낭만성에 저항했다. 아이작슨이 게이츠에 대해 연이어 물어봐서인지, 잡스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빌에게는 상상력이 없어요. 아무 것도 발명하지 않았죠. 그러니 기술보다는 자선사업이 더 편안한 모양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아이디어를 뻔뻔스럽게 베끼기만 했죠.”

600 페이지 말미에 가까워진다면 잡스는 역시나 잡스라 여기게 될 것이다. 통찰력과 잔인함, 망상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다음 세상을 관장하기보다는 말라리아 퇴치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상상력 부족의 증거가 되진 못한다. 게이츠가 벌이고 있는 규모의 자선사업은 그 자체로 상상력을 원대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잡스의 비전과 뛰어남, 그리고 완벽주의는 그 자체로 폭이 좁다. 그는 젊은이일 때 정복했던 영역을 끝없이 되풀이해가면서 마지막까지 트윅을 거듭했었다.

암이 그의 신체를 정복하여 사망에 이르기 직전, 그의 위대한 열정은 애플의 새로운 본사빌딩 디자인에 있었다. 잡스는 디테일에 자신을 내던졌다. 아이작슨의 글이다. “그는 계속 새로운 컨셉을 제시했으며, 종종 완전히 다른 모양을 거론하기도 하면서 다시 일을 시작하여 더 많은 대안을 내놓곤 했다.” 특히 그는 유리에 집착하여, 애플 소매점에 있는 거대 판유리로부터 배운 것을 확장시키고 싶어했었다. “단순히 판유리를 세우지 않고 곡면화시키거나 매끄럽게 결합시켜야 한다… 계획상의 중앙 뜰은 보통의 도시 블럭 세 군데를 합친 것 이상, 혹은 축구장 길이와 맞먹는 크기이며, 그는 내게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과 함께 보여줬다.” 건축가들은 창을 열 수 있게 하자고 했지만 잡스는 안 된다고 했다. “잡스는 뭔가 열어볼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엉망이 되기 때문’이었다.”

ILLUSTRATION: ANDRÉ CARRILHO

Steve Jobs’s Real Genius : The New Yorker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Steve Jobs and Me: A journalist reminisces

October 25, 2011: 5:00 AM ET

Fortune contributor Brent Schlender shares some of the stories and personal photographs he collected during more than two decades as Steve Jobs’ chronicler and confidant.

FORTUNE — 스티브 잡스의 뛰어난 커리어에 대해 심도깊은 기사를 쓴 기자 대부분은 내가 지금 현대의 신화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피할 수가 없다. 잡스가 조지 클루니만큼이나 카리스마 있고, 마키아벨리 만큼이나 교묘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도와준 덕에 생겨난 잡스의 전설은 잡스의 자아 이상으로 수많은 목적을 위해 활용됐다. 잡스는 자신의 상상 하에서 태어난 놀라운 기술을 시장에 선보일 줄 알았던 강력한 힘이었으며, 자기 세대의 특징인 디지탈 혁명을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했다.


Jobs’ scribe: Schlender (left) interviewing Jobs at a Next company picnic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브도 역시 인간이었다. 그의 인생은 불화와 모순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랑스럽게 권위를 조롱했지만 스스로의 원칙은 그 한계까지 준수했었다. 멍청한 사람들을 못참았던 그였지만 꼭 필요한 인물이 있으면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기도 했던 잡스는 궁극의 나노(nano)-매니저였다. 그의 도움 없이는 완전히 인식하기 힘든 큰 그림을 그러낼 줄 아는 인물이 잡스였다.

최고로 좋은 것 외에는 절대 합의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걸프스트림 제트기를 대단히 사랑했던 잡스는 뜻밖에도 결혼에 이어 아버지가 된 이후 평범한 생활을 영위했다. 극도로 사생활을 지켰지만 외부 시선으로부터 숨겼을 뿐, 그는 자신의 건강을 우리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결국 그는 사망하고말았다. 최후의 아이러니는, 여러모로 봤을 때 그가 죽었을 때가 돼서야 그의 능력이 마침내 최고조에 달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계속 좀 냉담하게 대했지만, 우리들 저널리스트는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를 좇을 수 있는대로 좇았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갔고, 앞으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스티브는 자기 스스로를 다 소모했다.

외부인으로서 가끔 초대받은 내부인도 됐던 필자는 스티브와 함께 25년을 같이 일을 했었다. 개인적인 신뢰를 깬다거나 전형적인 분석적 사업이야기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스티브에게 단축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을 텐데, 스티브의 신화에 대해 3차원의 깊은 관측과 경험이라 할 수 있을 이야기들이다.

그동안 실제로 잡스의 전설이 너무나 전형화될 때가 많았다. 게다가 여러모로 잡스 스스로가 그런 전형화된 전설을 좋아하기도 했다. 가령 잡스는 컴퓨터 마우스이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혹은 픽사 영화이건 상관 없이 내세우기로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그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수많은 일화가 있다). 그러한 재주를 묘사하기 위한 적절하고 독창적인 방법을 찾아내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초창기 스티브가 아직 20대일 시절, 한 엔지니어가 잡스는 걸어다니고 말도 할 줄 아는 “현실 왜곡의 장”이라 이름붙였을 때 그 비유는 (잡스가 대단히 혐오하는 종류이지만) 고착화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뻔뻔하다(brash)”라든가 “변덕스럽다(mercurial)”는 성격은 악명높은 잡스의 까칠한 성격을 묘사할 때 천편일률적으로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현실은 달랐다. 그의 재능과 특이한 성격은 너무나 다양하고 보완적이면서 평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의 천재성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방식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 또한 큰 재미랄 수 있겠는데, 로스 페로(Ross Perot)는 잡스를 “이제까지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터무니없는(damnedest) 사람”이라 말한 적 있고, 비지니스계의 구루인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잡스를 “사업계의 베토벤”으로 비유했으며,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은 잡스를 “우리시대의 피카소”라 칭했다.

