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사후 5년, NO의 애플

스티브 잡스 사후 5년, NO의 애플

스티브 잡스 사후 5년, NO의 애플

Five years after Steve Jobs: An Apple with the courage to say ‘No’

By Daniel Eran Dilger
Wednesday, October 05, 2016, 09:06 am PT (12:06 pm ET)

Five years ago today, Steve Jobs passed away —just one day after Apple introduced Siri on the new iPhone 4s. While the pundit press immediately dreamed of a rapid collapse of Apple in his absence, instead the company Jobs cofounded spiraled upward to become the largest and most profitable ever. Why were they all so very wrong?

Steve Jobs and the Confident No

때 이른 사망 전, 잡스는 40년 동안 PC 업계에 믿을 수 없는 충격을 줬다. 그는 1970년대 젊고 막 생겨난 실리콘 밸리의 맹아로서 과도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새로운 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탄생을 목격하고 적극 참여했으며, 그는 기술 제품을 주류 사용자들에게 판매할 때 무엇이 들어맞고 무엇이 들어맞지 않은지를 손수 경험했었다.

1980년대 그는 PC 업계와 나란히 성장을 계속했다. 견고한 IBM으로부터의 경쟁이 예상되자, 그는 매킨토시 투자라는 애플의 야심찬 투자를 이끌었다. 매킨토시는 새로운 컴퓨팅 플랫폼으로서 인간 사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반응하며 피드백을 제공하는 등, 전적으로 독특한 휴먼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을 전달했다. 또한 잘못된 활동도 정의를 내렸다. 개발자의 “자유”에 “NO”라고 말함으로써 사용자를 위해 일관성 있고 직관적인 작업 방식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플랫폼을 단단히 통제한 것이다.

매킨토시는 또한 여러 가지 예전 전통에 대해 NO라 했다. 표준 5.25 인치 플로피, 보다 초기의 애플 II 소프트웨어, 혹은 IBM PC라는 또 다른 정의에 대해 NO라 했으며, 맥 데스크톱 사용에 있어서 커맨드라인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NO였다.

매킨토시와 그 미래로 향한 여러가지 결정에 있어서 잡스가 말한 “신념의 용기”는 데스크톱 출판을 위한 견고한 사용자 환경 구축으로 이어졌으나 결국은 애플 내부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애플은 애플의 이윤 투자 및 새로운 하드웨어 판매에 대한 잡스의 신념을 동의하지 않았다. 1986년 잡스는 애플을 떠나 그가 보다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프로젝트, NeXT를 설립한다.

넥스트에서 잡스는 애플로부터 수많은 엔지니어 인재들을 데려왔고, 1990년대 단단한 유닉스 기반에서 돌아가는 세련된 소프트웨어 개발 프레임웍을 지닌 강력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사용하여, 컴퓨팅 작업의 새로운 미래를 세웠다. 넥스트는 매킨토시 시절로부터 내려온 NO의 전통을 좀 풀었으나(유닉스 커맨드라인의 사례처럼), 보다 더 과감한 디자인 선택을 통해 진보했다.


NeXT Cube

 

애플은 넥스트가 고등교육용으로만 판매하도록 효과적으로 제한을 걸어뒀기 때문에 넥스트의 시장은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넥스트는 디자인에 있어 신념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NO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1996년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쿠퍼티노로 복귀시켰을 때, 잡스는 다시금 자유롭게 NO라 말할 수 있는 제품과 플랫폼을 정의 내릴 힘을 얻었다.

NO는 좋은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의 핵심이다. 정보가 뒷받침된 신념과 확신에 찬 용기가 없으면 제품에는 분명한 정의와 목표가 없다. 1990년대 애플은 이미 YES의 문화로 허덕이고 있었다. 뉴튼과 같은 제품(그리고 심지어 미래의 Mac OS였던 코플랜드)은 수많은 목표를 완수하지도 못 하면서 YES를 하고 있었다. NO는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형성적(formative)이라 할 수 있다. NO는 한정적인 YES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NO는 성숙한 통제의 표현이다.

