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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와 디자인 혁명


ARTS & CULTURE

How Steve Jobs’ Love of Simplicity Fueled A Design Revolution

Passionate to the point of obsessive about design, Steve Jobs insisted that his computers look perfect inside and out
By Walter Isaacson
Smithsonian magazine, September 2012,

디자인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관심은 어린 시절 집에 대한 사랑이 그 시작이었다. 집은 노동자가 많이 사는 동네로서 샌프란시스코와 새너제이 사이에 있었고, 1950년대, 전쟁 이후 도시로 이주한 주민들이 대량으로 세운 저렴한 현대적 규격형 주택이었다. “모든 미국인”을 위한 단순한 현대적 주택으로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비전에 고무된 나머지, 조셉 아이클러(Joseph Eichler)와 같은 건축가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유리벽으로 이뤄지고 지면이 개방형이며, 기둥-보가 노출돼 있고 콘크리트 판 바닥과 수많은 슬라이드형 유리문으로 이뤄진 집을 세웠다.

자신의 오랜 이웃 근처를 나와 같이 산책하면서 잡스는 “아이클러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라 말했었다. 그 동네는 아이클러 스타일의 집들로 이뤄져 있었다. “아이클러의 주택은 영리하고 저렴했으며 좋았어요. 깔끔한 디자인에다가 소득이 낮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취향을 알려 줬죠.” 아이클러-스타일의 주택에 대한 그의 칭찬은 대중 시장용 제품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스며들게 했다는 것이 잡스의 말이었다. “그리 많은 비용이 들어가지 않지만 디자인이 훌륭하고 단순한 기능을 넣을 수 있을 때를 좋아합니다.” 그는 특히 아이클러 디자인의 깔끔하고 우아함을 지적했다. “애플의 오리지날 비전이었죠. 최초의 맥으로 하려 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아이포드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깔끔하고 친숙하며 재미나는, 차별화된 디자인은 잡스 치하 애플 제품의 특징이었다. 훌륭한 산업 디자이너로 애플이 알려지지는 않았던 1980년대, 잡스는 하트무트 에슬링어(Hartmut Esslinger)와 협력했고, 1997년부터는 조니 아이브와 함께 애플을 다른 기술 업계와 동떨어지게 만들 정도로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의 미학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애플은 세계에서 제일 가치가 높은 회사가 될 수 있었다. 애플의 주된 교리는 단순함(simplicity)이다. 깔끔한 룩앤필과 제품 표면에서 나오는 단순함만이 아니라, 각 제품의 본질과 엔지니어링의 복잡성, 그리고 각 컴퍼넌트의 기능을 앎으로써 깨닫는 단순함이다. 잡스는 정말 힘든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저변에 있는 도전을 진정 이해하고 우아하게 해결해야 합니다.” 1977년에 나온 애플의 첫 마케팅 광고지 헤드라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디자인의 단순함에 대한 잡스의 사랑은 그가 불교 수행자가 됐을 때부터 갈고 닦은 것이었다. 대학 중퇴 이후 그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긴 순례를 다녀 왔지만 그의 감각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 일본의 선불교였다. 인도 여행을 잡스와 같이 다녀온 대학 친구, 다니엘 코트키(Daniel Kottke)는 선이 잡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완전하고 미니멀리즘적인 미학, 극도의 집중에 대한 그의 접근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 특히 일본 선불교가 미학적으로 탁월하죠. 제가 본 것 중에서 제일 고상했던 것이 교토의 정원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인도에서 돌아와 친구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비디오 게임을 디자인하던 Atari에 야간 자리로 들어갔을 때에도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좋아했다. Spacewar!와 같은 컴퓨터 게임은 MIT의 해커들이 개발했지만 Atari에서는 취한 신입생이라도 어떻게 하는 지 아는 게임이어야 했다. 복잡한 메뉴나 매뉴얼은 없었던 Atari의 Star Trek 게임 명령은 딱 두 가지였다. “1. Insert quarter, 2. Avoid Klingons”

1970년대 차별성 있는 산업 디자인을 보여줬던 얼마 안 되는 회사 중 소니가 있었다. 잡스의 집 차고에서 나와 이주한 애플의 첫 번째 사무실은 소니 영업부 사무실이 같이 자리한 빌딩 안에 있어서 잡스는 소니의 마케팅 자료들을 잠깐씩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소니에서 일했던 대니얼 러윈(Dan’l Lewin)의 말이다. “꾀죄죄한 사람이 불쑥 와서는 제품 광고지를 어루만지더니 디자인 기능을 지적하더라구요. 그럴 때마다 매번 이 광고지 좀 가져갈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소니의 어둡고 산업적인 모양을 좋아한 잡스는 1981년 6월부터 콜로라도 주 애스펀(Aspen)에서 열리는 연례 국제 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식의 깔끔하고 기능적인 접근을 많이 보았다. 당시 애스펀 인스티투트 캠퍼스에는 산세리프 서체와 가구, 실제 거주하는 방 등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가 소중히 간직하는 디자인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의 멘토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처럼 바이어 또한 단순하되 영혼을 표현하는 디자인을 신봉했다. 깔끔한 선과 형태를 채용하여 합리성과 기능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으로서, 그로피우스와 미스가 설교한 디자인은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었다. 에이슐러(Eichler)처럼 미적인 감각은 대량 생산을 위한 기능과 결합돼 있었다.