여러가지 Fortune 표지기사에서 보면, 필자는 잡스를 애플의 “수석 미학 책임자(chief esthetic officer)”이자 픽사의 “오리지날 가상현실 기획단장(original impresario of virtual reality)”이라 불렀었다. 2000년대 초 애플의 실적이 부진했을 당시(아이포드가 애플을 급성장시키기 전이다), 필자는 그를 “가라앉고 있는 왕국의 늙은 왕자”라 조롱하기도 했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그 “뻔뻔스럽고 변덕스러우신” 잡스는 곧바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그 기사가 얼마나 신나게 웃기던지 얘기해 줬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1999 – Product review: Jobs scrutinizes the “dock” of icons that appears on the bottom of the screen of Apple’s OS X user interface with an anxious team of engineers, designers, and marketers.

잡스를 처음 만났을 때는 1987년 2월이었다. 당시 필자는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술부문 수석기자를 맡아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이리어로 이사한지 얼마 안 됐었다. 당시 잡스는 1985년 애플에서 축출된 이후 “야인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잡스는 애플에서 나온지 얼마 안 돼서 애플 동료들을 이끌고 새로운 회사, 넥스트를 창립했고, 1986년에는 천만 달러를 들여서 디지탈 애니메이션 실험실 수준의 제작사, 나중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불리게 될 회사를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부터 인수했다. 10년 후, 스티브를 정말로 억만장자로 만들어준 존재가 바로 픽사였다. 픽사는 1995년 주식상장을 했고,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자 잡스는 디즈니 최대 주주인 동시에 이사가 되어 수 십억 달러의 지분을 갖는다.

잡스는 넥스트와 픽사를 홍보하고 사업가이자 기술산업의 현자로 이미지를 다시 세우기 위해 대중의 주목을 계속 받기 원했기 때문에, 우리와의 관계도 그가 신경을 좀 썼다. 그는 물론 필자를 알고 있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필자가 애플을 다뤘기 때문이다. 만약 “기밀정보(intelligence)”를 교환한다거나 실제로 쿠퍼티노에서 무슨 드라마가 일어나고 있는지 내막을 알고싶다고 했다면 잡스는 기꺼이 필자에게 관련 사실을 알려줬을 것이다.

필자는 1989년 포천지로 옮기기 전, 넥스트와 픽사 두 회사에 관련한 기사를 여러 편 작성했고, 잡스도 필자와 개인적으로 어울린 듯 했었다. 어울린 듯 했다고 한 이유는, 일단 잡스와 나이가 같으면서 비슷한 청소년기를 겪었고 책과 영화, 음악에 대해 상당히 비슷한 취향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로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 중 하나가, 잡스의 소설가 여동생, 모나 심슨과 거의 결혼할 뻔 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이 얼마나 작은 세상이란 말인가. (어린 시절 입양됐던 스티브는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 자기 여동생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있던 와중이었다.)

아무튼 필자는 언제나 기자였고, 스티브는 그 기사의 원천이자 대상이었다. 필자는 잉크로 얼룩진 기자놈이었고 그는 록스타였다. 뭣보다도 그는 자기 이야기를 최고의, 최대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바랬으며, 필자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더 큰 뭔가를 위해 제일 앞좌석을 앉고 싶어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후 20년간 우리의 사교적인, 개인적인 만남을 통한 목적의 달성은 저널리즘적인 관계라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항상 그에게 좋지만은 않았다.


2001 – Front-row seat to history: Schlender captured on camera the iPod launch event (left and center); nine months earlier he traveled to Macworld Toyko and watched Jobs (right) prep for his keynote.

스티브와의 만남은 주로 기조연설의 스티브가 아닌, 그의 진솔한 모습에서 사업과 기술, 예술과 미디어, 정치, 세계의 주요 사건, 심지어 그의 사생활에 대한 의견을 빼내기 위함이었다. 그의 분석은 직설적이면서도 날카로웠다. 그의 깊은 통찰력과 식견을 알기 시작하면, 퍼포먼스에 대한 그의 애호 또한 그의 믿을 수 없으리만치 빠른 두뇌를 가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기사와 관계 없이 그와 나눴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정말 배울 점이 많았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본지 수석 편집자들마저도 일부러 애플까지 와서 필자와 잡스의 인터뷰를 따라붙곤 했었다.