 

Contempt for Jobs, and afterward

제품 전달에 있어서 잡스의 카리스마와 확신감은 수많은 폄하와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나 라이벌 기업들이 모든 것에 대해 YES 할 때 그들은 라이벌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잡스 서거 이래, 기술 전문 집단은 지속적으로 애플이 무엇을 한다고, 혹은 무엇을 안 한다고 비판해왔다. 자기들 의견에, “스티브라면…”을 꼭 붙인 것이다. 그렇지만 잡스의 마지막 두 해 동안, 잡스가 한 모든 결정을 빠짐없이 거의 만장일치로 비판했었다. 2010년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의 경멸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은 아이패드를 너무나 무시했었고, 잡스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짜증과 우울감을 토로할 정도였다. 또한 소위 안테나게이트라는 “스캔들”은 2010년 후반, 아이폰 4를 끌어내리려는 수작이기도 했었다.

 


2011년, 잡스가 항암 투쟁을 거치면서 건강이 악화되자 그들은 잡스가 얼마나 빨리 사망할지 추측하며 사진도 붙이고신났다. 정말이다. PC 상품 업계에 종사하는 분석가 집단은 미국 보수가 힐러리 클린턴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맹목적으로 깊게 잡스를 혐오한다. 그들은 심지어 똑같은 각본을 사용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이후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스캔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중국 내 자살을 포함하여 세상만사 모든 안 좋은 소식을 잡스 탓이라고 하며 건강 문제를 놀렸다.

하지만 잡스가 실제로 사망하자, 그들은 즉각적으로 입장을 바꿔서 잡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인 양 행세했다. 그리고는 잡스가 없으니 애플에는 아이디어가 빠르게 소진돼서 곧 사망하리라 주장하고 나섰다.

갑자기 2007년의 아이폰과 2010년의 아이패드는 애플이 최근 역사에서 이룬 유일한 업적이 됐고, 세상을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처럼 혁명적으로 바꿀 새로운 제품이 나올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잡스가 없으니, 애플이 새로운 뭔가를 만들 수나 있을까?

물론 거짓말이다. 잡스는 아이폰을 손수 창조해내지 않았으며, 아이패드를 손수 그려내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루머로 돌았고 실제로 법정에서 증거로 나왔지만, 애플의 팀들이 처음에는 “사파리 패드” 프로토타입을 개발했었다가, 이 기술을 갖고 새로운 차원의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애플이 보기에 스마트폰이 보다 효과적으로 시장에서 잘 팔릴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혁명은 다시는 베낄 수 없을 천재적인 하드웨어 제품이 아니었다. 둘 다 매킨토시와 넥스트에서 유래한 개발 플랫폼을 기반으로 애플이 만들기 시작한 새로운 종류의 기술 포트폴리오의 제품화였을 뿐이다.

과감한 전략은 모바일-우선 기술 플랫폼인 iOS의 개발이었다. 전략이 분명했고, 정의도 강력했으며, NO라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중요했다.

스티브 잡스는 괄목할 만한 하드웨어 제품 소개만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제일 유망한 기술 진보를 사용할 때가 왔을 때, 실용적인 활용을 위한 엄격한 플랫폼 개발을 지속시켰다는 데에 있다. 매킨토시 다음의 넥스트, 아이맥, 아이포드, 맥북과 iOS 기기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첫째는 사무용 데스크톱, 포터블, 그리고는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방향으로 흘러간 기술의 흐름이었다.

애플은 현재 애플 워치와 에어포드를 통해 울트라-모바일 웨어러블을 전달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다음의 새로운 하드웨어에 있어서 잡스만 한 비전이 부족하지는 않다. 애플은 잡스의 방향 아래에서 일어난 성공 사례를 애플 내부의 사고 체계 안으로 흡수하고 사내에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 비전의 중심에는 바로 NO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My name is No. My sign is No. My number is No.

잡스가 2007년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그는 세 가지 핵심 기능을 강조했다. “혁명적인 휴대폰”이면서 “와이드스크린 터치-컨트롤 아이포드”와 함께 “뛰어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기기”였다.

마케팅 문구였다. 아이폰을 이전까지의 스마트폰과 차별화시켜준 주된 요소는 컴퓨팅의 세련도에 있어서 차이가 컸고, 노키아나 삼성, 소니, 팜, 블랙베리, 마이크로소프트 등 어느 휴대폰보다도 더 많은 프로세싱 파워와 시스템 메모리를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이폰에게는 다른 어떤 업체도 기존 휴대폰의 제한적인 힘으로 돌릴 수 없으리라 여겼던 데스크톱용 이메일과 실질적인 웹브라우저를 돌릴 만한 강력한 컴퓨팅 플랫폼이 있었다.