잡스는 1983년 애스펀 디자인 컨퍼런스에서,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디자인에 대한 칭송을 발표 했었다. 잡스 연설의 제목은 “미래는 예전과 같지 않다”였고, 소니 스타일 대신 바우하우스의 단순성이 지지를 얻으리라 예언했다. “현재의 산업 디자인은 소니 식의 하이테크적인 외양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포금 회색, 어쩌면 검정색으로서 이상한 것들을 하는 디자인이죠. 그렇게 하기는 쉽습니다만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대안을 제시했다. 제품의 성격과 기능에 보다 충실한 대안이었다. “우리가 할 것은 하이테크 제품이며, 그들을 깔끔하게 만들어서 제품이 최첨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작은 패키지 안에 맞게 만들고 아름다우면서 하얀색으로 할 수 있겠죠. 브라운이 전자제품에서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잡스는 애플의 만트라가 단순성이라고 계속 강조했다. “우리는 하이테크에 대해 밝고 순수하면서 솔직하게 만들 겁니다. 소니처럼 오로지 검정색 밖에 없는 중공업 스타일 말고요.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과 우리가 하는 제품 디자인, 광고는 모두 단순하게 만들자. 정말 단순하게로 모아집니다.”

잡스는 디자인 단순성의 핵심 부분이 제품을 직관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단순성과 쉬운 사용이 항상 함께 하지는 않는다. 디자인이 너무나 매끈하고 간단해서 오히려 사용에 장애가 되거나 생경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애스펀에서 잡스는 디자인 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직관적으로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디자인의 중심입니다.” 가령 그는 새 컴퓨터 매킨토시용 그래픽 화면을 만들 때 사용한 데스크톱 메타포를 칭송했다. “모두들 데스크톱은 직관적으로 다룰 줄 압니다.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면 책상 위에 종이가 놓여 있죠. 제일 위에 놓인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선권을 조정하는 방법 또한 다들 알고 있죠. 이미들 갖고 계신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우리 컴퓨터를 데스크톱과 같은 메타포로 만든 이유라 할 수 있어요.”

잡스는 당시 산업디자인 업계에서 별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리하르트 자퍼(Richard Sapper) 램프를 좋아했지만 찰스(Charles)와 레이(Ray) 임스(Eames)의 가구, 디터 람스(Dieter Rams)의 브라운 제품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와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가 이룬 식으로 산업 디자인 세상에 힘을 줄 만한 거장은 없었다. 워싱턴의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디자이너인 마야 린(Maya Lin)의 말이다. “산업 디자인에서 뭐가 딱히 없었어요. 실리콘 밸리는 특히 전혀 없었죠. 그래서 스티브는 상황을 정말 바꾸고 싶어 했어요. 그의 디자인 감각은 매끈하지만 번드르르하지 않았습니다. 장난기도 많았죠. 그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했어요. 단순함에 헌신하는 선불교에서 나온 감각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자기 제품을 차갑게 만들지도 않았어요. 그의 제품은 재미 있었습니다. 그는 디자인에 있어서 열정적이었고 정말 심각했지만 그와 동시에 놀 줄도 알았어요.”

1984년에 나온 오리지날 매킨토시용 케이스를 만들 때, 잡스는 두 명의 젊은 디자이너와 같이 작업했다. 제라 마녹(Jerry Manock)과 테리 오야마(Terry Oyama)이다. 그들은 디자인안을 만들고 실제 석고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맥 팀이 주위에 모여서 들여다 보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는 “귀엽다”고 칭했고, 다른 사람들도 만족해 했다. 그러자 잡스는 비판을 쏟아 부었다. “너무 상자 모양입니다. 곡선미가 더 있어야 해요. 첫 번째 사각면의 반경이 좀 더 커야 합니다. 그리고 비스듬한 면이 마음에 안 들어요.” 산업 디자인 용어에 대한 새로운 유창함과 함께, 잡스는 컴퓨터 측면과 연결된 각과 곡선 모서리를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잡스는 상당한 찬사도 곁들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매달 마녹과 오야마는 잡스의 비판에 맞춰 만든 새로운 모델을 들고 나왔다. 마지막 주물 모델은 정말 뛰어나서 이전까지의 모델은 모두 그 뒤에 서야 할 정도였다. 워낙 발전해서 잡스로부터 비판이나 주장을 못 하게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허츠펠드의 말이다. “네 번째 모델부터는 세 번째와 거의 구분도 할 수 없겠더라구요. 그래도 스티브는 항상 비판적이었고 결정적이었어요. 전 알아보지도 못할 디테일에 대해 좋다 싫다 하면서 말이죠.”

어느 한 주말, 잡스는 다시금 팔로알토의 메이시 백화점에 가서 특히 퀴진아트 등의 주방기기를 연구했다. 그는 월요일, 맥 오피스로 들어와서 디자인 팀에게 퀴진아트를 사라 시키고, 퀴진아트의 선과 곡선, 사면에 따라 새로운 주문을 했다.

잡스는 매킨토시가 친숙해 보여야 함을 고집했다. 그 결과 맥은 인간의 얼굴과 유사해졌으며, 화면 바로 밑에 디스크 드라이브를 놓았고, 대부분의 컴퓨터보다 더 키가 크고 좁았다. 머리를 강조하는 형태였다. 밑부분 가까이의 구석은 온화한 턱을 방불케 했고, 잡스는 상단부의 플라스틱을 더 좁게 만들어서 크로마뇽인의 이마처럼 보이지 않게 했다. 이 매킨토시 케이스의 특허자는 마녹과 오야마만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도 올라가 있다. 오야마가 나중에 한 말이다. “스티브가 직접 선을 그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이디어와 영감으로 이 디자인이 나왔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우리는 스티브가 말해주기 전까지 컴퓨터가 ‘친숙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었어요.”

잡스는 화면상에 나타나는 외양에 대해 강렬하게 집착했다. 특히 그는 각기 다른 레터링 스타일, 즉 서체에 신경 썼다. 신입생 때 리드 컬리지를 중퇴했을 때,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수업을 청강하면서 캠퍼스를 돌아다녔는데 그가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가 서예였다. 잡스의 말이다. “세리프와 산-세리프에 대해 배웠어요. 각기 다른 문자의 조합이 얼마나 다양한지, 위대한 글씨체를 무엇이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알았습니다. 아름답고 역사적이면서 예술적으로 묘했어요. 과학이 캡쳐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더 매혹적이었습니다.” 잡스가 스스로를 예술과 기술의 접목에 세웠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또다른 사례이다.