가령 현재 타임지의 편집장으로 있는 존 휴이(John Huey)는 2003년, 쿠퍼티노 애플 본사의 필자와 합류한 적이 있었다. 기사 인터뷰용이 아니라 당시 AOL 타임워너라 알려져 있던 모회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정리할 수 있을지 잡스에게서 조언을 듣기 위해 필자를 따라온 것이었다. 스티브는 못믿겠다는듯 우리를 보고는 이건 시간낭비라며 투덜거렸다. 그 후 잡스는 20분간 AOL의 전화모뎀 인터넷 서비스 사업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AOL때문에 타임워너의 훨씬 유망한 초고속 인터넷 발전을 어떻게 발목잡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줬다. 그리고나서 그는 온라인 콘텐트를 위한 AOL의 “엽서생산 가치(postcard production values)”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졌는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휴이는, “말씀을 들으니, 고칠 수가 없다고 보시는 모양인데요.”라 말했다. 그러자 잡스는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이 아니오. 어떻게 고칠지는 알고 있어요. 제가 흥미가 없을 뿐입니다.” 그러고나서 그는 칠판으로 가서 15분동안 AOL을 보다 미디어 기업으로 탈바꿈시킬만한 전략을 도표로 그려냈다. (사실 AOL은 결국 어느정도 잡스의 전략을 따르게 되고, 수 년 후, 타임워너를 분리시키면서 다소간 성공을 거뒀다.)

잡스는 마커의 뚜껑을 닫으며 다시 결론을 내렸다. “저라면 이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건데, 저는 흥미가 없어요.”


2003 – Cover shoot: When photographer Michael O’Neill shot singer Sheryl Crow and Jobs for a Fortune cover, Schlender was there with a digital camera of his own.

스티브 자신이 추진하는 회의가 정말 재미날 때가 종종 있었다. 보통은 스티브가 어느 날 갑자기 대단히 특별한 목적을 갖고 필자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1995년 5월의 한 토요일 아침, 그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초등학교생 딸 둘을 데리고 팔로알토의 자기 집으로 곧바로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리드(스티브의 아들 이름)를 오늘 아침 보고 있었는데, 뭔가 멋진 볼거리가 있어요”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세 살바기였던 리드가 부엌문 앞에서 우리를 반겨줬다. 그런데 리드는 파랗고 빨간 실크 스카프를 걸치고서 “내가 마녀다!”하고 날카롭게 외치고 있었다.

팝콘을 좀 만들고 아이들에게 주스를 준 다음, 스티브는 우리에게 VHS 카세트를 하나 보여줬다. 화면에는 오프닝 크레디트를 시늉하고 있지만 읽기 어려운 연필로 그린 스토리보드가 나오며 음악이 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풀컬러로 나타났고 세 명의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이 영화 절반도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넋을 잃고 있었다. 사운드트랙은 끝났지만, 전체 화면은 아직 부분적으로만 애니메이션화 돼 있거나 스토리보드의 형태였다.

나중에 보니 그 화면은 토이스토리의 초기 컷이었다. 토이스토리는 6개월 후, 프리미어를 갖게 될 픽사의 영화였고, 이사진도 아직 이 영상을 못 본 상태였다. 하지만 필자와 딸들을 부른 것은 스티브 잡스-스타일의 시장조사였던 셈이다. 비디오가 끝나고 나자 그는 필자가 아니라 필자의 딸들에게 질문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니? 포카혼타스만큼 좋니?” 그레타와 페르난다는 힘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자, 그러면 라이언킹만큼 좋니?” 그러자 페르난다가 답했다. “토이스토리를 5~6번 본 다음에 마음을 정할래요.”

스티브와의 만남이 언제나 재미나지는 않았다. 1995년 성탄절 이후 일요일, 스티브는 애플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의 “뒷담화(on background)” 형식으로 얘기하자면서 필자를 집으로 불렀다. 당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혹은 필립스가 문제 많던 애플을 인수할지 모른다는 루머가 많았었다. 스티브는 애플이 인수시장에 실제로 들어설 경우, 자신과 자신의 “베스트 프렌드”인 오라클 CEO, 래리 엘리슨이 입찰을 고려하겠다는 힌트를 줬었다.

좀 이상게 들려서, 필자는 잡스에게 분노때문에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스티브는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지만, 필자를 차로 데려다 주면서 정말 비밀이라고 맹세했다. 필자의 자동차는 당시 1976년산 토요타 셀리카(Celica)였다. 필자의 차를 보자 잡스는 “아이들을 이 차로 데려다주지 말기를 정말 바랍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차에 에어백이 없어요. 차 갖다 버리세요.”라 말했다.

1년 후인 1996년 말, 엘리슨과 팀을 이루지 않고, 잡스는 애플 CEO였던 길 아멜리오를 설득시켜서 애플이 넥스트를 4억 달러에 인수하도록 했고, 자신은 특별고문으로 애플에 들어갔다. 한 번 애플 안으로 들어가자 정확히 7개월 후 그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고, 넥스트의 자기 사람을 애플 요직에 앉혀 놓았다. 잡스의 황무지 생활은 끝났고, 스티브 잡스의 신화가 다시금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 후 7년간 필자는 애플 내 스티브의 리더쉽에 대해 4편의 표지기사를 작성하고 편집도 한 편 했었다. 그는 포천지에게 맥오에스텐 운영체제의 첫 번째 시연을 독점적으로 보여줬었고, 맥월드 기조연설의 최종 리허설동안에 자기가 얼마나 신경과민 상태가 되는지 지켜볼 유일한 저널리스트로 필자를 초대하기도 했었다. 2001년, 그는 공식 발표 몇 주일 전, 최초의 아이포드를 엠바고 상태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필자의 아이포드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년 후, 아이튠스 뮤직스토어가 온라인화되기 전에도 그는 본지에게 먼저 들여다 볼 기회를 줬다.