애플 아이폰이라는 자그마한 기기에 집어넣은 것은 인상적이지만, 애플이 눈에 띄게 생략한 “기능” 결정은 한층 더 “과감했다”. 모두들 휴대폰 판매에 필수적이라 여긴 요소가 아주 많이 들어간다. 특히 애플 경쟁사들의 임무를 대신 수행한 PR 저널리스트들이 강조했던 기능이 생략됐다.

바로 블랙베리 Enterprise Server 메시징, 혹은 블랙베리의 물리적인 키보드(RIM이 퍼뜨렸다)가 생략됐다. 이두 기능은 회사 사용자들을 “크랙베리” 광들로 만든 주된 기능이었다. 또한 아이폰에는 모바일-전용 단순화 웹사이트의 WAP “베이비 인터넷”(일본 고유의 아이모드 베이비 인터넷 포함)이 없었으며, 선의 JavaME나 어도비의 Flash, 노키아의 심비안, PalmOS, 윈도 모바일용으로 만든 기존 모바일 소프트웨어를 돌리지도 않았다.

당시 모든 “스마트폰”은 JavaME를 돌리려 노력하는 중이었고, 다수는 Flash Lite를 라이선스 했었다. Palm은 심지어 윈도 모바일을 자사 휴대폰에 번들하여 기업 시장에 진출하려 했었다. 그런데 애플은 스마트폰의 상황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아예 MMS 사진 메시지를 위한 GSM의 비전도 지원하지 않았고 휴대폰 통신망의 미래라 칭송받던 CDMA는 아예 포기한 폰을 내놓았다.

오늘날의 지식을 갖지 않고 돌아본다면, 애플만 한 회사가 2006년 당시 전 모바일 업계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애플은 당시 경쟁사들의 마케팅 위주의 전략에 기반을 둔 가정을 전혀 하지 않은, 파괴적인 휴대폰을 선보였다.

그러나 NO야말로 아이폰 성공의 핵심이었다. NO 덕분에 애플은 경쟁사들의 사양에 맞추려는 노력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대신, 차별화된 기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폰의 매력은 멀티터치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마술 같은 속도와 단순성, 메일과 사파리, 지도 클라이언트 앱의 기능, 그리고 음악과 비디오 플레이어로서의 아이포드 생태계의 확장에 있었다.

 

iPhone wasn’t Apple’s first No

수년 전, 애플이 아이포드를 선보일 때에도 수많은 NO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이포드는 자신의 칩이 재생할 능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Windows Media DRM을 돌리지 않았다. 그 결과, 아이포드의 인기로 인해 아이튠즈 및 DRM이 없는 음악과 영상이 유지가 됐고 덕분에 아이포드만이 아니라 맥 사용자들에게도 호환되는 음악과 영화가 남을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 독점력을 갖고 미디어 재생 시스템으로서 맥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아이포드와 아이튠즈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을 깨뜨렸다.

애플이 만약 자바 애플릿이나 플래시 콘텐츠 호환을 아이폰에 올려놓았다면, 아이폰은 선이나 어도비의 비위를 맞춰야 했을 것이다. 이미 맥에서 애플이 경험한 바 있다. 자바와 플래시 플러그인 지원 때문에 보안 오류가 생기고 성능이 둔화되는 문제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만, 맥 사용자들에게 플래시나 자바 애플릿 사용 금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iOS에서는 애플이 올바르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제1원칙은 경쟁력 없는 파트너들의 미들웨어 플랫폼에 의존하지 말라 이다.

이 “새로운” 모바일 플랫폼 전략은 수십 년간 잡스 비전의 핵심이었다. 가끔 실수로 드러날 때도 있었고, 넥스트가 첫 10년 간상 업적으로 실패한 주된 이유로 여긴 관측도 많았지만, 지나고 나서보면, 넥스트에서 이룬 업적은 1986-1996 동안 애플이 했던 개발보다 훨씬 더 우월했다. 그런데 잡스의 NO 전략은 당시 애플에서 분명 새로운 YES 문화로 바뀌었었다. 왜 안 되겠는가?

 

After Jobs, Apple turned strong Yes

요새 전문가들은 팀 쿡이 2014년 iOS 앱에 있어서 IBM과 모바일 퍼스트 파트너십을 체결하기 전까지, 애플과 IBM이 적으로 남아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듯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애플은 1980년대 후반 여러가지 방식으로 맥을 보다 “YES”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었다. 유닉스 머신상에서 맥 데스크톱을 띄우기도 했고, PowerPC 칩부터 OS/2 Microkernel, Taligent 소프트웨어 개발 프레임웍, Kaleida Labs 멀티미디어에 이르기까지 IBM과의 여러가지로 협력하기도 했었다.