매킨토시는 비트맵 화면(화면상 각 픽셀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켜거나 끌 수 있다)이기 때문에 우아한 서체부터 괴상한 서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체를 만들어서 화면상 픽셀별로 렌더링할 수 있었다. 이들 서체를 만들기 위해 잡스는 필라델피아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 수잔 케어(Susan Kare)를 고용한다. 그녀는 Overbrook, Merion, Ardmore, Rosemont 등 필라델피아의 Main Line 통근열차 역 이름에 따라 서체 이름을 지었다. 잡스는 이 과정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케어 사무실에 들러서 서체 이름에 대해 물었다. “그런 이름들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서체 이름은 당연히 세계적인 도시이어야 하지!” 그래서 서체는 각자 시카고와 뉴욕, 제네바, 런던, 샌프란시스코, 토론토, 베니스로 바뀌었다. 나중에 잡스가 했던 말이다. “대학교 다닐 때 그 서체 수업을 안 들었더라면 맥에는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자간 맞춤 기능이 없었을 겁니다. 윈도가 맥을 그대로 베낀 이후로는, 어떠한 개인용 컴퓨터도 그렇지 못할 것 같군요.”

젊은 엔지니어, 크리스 에스피노사(Chris Espinosa)는 매킨토시용 계산기를 디자인할 때 잡스의 요구를 충족할 방법을 알아냈다. 그래서 첫 번째 시도를 해 보이자 잡스는 그에게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기본적으로 역겹군. 배경 색상이 너무 어두워. 두께가 잘못 나온 라인도 있고 버튼이 너무 커.” 에스피노사는 잡스의 비판에 따라 수정을 거듭했지만 수정을 할 때마다 비판도 새로워졌다. 그래서 어느 날 오후, 잡스가 지나갈 때 에스피노사는 해결책을 선보였다. “The Steve Jobs Roll Your Own Calculator Construction Set”였다. 이 셋트는 사용자가 선 두께와 버튼 크기, 각도, 배경 등의 속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잡스는 웃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외양 설정을 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흐르고 나자 그는 드디어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을 설정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디자인은 향후 15년간 맥에 계산기로 탑재됐으니 말이다.

그의 초점이 매킨토시이기는 했지만 잡스는 모든 애플 제품을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디자인 언어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정상급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브라운의 디터 람스처럼 누가 애플의 디자이너가 될지 콘테스트를 개최했다. 수상자는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전 디자인을 책임졌던 독일 출신의 하트무트 에슬링어(Hartmut Esslinger)였다. 독일인이기는 했지만 에슬링어는 “애플의 DNA에 있을 미국의 유전자”가 있어야 한다면서, “헐리우드와 음악, 반항과 자연스러운 섹스 어필”이 가미된 “캘리포니아 풍”의 모양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지침은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유명한 격언에서 따온, “형태가 정서(emotion)를 따른다”였다. 1980년대에 그가 애플용으로 개발한 제품으로는 하얀색 케이스가 있다. 견고하고 곡선형 모서리를 가졌으며, 통풍과 외양 모두를 위한 얇은 선으로 이뤄져 있었다.


Searching for a personal uniform, Jobs asked designer Issey Miyake for some black turtlenecks. He kept around 100 of them in his closet.

디자인에 대한 잡스의 열병에는 단점도 있었다. 1985년 애플로부터 축출당한 이유로 그의 예술적 감각을 채워주기 위한 과도한 비용과 일정 연기가 있었고, 뒤이어 그가 만들어낸 회사인 넥스트도 거대한 시장 실패를 경험했다. 다만 1997년 애플로 복귀를 요청받았을 때 그는 본능을 제어할 줄 알았고 합리적인 교환조건 세우기도 배웠다. 하지만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한 열정만은 버리지 않았었다. 네모난 베이지색의 범용 컴퓨터와 뮤직플레이어, 휴대폰과 같은 소비자 가전제품으로 채워진 시장에서 애플을 다시금 세우기 위해서였다. 거의 우즈베키스탄에서 디자인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직후, 격려 연설을 위하 최고 관리자들을 소집했다. 그 중에는 애플 디자인 팀을 맡고 있었던 30대의 영국인, 조너선 아이브가 앉아 있었다. 조니는 애플을 그만 둘 계획이었다. 제품 디자인보다는 이윤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는 애플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잡스의 이야기때문에 그는 퇴사를 다시 생각했다. 아이브의 말이다. “우리 목표는 돈벌기만이 아니라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던 스티브의 발표를 정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철학에서 내린 결정은 우리가 그동안 애플에서 해 오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죠.” 곧 아이브와 잡스는 제일 훌륭한 산업 디자인 협력을 이끄는 관계를 형성했다.

다른 디자이너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아이브는 특정 디자인으로 들어가는 단계별 사고 과정과 철학 분석하기를 즐겼다. 잡스는 그 과정이 보다 직관적이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케치와 모델을 지적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들은 짓밟았다. 아이브는 단서를 발견하여 잡스가 칭찬할 개념을 만들어냈다. 잡스는 아이브 안에서 표면적인 단순함 이상의 진실을 추구할 소울메이트를 발견했다. 디자인 스튜디오 안에서 아이브는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단순함이 좋다고 가정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리적인 제품이 있으면 우리가 그것을 지배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복잡성에 대해 질서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제품이 주인에게 경의를 표하죠. 단순성은 시각적인 스타일만이 아니며, 미니멀리즘만도 아닙니다. 깔끔함만도 아니죠. 복잡함의 깊숙한 끝까지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진정 단순해지려면 정말 깊게 들어가야 해요. 가령 나사를 없애려면, 대단히 난해하고 복잡한 제품이 나올 수가 있어요. 제품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어떻게 만드는지를 이해해야 단순함을 가지고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질적이지 않은 부분을 없앨 수 있으려면 제품의 본질을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잡스와 아이브가 공유했던 원칙이다. 디자인은 표면의 외양만이 아니며 제품의 본질을 반영해야 한다. 그 결과 애플에서 제품 디자인 과정은 엔지니어링과 제조방법까지 모두 통합돼 있다. 아이브는 애플 파워맥을 예로 들었다. “우리는 정말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다 없애기를 바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이너와 제품 개발자, 엔지니어, 제조팀 모두가 전체적인 협력을 해야 하죠. 우리는 몇 번이고 시작을 되풀이했습니다. 이 부품이 필요한가? 다른 네 가지 부품으로 한 가지 기능을 할 수 있는가?”