물론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 쓴 기사를 심각하게 여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때가 되면 잡스는 필자에게 먼저 연락을 했었다. 2001년 6월, CEO에 대한 과도한 보상을 문제 삼았던 표지기사 “Inside the Great CEO Pay Heist”의 표지 이미지에 그를 사용하자 잡스는 포천지에서 애플 광고를 모두 바로 빼겠다고 위협했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필자가 아니었지만 일단 필자는 잡스에게 포천지 편집자에게 기사 내용이 자신에게 불공정하게 비쳐질 수 있다는 서한을 보내도록 권유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유감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말이다

필자가 스티브 잡스를 다른 유명인사보다 유독 강하게 느끼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잡스처럼 필자 또한 수많은 시간을 병상에서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최초의 심장마비가 나타났을 때 스티브도 그 소식을 알고는 병실까지 전화해서 담배좀 그만 피라고 호되게 꾸짖은 적이 있었다. 6년 전, 뇌와 등뼈에 인공심장 밸브가 뇌막염을 일으켰을 때 필자는 거의 죽은 상태였고 청력 대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당시 5주일간 입원하여 생사를 넘나들던 때, 스티브는 필자를 두 번 방문했었다.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필담으로 써야 했다. 그가 썼던 글 중에는 발설해선 안 될 빌 게이츠에 대한 농담도 적혀 있었다.

회복됐을 때 필자는 어째서 특정 기업가들은 자신이 만든 회사보다 훨씬 빠르게 업계 지도자로 자라날 수 있는지 해설을 시도하는 Founders Keepers라는 책 프로젝트를 시작했었다. 이 책의 주요 대상은 역시 스티브였고, 그 외에 빌 게이츠와 마이클 델, 앤디 그로브도 있었다. 모두들 2008년 11월 하순, 실리콘밸리의 원탁회의를 필자와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해 놓았다.

그런데 회의가 있기 1주일 전, 스티브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정말 이 말을 하기는 싫은데, 브렌트. 우리 회의에 못 나가게 됐어요.” 보청기가 그렇게 들리도록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가라앉아 있었다. “취소 이유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리라 믿어서 하는 말인데, 사실을 알려드리죠. 건강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말로요. 지금 아무하고도 만날 상황이 아니에요. 추수감사절 이후에 병가를 갈 예정입니다.” 3주일 후, 그는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 우리는 몇 번이고 대화를 나눴지만 3년 후, 그는 사망했다.

스티브 잡스는 정말 살아있는 전설이자 프리마돈나였으며, 저널리스트가 꿈꿀만한 인터뷰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원할 때는 어떻게든 매력을 발휘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부리는 심술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그렇다. 그는 삶보다 더 거대했지만, 삶은 그를 저버렸다. 달리 말해서, 그도 우리처럼, 인간이었다.

This article is from the November 7, 2011 issue of Fortune.

Steve Jobs and Me: A journalist reminisces – Fortune Tech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OP-ED CONTRIBUTOR

A Sister’s Eulogy for Steve Jobs

By MONA SIMPSON
Published: October 30, 2011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독자로 자라났다. 우리는 가난했고, 아버지가 시리아 출신 이민자였다고 들어서 아버지는 아마 오마 샤리프(Omar Sharif)를 닮잖았을까 상상하곤 했었다. 그가 부자이고 친절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좀 도와주면 좋잖을까? (아직 우리 아파트에는 가구도 다 갖춰지지 않았었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는 아버지가 아랍인들을 위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전화번호를 바꾼 다음에 주소도 남기지 않았다고 믿으려 노력했었다.

페미니스트이기는 했지만 나는 인생에 걸쳐, 사랑할 남자,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기다려 왔었다. 아무래도 그런 남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닐까 싶었는데, 25살이 되던 해, 나는 오빠라는 남자를 만났다.

당시 난 첫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하면서 뉴욕에 살고 있었다. 한 작은 잡지사에 일자리를 얻어 벽장만한 크기의 사무실에서 다른 작가지망생 셋과 같이 일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변호사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들에게 직장 의료보험을 사달라고 졸라댔던 캘리포니아 출신 중산층 아가씨인 내게 말이다. 그 변호사 말에 따르면, 자기 고객 중에 부자이고 유명한 분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나의 잃어버린 오빠라고 했었다. 우리들은 열광했었다. 당시는 1985년, 우리들은 최신 문학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디킨스 소설에나 나오던 음모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변호사가 오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가 누구일지 추측놀이를 시작했다. 제일 그럴듯한 후보는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였다. 다만 나는 마음 속으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문학적인 후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별 노력 없이도 뛰어나게,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스티브를 만났다. 그 때 오빠는 청바지를 입은, 아랍계 혹은 유태계처럼 보였으며, 오마 샤리프보다 훨씬 잘생겼었다.

우린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우연히도 우리 둘 다 산책을 좋아했었는데, 사실 첫 번째 날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친구가 한 명 더 생겼거니 생각했었다. 오빠는 자기가 컴퓨터 일을 한다고 말했었다.

난 컴퓨터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작업은 올리베티(Olivetti) 수동 타자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한테는 최근 크로멤코(Cromemco)라 불리는 컴퓨터를 한 대 구입해볼까 생각중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빠는 그것도 좋긴 하지만, 자기가 미칠정도로(insanely) 아름다운 컴퓨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오빠로부터 알아낸 사실을 몇 가지 알려드리겠다. 27년이 넘게 오빠를 알아왔는데,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연도에 따른 시기가 아니라, 상태에 따른 구분이다. 그의 인생 전체와 그의 병환, 그리고 그의 죽음이다.