산업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이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잡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긴장은 있었다. 잡스가 산업디자인을 아이브의 팀으로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팀(존 루빈스타인이 맡았다)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원래는 루빈스타인이 아이브의 상사였다. 분리는 둘 간의 사이를 좁히지 못했고 긴장감의 대립 관계가 터져 싸울 때도 종종 있었다. 다른 기업 대다수의 경우 엔지니어들이 요구사항을 적은 후에서야, 산업 디자이너들이 제품의 외양을 정할 수 있다. 잡스에게는 이 과정이 반대로 움직였다. 애플 초창기 시절, 잡스는 애플 III와 오리지날 매킨토시 케이스의 외양을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엔지니어들에게 케이스에 맞는 부품과 보드를 주문했다.

축출당한 후, 애플 내 제품 제조 과정은 엔지니어-위주로 돌아갔었다. 애플의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의 설명이다. “엔지니어들은 프로세서와 하드드라이브같은 사양을 말하고 디자이너들에게 집어 넣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끔찍한 제품 밖에 안 나와요.” 그러나 잡스가 복귀하고 아이브와 협력한 끝에 균형감은 다시금 디자이너들에게 옮겨갔다. 실러의 말이다. “스티브는 우리를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디자인이 통합적이라 말하곤 했어요. 디자인이 다시 엔지니어링을 통솔했습니다. 그저 반대로만 한 것이 아니고요.”

잡스-아이브 협력 하에 처음으로 나온 훌륭한 디자인적인 성공작은 가정용 소비자를 노린 데스크톱 컴퓨터, 아이맥이었다. 잡스는 조건을 특별히 정하였다. 올-인-원 제품으로서 키보드와 모니터, 컴퓨터를 모두 하나의 단순한 유닛으로 조합해야 하고, 상자에서 꺼내자마자 바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 컴퓨터는 브랜드를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된 디자인이어야 했다.

아이브와 그의 최고 부하인 대니 코스터(Danny Coster)는 미래적인 디자인을 스케치하기 시작했지만 잡스는 그들이 만들어낸 십여 가지의 조형물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이브는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잡스를 끌어내는지 알고 있어서 일단 만든 모델이 모두 올바르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다만 한 가지 모델을 지적했다. 곡선형의 쾌활한 모양이되 움직이지 않는 조각처럼 보이지 않는 모델이었다. 아이브는 잡스에게 말했다. “책상에 막 도착한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아예 곧바로 떠나버릴 듯한 느낌의 모델입니다.”

그 다음, 아이브는 그 모델을 가지고 작업했다. 이중적인 세계관을 가진 잡스는 환호하고 그 모델을 좋아했다. 그는 조형물을 들고 본부에 갖고 돌아다니면서 이사진과 신뢰하는 부하들에게 은밀히 보여줬다. 애플은 당시 다르게 생각하라는 광고의 데뷔를 축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기존 컴퓨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만 있었고, 마침내 잡스는 새로운 것을 갖게 됐다.

아이브와 코스터가 제안한 플라스틱 케이스는 바다 빛깔의 청색이었고, 투명하기 때문에 본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이브의 설명이다. “우리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필요에 따라 교체가 가능한 컴퓨터를 만든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투명한 케이스를 좋아했습니다. 색깔은 있지만 고정되지 않은 느낌. 뭔가 건방진 느낌이었죠.”

개념이 모두 은유적이었다. 현실적으로 투명한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링의 문제가 있었다. 잡스는 언제나 컴퓨터 내부의 서킷보드의 칩 배열마저 말쑥해야 한다 주장해 왔었다. 아무도 안 쳐다본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컴퓨터는 내부가 보였다. 따라서 내부 부품과 접합 부분을 만들 때 신경써야 했다. 쾌활한 디자인은 단순함을 전달하는 동시에 진정한 단순함이 끌어내는 그 깊이도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플라스틱 케이스의 단순성 그 자체도 상당히 복잡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이브와 그의 팀은 애플의 한국 제조업체들과 협력하여 케이스 제조 공정을 완벽하게 만들고, 사탕 공장에 가서 어떻게 투명하면서 유혹적인 색상을 만드는지 연구했다. 그 결과 케이스 비용은 일반적인 컴퓨터 케이스 값의 세 배인 $60 이상이었다. 다른 회사에서는 아마 투명한 케이스가 판매량을 늘릴 것이기 때문에 더 높은 비용을 정당화시킬 수 있노라고 프리젠테이션하겠지만 잡스는 그런 분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맥 디자인의 끝마무리는 머리에 달린 핸들이었다. 기능성이라기보다는 보다 쾌활하고 기호적인 의미였다. 이 컴퓨터는 데스크톱 컴퓨터이며, 옮기면서 사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브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당시는 기술에 별로 친숙해 하지 않던 때죠. 뭔가 두렵다면 손도 대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도 무서워서 컴퓨터에 손대지 않을 걸요. 그래서 생각했죠. 손잡이가 있다면 관계 형성이 가능하다. 접근이 가능하다였죠. 직관적이기도 하고요. 만져도 된다는 허락의 의미였어요. 당신을 존중한다는 느낌도 줍니다. 불행히도 손잡이를 붙여서 제조하려면 돈이 매우 많이 들었어요. 예전의 애플이라면 손잡이를 고집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스티브는 정말 위대했어요. 그걸 보고는 ‘정말 멋지네!’라 말했으니까요. 구구절절 제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는 직관적으로 깨달았어요. 아이맥의 친숙함과 쾌활함의 일부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 후로 잡스와 아이브는 모든 애플의 미래 컴퓨터의 디자인을 이끌었다. 오렌지 조개와 같은 소비자용 노트북과 얼음덩이 비슷한 전문가용 데스크톱 컴퓨터도 나왔다. 벽장 뒤에 나타난 나팔바지처럼, 돌이켜 보면 그 당시로서 더 나아 보였지만 그러한 제품들은 너무 활기가 넘쳤다. 디자인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애플의 컴퓨터 디자인은 애플을 다른 컴퓨터와 다르게 만들었고, 애플로서는 윈도 세상에서 생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요청도 터져 나왔다.