오빠는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정말 매일같이 열심히 일했다.

정말 간단하게 말했는데, 사실이다.

오빠는 멍한 채로 있는 적이 없었다.

결과가 실패라 할지라도 오빠는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오빠만큼 영리한 인물이면 자기가 시도했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나도 그럴 테고.

오빠가 애플로부터 쫓겨났을 때 상황은 고통스러웠다. 오빠는 실리콘밸리 지도자 500명이 당시 대통령과 만찬모임을 같이 했었는데, 자기는 초대받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오빠는 상처를 받았지만 곧바로 넥스트 일을, 또다시 매일같이 했다.

오빠가 가진 가장 큰 가치는 참신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오빠는 혁신가에게 대단히 충성스러웠다. 좋은 셔츠가 있으면, 10벌이건 100벌이건 주문하기 때문이다. 팔로알토의 집에만 하더라도 장례식 때 교회에 모인 사람 모두 입을 수 있는 분량의 검정색 터틀넥이 있다.

오빠는 유행이나 술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기 나이대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미학에 대한 철학을 보면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패션은 지금은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보기 흉해진다. 예술은 지금 보기 흉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아름다워진다.”

오빠는 언제나 나중에 아름다워지는 쪽을 택했었다.

게다가 기꺼이 인정받지 않는 편을 택하기도 했었다.

대통령 만찬에 초대받지 못했던 오빠는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로 주문한 동일한 기종의 스포츠카를 몰고 플랫폼 개발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던 넥스트로 되돌아갔다. 나중에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넥스트를 사용하여 월드와이드웹 프로그램을 작성한다.

사랑에 대해 얘기한 시간만 따지면 오빠는 소녀같았다. 사랑은 오빠가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였으며, 신들 중의 신이었다. 오빠는 자기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로맨스도 알아보고 걱정하곤 했었다.

근사한 여자라도 보면 오빠는 항상 말을 걸었다. “헤이, 싱글이신가요? 혹시 내 여동생이랑 저녁먹으러 오지 않을래요?”

로렌을 만났던 날 내게 전화했던 일도 기억난다. “아름다워. 정말 똑똑한 여자 중의 여자야. 그녀랑 결혼할 거야.”

리드가 태어났을 때도 오빠의 마구 쏟아지는 수다는 그칠줄을 몰랐다. 오빠는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리사의 남자친구 문제를 고민하고, 에린의 여행과 치마길이를 걱정했으며, 이브의 승마가 안전한지 우려한, 아버지였다.

리드의 졸업식에 참여했다면 누구도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오빠와 리드가 같이 느리게 춤췄던 장면이다.

로렌에 대한 변치 않은 사랑이 그를 지탱시켜줬다. 오빠는 사랑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이뤄진다면서, 사랑이라는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 오빠는 절대로 비꼬거나 회의적이지 않았고 매사 긍정적이었다. 지금도 오빠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다.

오빠는 젊은 시절에 성공을 거뒀고, 그 성공때문에 자기가 고립됐다고 느꼈었다. 내가 알기로 그 때 오빠가 내린 결정 대부분은 자신을 둘러싼 벽 없애기였다. 로스알토스 출신의 중산층 소년으로서 오빠는 뉴저지 중산층 출신의 소녀와 사랑에 빠졌고, 리사와 리드, 에린, 이브를 평범하고 튼튼한 아이들로 기르는 것이 둘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오빠의 집은 예술작품이나 광택으로 겁을 주는 집이 아니다. 스티브와 로렌이 같이 살았을 때 저녁은 보통 잔디밭에서, 가끔은 딱 채소 한 가지만 갖고 먹을 때가 많았다. 딱 한 가지의 채소, 물론 양은 많았지만, 제철에 나온 브로콜리 뿐이었다. 간단히 준비한 음식이었으며, 싱싱한 허브와 곁들인 식사이기도 했다.

젊은 백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언제나 공항으로 날 맞이하러 나와줬었다. 청바지를 입고서 말이다.

업무중인 오빠에게 가족 중 누군가가 전화했던 일도 기억난다. 비서인 리네타가, “아버지는 지금 회의중이셔. 그래도 알려드릴까?”라 했었다.

핼로윈 때마다 리드가 마녀 복장을 고집하면, 오빠와 올케, 에린과 이브는 모두 위칸(wiccan, 마법숭배자)로 변장하곤 했었다.

부엌을 리모델링할 때 가족들은 차고에 있는 철판에서 요리를 했었다. 같은 시기 픽사 빌딩이 건축중이었고 절반 정도 완성돼 있었으며 팔로알토 집도 마찬가지였다. 욕실은 오래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 점이 결정적인 차이랄 수 있다. 정말 훌륭한 집의 욕실이었고 오빠는 그걸 알아본 것이었다.

물론 오빠가 자신의 성공을 전혀 즐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성공을 매우 많이 즐겼다. 물론 뒷자리 숫자를 몇 개 뺀 채로 말이다. 오빠는 팔로알토의 자전거 가게에 가서 제일 좋은 자전거도 자기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정말로 좋아했었다.그리고 오빠는 그 자전거를 샀다.

오빠는 겸손했고, 계속 배우려 했다.

한 번은 자기가 다르게 자라났더라면 아마 수학자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다. 대학에 대해 숭배하는듯이 말하고, 스탠포드 대학교 캠퍼스를 산책하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인생의 마지막 시절, 오빠는 미래 애플 캠퍼스의 벽에 어떤 그림이 어울릴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이전까지 몰랐던 화가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을 공부했었다.

오빠는 기발한 생각도 자주 했다. 장미차에 쓰이는 영국과 중국 장미의 역사를 알고, 장미업자 데이비드 오스틴(David Austin)의 장미 중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미가 있는 CEO가 과연 또 있을까?

오빠는 모든 주머니에 장난거리를 가득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빠가 좋아하는 노래, 오빠가 잘라내어서 서랍 안에 집어 넣은 시, 예외적이라 할만할 정도로 가까운 20년의 결혼관계인데도 오빠의 선물을 아마 로렌이 다 발견해낼 것이다. 매일같이 오빠에게 말했지만, 뉴욕타임스에서 애플 특허를 다룬 기사를 봤을 때 완벽한 계단에 대한 스케치 그림이 지금도 기쁘고 놀라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오빠와 네 명의 아이, 올케, 우리 모두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오빠는 행복을 정말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오빠는 아팠다. 그의 인생이 보다 소규모로 줄어드는 광경을 우리는 지켜봤다. 한 때 그는 파리 시내를 거닐거나 쿄토의 조그마한 수제소바집을 발견하고, 우아하게 스키를 타기도 했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좀 서툴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바깥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좋은 복숭아와 같은 일상적인 기쁨도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없게 됐다.

하지만 놀라운 점이 있다. 오빠가 아팠을 때 배웠던 교훈이다. 그 많은 것을 못 할 때조차도 얼마나 많은 것이 남아 있던지.

책상을 갖고 다시 걷기 위해 노력했던 일이 기억난다. 간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 오빠는 하루에 한 번씩 다리로 딛고 섰었다. 오빠의 다리는 몸을 지탱하기에 너무나 말라 보였지만 오빠는 과감하게 책상에서 팔을 뗐다. 멤피스 병원 복도의 간호근무실까지 책상을 밀면서 간 다음, 책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주위를 돌아본 다음 다시 걸었다. 오빠는 자신의 걸음걸이를 매일같이 세가지고 다음에는 조금씩 더 걸었다.

올케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빠의 눈을 바라봤다. “할 수 있어요, 여보.”

그러자 오빠의 눈이 넓어졌고, 입술도 팽팽하게 당겨졌다.

오빠는 노력했다. 언제나, 언제나 노력했고, 그 노력의 안에는 언제나 사랑이 들어 있었다. 그는 전적으로 감정적인 사내였다.

오빠가 자기 자신을 위해 고통을 참어가며 그 끔찍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오빠의 목표는 아들 리드의 고등학교 졸업식 참가와 딸 에린의 쿄토 여행, 그리고 언젠가 은퇴한 이후에 가족들을 데리고 전세계를 돌아다닐 계획으로 건조중이던 보트였다.

아픈 와중에서도 오빠의 취향과 차별, 판단은 여전했다. 오빠는 67명의 간호사를 면접한 다음,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완전히 신뢰하여 오빠의 사망 때까지 자리를 지킨 간호사 세 명(트레이시와 알투로, 엘햄)을 선별했다.

만성 폐렴에 걸렸을 때 의사는 오빠에게 모든 것을 금지했었다. 심지어 얼음도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자기 이름을 잘라 먹거나 선 긋는 것을 싫어했던이름을 내세우거나, 새치기를 싫어했던 오빠는 이번에 좀 특별하게 취급받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이게 특별 취급이에요.

그러자 오빠는 내게 몸을 기울여서, “조금 더 특별하기를 원해.”라 말했다.

관이 삽입됐을 때 오빠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메모장을 하나 달라고 했었다. 메모장을 받자 오빠는 병원 침실에서 아이패드를 지탱할 수 있는 기기를 스케치했고, 새로운 유동 모니터와 엑스레이 장비도 디자인했다. 오빠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병원 내 각종 장비도 다시 디자인했고, 올케가 들어올 때마다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지켜봤다.

오빠는 메모장에 이런 말을 적었다. “정말로 큰 뭔가를 하려면 날 믿어야 함.” 그가 날 올려다 봤다. 너도 그래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았다. 결국 우리는 의사 몰래 얼음을 가져다 줬다.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여기에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지난 해, 건강이 좀 호전됐을 때 오빠는 프로젝트를 당장 시작하고는 애플 친구들을 불러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겠노라는 약속까지 끌어냈다. 네덜란드의 보트 제작자도 멋진 스테인레스 철 선체를 목재로 마감시킬 준비를 마쳤다. 세 딸은 결혼을 안 했으며(둘은 아직 어린 소녀이긴 하다), 오빠는 언젠가 내 결혼식 날 내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던 것처럼, 딸 손을 잡고 결혼식에 들어서길 바랬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모두 결국은 죽는다. 한 이야기의 중간, 아니 많은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다.

수 년간 암투병을 하던 환자가 죽는다고 해서 별로 놀랍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우리는 오빠의 사망을 얘기치 못 했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알아낸 사실이 있다. 성격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죽는 방법도 달라진다.

화요일 아침, 오빠는 내게 급히 집으로 올 수 있겠냐고 전화했었다. 오빠 목소리는 다정했고 사랑스러웠지만 뭔가 자기 짐을 차에 싣고 여행을 떠나려는 아니, 여행을 이미 시작한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우리를 떠나서 미안하다는, 정말 미안한 목소리였다.