평면 화면을 사용 가능하게 되자 잡스는 이제 아이맥을 대체할 때가 됐다고 결정내린다. 아이브는 뭔가 전통적인 모델부터 제시했다. 평면화면 뒤에 컴퓨터를 덧붙인 모델이었다. 잡스는 이 모델을 좋아하지 않았다. 순수함이 결여된 디자인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잡스는 아이브에게, “뒤에다가 다 갖다 붙여서 할 거면 뭐하러 평면 화면을 내세웁니까? 각 요소가 서로 진정성을 갖게 해야 해요.”라 말했다.

잡스는 그날 아이맥 재편 문제를 고민하기 위해 집에 일찍 귀가하고는 아이브보고 오라고 했다. 그들은 잡스의 부인, 로렌과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해바라기를 많이 심었다. 로렌의 말이다. “매년 정원일을 하는데 그 때 유독 해바라기가 매우 많았어요. 애들을 위한 해바라기 집이었죠. 조니와 스티브가 자기들 디자인 문제를 말하다가 조니가 갑자기 그이에게 묻더군요. ‘해바라기처럼 화면을 본체와 분리시키면 어떨까요?’ 조니는 바로 흥분하더니 스케치를 시작했어요.” 아이브는 이야기가 있는 디자인을 좋아했다. 그는 해바라기 모양이야말로 태양을 받을 수 있도록 평면화면을 유동성 있고 반응성 있게 할 수 있다고 봤다.

아이브의 새 디자인에서 보면, 아이맥의 화면은 움직일 수 있는 크롬 목에 붙어 있어서 해바라기만이 아니라 귀여운 램프처럼도 보였다. 애플은 이 디자인의 많은 부분을 특허화시켰고 대부분은 아이브를 발명자로 거명했으나, 한 가지만은 유독 잡스가 자기 이름을 주-발명자로 등재했다. “플랫패널 디스플레이에 붙어 있는, 움직일 수 있는 조립을 가진 컴퓨터 시스템”이다.

디자인으로서 단순함의 힘에 대한 잡스의 믿음은 2001년부터 그가 만들어낸 세 가지 소비자용 기기 성공작으로 정점을 이뤘다. 아이포드와 아이폰, 그리고 아이패드이다. 그는 오리지날 아이포드와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기 위해 매일같이 작업했다. 그의 주된 요구는 “단순하게!”였다. 그는 각 화면을 검토하고 엄격한 테스트를 했다. 노래나 기능을 원하는 경우, 클릭 세 번으로 가능해야 했다. 네 번이 넘어가는 경우에는 잔혹해졌다. 아이포드 팀의 리더였던 토니 퍼델(Tony Fadell)의 말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문제를 두고 정말 고민할 때가 있었죠. 모든 옵션을 다 제시했다 여겼는데, 스티브는 ‘이건 생각해 봤지?’라 했었어요. 아예 문제나 접근법을 다시 정해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의 작은 문제는 사라져버렸어요.”

아이포드, 그리고 후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긴밀하게 결합시킴으로써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디자인의 단순성이라는, 1980년대 초반 잡스가 갖고 있던 통찰력의 성공이었다. 윈도 운영체제 소프트웨어를 IBM과 Dell과 같은 하드웨어 업체들에게 라이선스를 준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달리, 애플은 처음부터 끝까지 견고하게 통합시킨 제품을 만들었다. 아이포드 첫 번째 버전의 경우 정말 그랬다. 모든 면면이 다 매끄럽게 결합돼 있었다. 매킨토시 하드웨어와 매킨토시 운영체제, 아이튠스 소프트웨어, 아이튠스 스토어와 아이포드 하드웨어/소프트웨어가 다 결헙돼 있었다.

덕분에 애플은 아이포드 기기를 Rio와 같은 경쟁 MP3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단순하게 만들 수 있었다. 잡스의 설명이다. “Rio와 다른 경쟁품들을 무너뜨렸던 것은, 걔네들이 복잡했거든요. 컴퓨터 상의 쥬크박스 소프트웨어와 통합이 안 되어 있으니 재생 목록부터 만들어야 했어요. 반면 아이튠스 소프트웨어와 아이포드 기기가 있으면 컴퓨터와 기기가 연동이 되죠. 복잡한 부분은 있어야 할 장소로 보내버릴 수 있습니다.”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런 말을 했었다. “자연은 단순함과 통일성을 좋아한다.” 스티브 잡스도 그러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합치면서 그는 둘 다를 이룰 수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서거하고 내가 쓴 그의 전기가 출판된 이후 나는 책이 야기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에 놀란다. 잡스가 얼마나 거슬리고 심술 부리는 존재인지 놀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젊은 기업가들이나 사업을 운영해본 적이 있는 이들은 그의 심술이 예술적인 감각, 디자인 완벽주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집중한다.