오빠가 작별인사를 시작하려 해서 난 성급히 오빠를 막아섰다. “기다려, 내가 가. 지금 공항 가는 택시 안이야. 내가 갈께.”

“모나, 혹시 제 때 못 올까 걱정돼서 말해주는 거야.”

내가 도착했을 때, 오빠와 올케는 서로 매일 같이 일하고 살아온 동료인 양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오빠는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후 2시쯤 되자, 올케가 그를 깨웠다. 애플에서 온 친구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그는 더 이상 깨지 못했다.

오빠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힘들지만 찬찬히, 의도적인 숨소리였다. 발걸음을 다시 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오빠는 숨소리마저 훈련하고 있던 것이다. 오빠에게 죽음이란 없다. 오빠는 죽음을 이겨냈다.

오빠가 이제 안녕이라며 항상 계획했던 것만큼 오래 못 살아서 정말 미안하고, 자기는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말했다.

피셔 박사는 그날 저녁을 넘길 확률이 50/50이라고 오빠에게 말해줬다.

오빠는 그날 밤을 넘겨냈다. 올케가 침대 옆에 붙어서 숨 사이에 정지가 좀 길어지면 오빠를 바라보곤 했었다. 오빠는 다시금 깊은 숨을 쉬었고, 올케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해내야 한다. 지금도 오빠는 단단하고 여전히 잘생긴 얼굴, 절대주의자이자 로맨틱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숨소리는 몹시 힘든 여행을 하고 있었다. 가파른 길이라도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지와 직업윤리, 힘 외에도 오빠에게는 경탄을 이끌어내는 달콤한 능력이 있었다. 나중에 더 아름다워진다는 이상을 믿는 예술가의 믿음일 것이다.

사망 몇 시간 전, 오빠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단음절로 세 번을 반복했다.

죽기 전, 오빠는 여동생인 패티를 보고, 아이들을 오래 쳐다본 다음, 인생의 동반자, 올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 어깨 뒤를 봤다.

오빠가 했던 마지막 말이다.

OH WOW. OH WOW. OH WOW.

Mona Simpson is a novelist and a professor of English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She delivered this eulogy for her brother, Steve Jobs, on Oct. 16 at his memorial service at the Memorial Church of Stanford University.

A Sister’s Eulogy for Steve Jobs – NYTimes.com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A Genius of the Storefront, Too


Apple’s glass-filled stores, like one in Hamburg, Germany, show Steve Jobs’s touch.
By JAMES B. STEWART
Published: October 15, 2011

건축가, 피터 볼린(Peter Bohlin)은 넥타이를 매고 스티브 잡스를 처음 만났다. “스티브가 절 보더니 웃더군요.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타이를 매지 않았습니다.”

2001년 완공된 픽사 본사로부터 시작하여 전세계 애플스토어 30여곳까지 완성시킨 인물이 바로 볼린과 그의 회사, Bohlin Cywinski Jackson, 그리고 스티브 잡스이다. 잡스가 사망한지 며칠 안 되어 볼린이 한 말이다.

“제 마음속 최고의 고객은 제가 뭘 하건 좋다고 말하지를 않죠. 건축 과정을 같이 하는 분들입니다. 돌이켜보면 누가 무엇을 언제 했는지 기억하기 힘든데요. 큰 빌딩이건 집 한 채이건 그렇게 해야 정말 만족스럽더군요.”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폰의 개념을 바꿔놓은 인물이지만, 특히 전통적으로 별 관심을 못받던 소매점에 있어서 잡스가 큰 족적을 남겼음은 부정할 수 없다.

현재 런던의 미국대사관 신축 디자인을 하고 있는 KieranTimberlake의 파트너, 제임스 팀벌레이크(James Timberlake)의 말이다. “피터가 애플에 해 준 것만큼 제품을 건축에 투영시킨 건축가는 없을 겁니다. 상용 건축물은 대체로 디테일과 수정, 예산 등 모두가 부족하죠. 무례하고 못생겼습니다. 대부분 흉물스럽죠.”

그와 반대로 볼린과 애플은 세련되고 투명하며 매력적이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그리고 값비싼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여러모로 소매점 건축은 애플 제품을 포장하는 가장 커다란 상자이며, 잡스는 애플 제품의 소개와 소비자 경험 모두를 세세하게 살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애플의 뉴욕 5번가의 큐브와 중국 상해 푸동거리, 혹은 앞으로 맨하탄에 새로 생길 스토어처럼 유리의 확장적인 사용은 애플이 그 자체를 특허화시켰을 정도로 건축에 있어 차별화된 요소다. 볼린의 건축사무소는 애플 관련 작품으로만 42번의 수상을 받았으며 볼린 스스로도 미국 건축가협회로부터 2010년에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Fan Jun/Xinhua, via Associated Pres
Crowds gathered in 2010 at the Apple store in Shanghai. It features a glass cylinder, as opposed to the Fifth Avenue store in Manhattan, with its glass cube.

한편 이제 74세인 볼린과 잡스는 보기 드문 협력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팀벌레이크의 말이다.

“잡스는 상당한 공인(公人)입니다. 피터와는 반대되죠. 그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나 필립 존슨(Philip Johnson)과 같은 스타 건축가가 아닙니다. 방 안에 들어가서 분위기를 휘어잡는 분이 아니죠. 피터가 들어가는 디자인 회의에 가 보시면 정말 한가한 잡담을 나누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볼린의 회사에서 애플 관련 일을 맡고 있는 칼 배커스(Karl Backus)의 말이다. “선택사항을 같이 보여줘야 잡스가 좋아합니다. 그러면 대단히 통찰력 있는 제안을 할 때가 많아요. 애플과의 협력을 우리 모두 좋아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애플 관련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애플의 상징적인 건축물로서 유리의 개념소호에 있는 스토어의 계단에 처음 나타났다. 볼린의 말이다.

“2층 짜리 공간이었어요. 사람들을 위아래로 오가게 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리를 생각했고, 스티브도 유리계단의 아이디어를 좋아했어요. 바로 이해했죠. 마술을 만드신다면서, 천상에 와 있는듯한 계단이 되리라 말하더군요.”

잡스는 애플 제품을 만들듯 볼린에게 유리 구조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해오라 압박을 넣었다고 한다.

“제임스 오 캘러헌(James O’Callaghan)을 영입했습니다. 뛰어난 친구죠. 뉴욕과 런던에 사무소를 둔 영국의 구조공학자에요. 그에게 외팔보(cantilevering) 식으로 무게를 지탱하도록 계단을 만들어달라고 했죠.”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최신 애플스토어는 계단이 아예 공간에 떠 있다. 위와 아래만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계단 역시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벽을 올려다보면 정말 세련된 마술같은 느낌이 들 겁니다. 바로 스티브가 원했던 디테일이에요. 간결화를 위해 일은 더 많이 했죠. 지난 세기 초반의 건축 비전이기도 한데요. 모더니즘이라고 하는데, 이게 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스티브가 바로 기술을 통해 원하던 바였죠. 하지만 사람들 정서와도 맞아야 했어요. 모더니즘에 매몰되선 안 됩니다. 모더니즘과 대중정서 간의 결합, 흥미로운 도전이었죠.’

소매점에 있어서의 유리 사용은 2006년에 문을 연 뉴욕 5번가 애플스토어 디자인의 주요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애플스토어는 소매점이 위치하기에 안 좋기로 악명 높은 지하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해결책은 깨끗한 유리 큐브를 놓아서 자연빛으로 계단을 채우는 것이었다. 볼린의 말이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느낌을 줘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가까운 곳에 있는 G.M. 빌딩에는 크고 좁은 파사드(건물의 정면)가 있습니다. 바라보기 제일 좋은 장소는 맞은 편의 플라자 호텔이죠. 그 구역 내 모든 빌딩이 다 직사각형이에요. 그러면 빛도 직각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죠. 생각이야 쉬웠지만 실행은 어려웠습니다.”

5번가 애플스토어가 개장할 때 사람들은 42시간동안 줄을 섰고, 그 때 이후로 계속 줄 생기는 일이 잦아지면서 통제가 필요할 때도 종종 생겼다. 현재 5번가 애플스토어는 리노베이션 및 확장공사중이다. 덜 함으로써 더 이룬다는 볼린과 잡스의 끝나지 않은 탐구덕분에 새로워진 큐브는 이전보다 더 적은 수의, 더 넓직한 유리판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큐브로 만든 5번가 스토어로 대성공을 거둔 볼린과 애플은 다른 애플스토어에도 큐브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았다. 상해에 새로 개장한 애플스토어는 곡선형 유리로 이뤄진 거대한 유리 실린더로 이뤄졌다. 5번가 스토어의 큐브처럼 상해의 애플스토어 또한 거대한 지하로 손님을 인도하지만, 5번가와는 달리 직각 형태의 스토어는 아니다. 상해 애플스토어는 제일 붐비는 명물이며 텔레비전 타워가 근처에 우뚝 솟아 있고, 쇼핑 플라자도 놓여 있다. 볼린의 말이다.

“원래부터 원형으로 만들까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스티브가, ‘입구 근처의 플라자 전체를 원형으로 만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더군요. 훌륭한 아이디어라 답해줬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요. 플라자가 이미 공사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사람을 불러서 디자인을 다시 했는데, 실제로 스티브가 원형 실린더를 이뤄냈죠. 그가 어떻게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보다 최근에 볼린은 유리를 이용하여 “훌륭한 시장 홀(hall)”이라 부르는 스토어를 만들어냈다. 브로드웨이에 있는 애플스토어다.

“몇 가지를 작업중입니다. 윤기가 나는 덮개인데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확신 못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더 압박을 넣어야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스티브는 정말 훌륭한 고객이었어요. 그는 자기 스스로나 애플의 비전으로 혁신을 부추겼어요.”

과도하다는 평가도 있겠지만 잡스처럼 디자인과 건축에 매혹당한 인물의 팔로알토 자택은 튜더왕조 스타일의 주택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것이다. 잡스는 자기가 디자인한 집에서 산 적이 없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잡스와 볼린은 사실 잡스가 최근 타계할 때까지 새로운 주택 계획을 하고 있었다. 볼린의 말이다.

“잡스가 워낙 바빠서요. 물론 아프기도 했죠. 그래서 그가 과연 살 수 있을련지는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획을 좋아했어요. 큰 저택까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마지막 설계를 최종으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우리를 고용했을 때 제 기억으로 스티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큰 빌딩을 매우 좋게 만들어서 당신들을 고용했습니다. 집도 아주 잘 만드시더군요. 집을 설계하다 보면 빌딩의 미묘함을 생각하게 되죠.’라고 말입니다.”

“그때 그의 말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건축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면이 정말 놀라웠죠.”

http://www.nytimes.com/2011/10/16/bu…pagewanted=all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