두 번째 관점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잡스는 모시기 매우 힘든 인물이고, 정말 얼간이일 때도 가끔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보스와 얼간이가 매우 많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렇게 심하지도, 얼간이도 아니다. 잡스를 특별하게, 가끔은 천재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따로 있다. 아름다움에 대해 불타는 듯한 본능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신념이다. 그 때문에 잡스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 최대한 힘을 쏟는 회사를, 우리 시대에서 그 중요성을 나타내는 제일 좋은 사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How Steve Jobs’ Love of Simplicity Fueled A Design Revolution | Arts & Culture | Smithsonian Magazine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Jonathan Ive interview: Apple’s design genius is British to the core

Apple’s design guru Jonathan Ive, who receives a knighthood today for creating products such as the iPad, tells Shane Richmond why this country’s industrial heritage lies behind his success.


Jonathan Ive joined Apple in 1992 and was put in charge of the company’s design in 1997. Photo: Rex Features

By Shane Richmond, Head of Technology (Editorial) 6:30AM BST 23 May 2012

런던 코벤트가든에 있는 애플스토어를 거닐면서 조너선 아이브를 다시금 눈여겨 본 사람은 직원 한 명 뿐이었다. 손님들은 자기들이 좋아하고 만지고 사랑하는 컴퓨터와 아이패드, 아이폰, 아이포드의 디자인 책임자가 나타나도 모르고 있었다.

조용히 말하고 신중한 영국인 아이브는 1992년부터 캘리포니아에 있는 애플에서 일해왔으며 1997년에 디자인 책임자가 됐다. 덕분에 그는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가 됐다. 아이포드를 만들면서 그는 음악계를 완전히 변화시킨 제품을 만들었고, 아이폰 또한 휴대폰 업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의 팀에서 나온 가장 최신 제품인 아이패드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컴퓨터의 표준을 설정했다.

믿을 수 없을 그의 성공으로 그는 디자인 업계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재산도 8천만 파운드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거의 못 알아본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제품에 관심 있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관심이 없거든요.”

하지만 오늘 이후로 아이브의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상당히 늘어날 것이다. 디자인과 기업에 대한 기여로 기사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영예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언제나 디자인을 하고 싶었고, 제가 하기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입니다. 일단 그것을 찾아내기부터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실천해서 그것만 해야 하죠.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디자인과 제조에 있어서 영국적 전통이 매우 별다르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정받는다는 건 정말 좋네요.”

아이브는 1967년 에섹스의 칭포드(Chingford)에서 태어났지만 자란 곳은 스태포드셔(Staffordshire)였다. 그곳에서 그는 일반계 고등학교인 월튼(Walton) 고등학교를 나왔다.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디자인 일을 해보겠다는 자신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매우 능숙한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가구와 은제품을 만들었죠. 스스로 뭔가를 만드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어요.”

아이브는 제품의 디테일에 대한 애플의 관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소비자들이 전혀 보지 못 할 디테일도 종종 있다. “서랍 뒷면도 완성시키고자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말이다. “그래야 옳다고 보니까 하는 것이죠.” 아이브는 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키웠다고 한다. “자라면서 그리기도 즐겨 했지만 그리기는 아이디어를 드러내는 역할이었어요. 항상 그렸고, 만들기를 즐겼습니다.”

그는 뉴카슬 폴리테크닉(Newcastle Polytechnic), 현재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 대학에서 디자인을 수학했으며, 지금도 외부강사로 대학을 자주 방문한다. “디자인 학교 다닐 시절에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패션 디자이너, 미술학도를 모두 가까이 할 수 있었어요. 그 점이 정말 재밌었죠. 제 대학 시절의 특징이었습니다. 창조적인 다양성이 촘촘하게 놓여 있다는 점, 런던에게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것도 그 점이라고 봐요.”

아이브는 대학 시절에 처음 애플 맥을 접했다. 기술 부문은 서투르다 여겼던 그는 이제야 사용할 만한 컴퓨터를 발견해서 놀라웠다고 말했다. “전혀 저같지가 않았어요. 갑자기 말이죠. 이제까지 써야 할 컴퓨터는 모두 끔찍했거든요.”

맥을 써 본 경험때문에 아이브는 애플과 애플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디자인 대행사인 탠저린(Tangerine)을 공동창립한 후, 그는 외부고문으로 애플 일에 뛰어들었다. 20년 전, 그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정식 애플 직원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영국 디자인 교육의 산물”이라 칭했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도 영국은 디자인과 제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깊숙이 알고 있었어요. 영국이 산업혁명을 최초로 이룬 나라라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영국이야말로 제 일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애플 쿠퍼티노 본사에 있는 아이브의 디자인 작업실에서 좀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에 그는 영국인 부인인 헤더(Heather), 그리고 두 아이들과 함게 비밀스럽게 살고 있다. 디자인 작업실은 선택된 직원만 들어올 수 있으며 창문도 불투명하다. 이 곳은 애플의 여러가지 제품의 초기 형태를 디자인하고 만들어내는 기계로 가득하다.

아이브는 대머리에 근육질이다. 무뚝뚝하고 터프한 디자이너이리라 여길 수 있다. 애플 또한 애플대로 일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쓴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고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보면 직원들끼리 눈물까지 흘려가며 격렬히 싸우는 광경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브는 실제로 상당히 상냥한 인물이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는 자신의 답변을 일단 고민한 다음 말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애플에서의 일을 얘기할 때 그는 항상 “저”라는 말 대신 “우리”를 사용했다. 그는 애플을 다시금 성공궤도로 올린 사탕 색상의 아이맥이나 컴퓨터의 사용 방식을 아예 바꿔버린 아이패드 태블릿과 같은 제품을 만들 때, 모든 면에 있어서 팀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그 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특히 “단순함(simplicity)”과 “집중(focus)”이었다.

“우리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은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제품이죠. 우리 제품은 툴입니다. 디자인이 주의를 흐뜨리기 원치 않아요. 단순함과 명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려 노력한다는 얘기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확실히 구분을 한다고 봅니다. 신경쓴다는 사실(care)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애플 제품에 들어가 있는 신경씀이야말로 아이브가 진지하게 거론하는 대상이다. 그는 신경쓰다의 의미가 산업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칙으로 얘기했다. “뭔가 대량생산과 산업화에는 무신경함이 들어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있죠.”

“신경쓰는 것이 중요하죠. 훌륭한 관점이라고 봅니다만, 하나만 만들고 신경 끌 수 있고, 백 만 개를 만들더라도 계속 신경쓸 수 있습니다. 정말로 신경 쓰는지 아닌지는 제품을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만들고 시장에 내놓으면, 정말 여러가지 가치를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신경쓰기만 생각하죠. 우리 제품이 말하지 않는 것은 일정표입니다. 기업이나 경쟁에 따른 어젠다를 위해 대응하려 하지 않죠.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최고의 제품을 디자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흑백론으로 보자면 위와 같은 발언은 이상주의적이며 냉소적으로 느끼기 쉬운 성격이다. 다른 여러 가전 업체들처럼 애플도 최근 수개월간, 제품을 조립하는 극동 지역 공장의 노동조건을 두고 고민을 해야 했다.

애플은 소비자와 제품에게 신경쓰는 것처럼 노동자에게도 신경씀을 보이려 시도했다. 여러 건의 감사 결과에 따라 애플은 공장 내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고 보다 개방적으로, 그리고 경쟁사보다 더 깊게 공급망을 감시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브와 그의 팀은 애플이 만드는 제품 디자인만 하지 않는다. 너무나 새로운 아이디어여서 아예 제품을 만들 공정 자체를 모두 디자인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아이브의 업적은 대단히 많으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커리어를 쌓아 왔다. 하지만 기사 작위 수여는 그를 한 번 되돌아볼 좋은 기회이다. 만약 애플 디자인 중 기억나는 것 하나만 뽑으라면 그는 무엇을 뽑을가?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우리가 작업해 온 것들 모두 제일 중요하고 최고였거든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애플은 미래 제품에 대한 비밀주의로 유명하다. 하지만 만약 여왕이 새 아이폰에 대해 오늘 물어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폐하, 죄송합니다만 앞으로 나올 제품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습니다’라 말씀하시렵니까?”

“그러면 재밌겠네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NO라고 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Jonathan Ive: the quest for simplicity has to pervade every part of the process. Photo: Eyevine

“디자인의 의미는 너무나 많기도 하고, 전혀 없기도 합니다. 우리 팀은 사실 디자인에 대해 뭐라 대화를 하지 않아요. 아이디어 개발과 제품 제조에 대해서만 말하죠.”

1998년에 그가 디자인한 아이맥은 애플을 완전히 바꿔냈다. 당시 애플은 거의 부도 직전이었다. 2001년에 나온 아이포드는 한층 더 나아가서 음반 산업을 변화시켰고, 2007년에 나온 아이폰 또한 휴대폰 사업에 유사한 효과를 주었다. 2010년 데뷔한 아이패드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컴퓨팅을 이끌고 있다.

조너선 아이브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결과가 있는 뭔가를 디자인하고 개발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 목표는 차분함과 단순함이에요. 대단히 복잡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미처 해결책을 알아차리지 않아도,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아예 모르고도 풀어내도록 하는 데에 있죠.”

단순성은 대화중 계속 등장하는 단어였지만 그는 그 의미에 특별함이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성은 어수선함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건 단순성의 결과이니까요. 단순성이란 뭔가 본질적으로 한 객체와 제품이 있어야 할 곳과 목표를 그려내는 것입니다. 어수선함이 없다는 건, 그냥 깔끔한(clutter-free) 제품일 뿐입니다.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단순성의 탐구는 공정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 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정말 근본적이죠.”

하드웨어에서의 그러한 단순성이 언제나 소프트웨어와 짝을 이루지는 않는다. iOS(아이패드와 아이폰, 아이포드 터치용 OS)가 나온 이래로 소프트웨어는 옛 디자인의 장식적인 기능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을 갖는 식이었다. 그래서 애플 맥과 iOS의 칼렌다는 가짜 가죽 질감과 바느질 자국을 갖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자 아이브는 움찔했다. 그런 것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동조한다는 제스쳐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동 문제에 대해 답하기를 거부했지만 의례적인 말 정도는 해 줬다. “다른 팀과 함께 제품 아이디어에 대해 작업한 다음, 하드웨어를 개발합니다. 그것이 제 포커스이죠. 우리의 포커스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책임이죠. 말씀하시는 요소에 대해서도 제가 정말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공작을 만들었으니,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동안 만들어온 아이디어의 흐름을 당연스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디어의 흐름 과정에 대해 여전히 경외심을 갖고 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매우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당장 여기 앉아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아이디어는 없습니다. 존재하지를 않죠.”

“거의 형성이 안 된 생각만 갖고 있다가 갑자기 뭔가 실제로 존재하게 되죠. 그 때의 생각도 너무 잠정적이고 파손되기 쉬운 생각이에요. 그래서 붕 뜬 논의가 되는데 여기에 살을 갖다 붙이려 하죠. 일반적으로는 몇몇 사람들 사이의 대화로 일어납니다. 그들만의 대화죠.”

“그러다가 뭔가를 묘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첫 번째 물건을 만들면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죠. 실제로 형태와 치수를 아이디어에 부여했으니까요. 전체적인 공정상 제일 극적인 순간이 그 때입니다. 갑자기 사람도 많아져요. 집중도 받고, 충격도 줄 수 있죠. 대단히 강력해지는 겁니다.”

아이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런 믿음을 지니기 위해 어느 정도의 열정과 진지함을 가졌는지 알아봐야 한다. 빈 말이 아니다. 그가 자기 인생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0년간 팀과 함께 해결하려는 문제를 판단해왔다.

아이브와 그의 팀은 아이디어 개발에 있어서 끝까지 가 보고, 새로운 요소를 연구하며 완전히 새로운 공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다른 업계 전문가의 조언도 받는다. 가령 오리지날 아이맥을 개발하면서 아이브와 그의 팀은 사탕 공장과도 접촉했다. 사탕-색깔의 컴퓨터 본체를 생산할 때 투명도의 유지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브가 훌륭한 디자인을 추구할 때 하지 않은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사무라이용 칼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보려고 일본으로 출장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있다. 아이패드 2의 디자인을 위해, 사무라이용 칼을 어떻게 만드는지 구경하러 일본에 갔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돈 적이 있었지만, 아이브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사실 그냥 나온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브와 애플이 워낙에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다. “감각적으로 알아보는 수준 이상으로, 정말 사소한 디테일까지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요. 거의 발작 지경이죠… 하지만 그게 옳다고 여기니 하는 겁니다.”

“‘서랍의 뒷면까지 마무리’한다는 얘기에요. 사람들이 볼 일이 없고, 절대로 안 볼 겁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뒷면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 텐데, 그래도 중요해요. 이들 제품은 누구를 위해 신경 써서 만드는지 보여주는 방식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스스로가 시민적 의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옳고 중요해요. 왜인지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요.”

애플이 제품에 채우는 가치에 대한 감각, 그리고 디테일에 대한 이러한 집중은 놀라운 성공과 결합됐고 애플은 세계 최대의 회사가 됐다. 게다가 애플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인상도 만들어 놓았다.

물론 2000년에 나온 파워맥 G4 큐브처럼 성공 못 한 제품도 있었다. 큐브는 놀라운 디자인 제품이었지만 대량 판매에는 실패했다. 2007년 처음 나온 이래 ‘취미용’이라 불린 애플티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이브는 애플의 실패담이 대부분 화면에 가려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할 때가 사실 많습니다. 한 아이디어를 계속 추구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때가 대다수죠. 아이포드와 아이폰, 아이패드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럴 때가 많았어요. 가령 단계를 거의 끝까지 발전시켜 놓았고 해결책도 분명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나 가치가 뭔지 또렷이 말해줘야 할 때, 가라앉는 느낌이 듭니다. 가치를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상황 그 자체때문에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것이죠. 실제로는 충분히 좋게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까요. 우리 스스로에게 실제로 대단히 솔직하게 ‘알지? 불충분해. 멈춰야겠어.’라 할 때가 꽤 많았어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를 주어로 쓰지 않을 때가 있음을 발견하셨을 것이다. 단순히 문장을 좀 바꾸려고 그랬을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점이 하나 있다. 자기 일에 대해 얘기할 때 아이브는 스스로를 지칭하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항상 사용한다.

아이브는 프로젝트 정지를 외쳐야 하는 순간이 어디인지를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제 임무의 중요한 부분”이다.

아이브에 따르면 전문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조가 애플 내에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제품이 개발중에 있는 경우에는 상당히 유동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같이 앉아서 제품을 개발할 때는, 전자 엔지니어가 누구인지, 누가 기계 엔지니어인지, 디자이너는 또 누구인지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이 과정에서 팀웍이 중요하다. “애플에서는 디자인팀 다수가 15년 이상을 같이 일해왔어요. 그 점이 특별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룹으로서의 학습에도 뭔가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실수를 같이 저지르고 있을 때도 근본적인 부분이 있다는 얘기죠. 아이디어를 수 없이 많이 실행해보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야 뭔가를 배웁니다.”

지난해는 애플로서 격변의 해였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이자 전임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서거하기 고작 수 개월 전, 새로운 CEO, 팀 쿡이 회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잡스의 부재때문에 애플이 이제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여러분 예상대로 아이브는 동의하지 않는다. “2년 전이나 5년 전, 10년 전과 똑같이 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몇몇이 그렇게 똑같이 작업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거대한 그룹 자체가 똑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브는 그러한 팀이야말로 애플이 계속 성공하게 될 요인이라 생각한다. “집단 학습과 팀으로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좀 집착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당한 만족감을 얻어요. 특히 비행기에 탔을 때 주위 사람들 대다수가 뭔가를 사용하는 광경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받죠. 우리가 그동안 같이 고민해오던 제품을 모두들 쓰고 있잖아요. 정말 훌륭한 보상입니다.”

Jonathan Ive interview: Apple’s design genius is British to the core – Telegraph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프랑스 유명 디자이너 Philippe Starck이 디자인한 Jobs의 요트가 공개 되었습니다. Jobs가 생전 사망 직전까지 디자인 수정 작업을 하였던 이 보트의 이름은 비너스로 건조가 완료 되면서 진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날 진수식에는 고 Jobs의 부인 로렌과 세 자녀가 참석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잡스의 가족은 감사를 표하며 요트의 이름이 새겨진 아이팟 셔플을 선물 했다고 합니다.

http://www.macrumors.com/2012/10/28/steve-jobs-yacht-venus-launched-in-the-netherlands/

조지아 대학교의 학생이며 UI 컨샙 디자이너인 Jan-Michael은 공식적으로 7개월 가량 쿠퍼티노 애플 본사에서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가하게된다며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전했습니다.

http://forums.macrumors.com/showthread.php?t=1291082

미국에서 진행 되고 있는 Apple과 Samsung의 특허 침해 소송에 있어, Samsung이 Apple의 디자인 담당 수석 부사장인 Jonathan Ive를 포함하여 몇몇 Apple 디자이너들에게 증언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초 11월 1일까지 Jonathan Ive(디자인 담당 수석 부사장), Douglas Satzger(iPod 담당), Christopher Stringer (iPod Nano, MacBook Air, iPhone 4 담당), Douglas Satzger(?)의 증언이 예정되었으나, 4명 모두가 참석 할 수 없는 문제로 12월 1일 까지 연기 되었다고 합니다.

양사의 재판은 2012년 7월 30일(월)부터 시작 될 예정입니다.

http://www.edibleapple.com/2011/11/02/samsung-to-depose-jony-ive-and-other-apple-designers-by-december-1-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