1986년의 잡스 이후의 애플은 맥에 대한 고유의 비전을 작업했다. 예전 소프트웨어와 현대적이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나란히 돌리면서, 같은 하드웨어에서 유닉스와 맥오에스, OS/2와 같은 다중 플랫폼, 전자적 메시징과 그룹챗, 소프트웨어 모듈화, 미디어 공유와 네트워킹 아이디어, 심지어 가상현실로의 진보적인 연구와 V-Twin 검색용 데이터의 조직화와 인덱싱도 고려했었다.

1986년부터 1996년 사이, 애플은 여러 가지 하드웨어를 선보였지만, 유지 가능한 만큼 판매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은 라이선스 파트너들과 함께 맥을 공동 개발하고 뉴튼-브랜드의 기기를 선보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모토로라가 만든 무선 태블릿이나 반다이가 만든 맥-기반 게임 콘솔 박스도 나왔다. 모두 친숙하게 들린다면, 이 모두 잡스가 없었던 당시 애플이 오늘날의 구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구글처럼 YES-YES의 전형이다.

YES-YES 전략은 이전의 애플을 거의 죽일뻔했다. 모든 일을 다하려 노력하면서 애플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었다. 수백만 달러를 연구개발비용에 투입했지만 효과적으로 그 성과를 시장에 선보일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변화하는 전략은 서드파티 개발자를 외면하고 기업 사용에도 맞지 않았다. 즉흥적인 로드맵 변화는 기능이 아닌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 구글의 YES-YES의 문제점이다! 안드로이드 또한 동일한 이유로 허덕이고 있다.

1996년 애플은 심각한 전략위기에 처한다. 여러 CEO들이 기술 포트폴리오를 IBM이 나선, 오라클에 매각하려 했고, 방향 없이 회사를 이끌면서 무익하게 자원을 낭비하고 있었다(구글이 최근 해 오던 것과 동일하다). 이때 잡스의 넥스트는 애플에게 대안을 제시한다. 맥을 소비자들이 구매하고 싶어 할 현대적인 플랫폼으로 재구축할 정비된 미래 전략이었다.

 

Jobs brings Apple back with a strong No

애플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원칙과 집중이 필요했다. 애플 클론은 물론, 애플 자신의 복잡한 맥 모델과 하위 브랜드, 그리고 QuickDraw 3D에서 PowerTalk, “모든 일을 다 하는” 뉴튼 태블릿과 같은 내부 개발도 모두 없앴다. 애플의 집중은 소비자들이 실제로 사고 싶어 하는 것으로 모였다. 바로 움직일 만한 크기의 인터넷 접속용으로 사용하기 쉬운 PC, 아이맥과 개조되고 날렵하면서 강력한 성능의 새로운 파워북, 그리고 수년 후에는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로서 매우 휴대가 간편한 아이포드였다.

2000년 대가 시작되자 새로운 애플은 처음으로 대실수를 기록했다. 1990년대 프리미엄 데스크톱 컴퓨터와 유사한 PowerMac G4 Cube였다. 2001년 닷컴 붕괴만이 아니라 세상의 방향이 모바일이었던 까닭에 좌초된 기종이다. 다행히도 애플은 모바일이라는 방향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모바일로 나아갔었다. 데스크톱 PC는 미래가 아니었으며, 애플은 맥미니와 엑스서브, 맥프로도 그럭저럭 선보였지만, 이 제품들은 애플의 컴퓨팅 전략에서 중심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아이포드와 파워북 판매는 아이북, 그리고 맥북의 판매 증가로도 이어졌으며, 애플은 배터리 화학과 효율적인 컴퓨팅, 크기와 무게의 절감을 통해 모바일을 방향으로 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통합에 집중한다. 휴대성에 집중하기 위해 수많은 NO가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파트너들을 통해 PocketPC PDA(컴팩)와 컨버터블 노트북-태블릿(삼성) 등의 작업을 해왔던 것이 반해, 애플은 맥을 모바일에 맞게 줄일 수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내놓은 제품들은 무겁고 두꺼웠으며 비싸고 강력하지도 않았지만, 10년 전의 뉴튼처럼 스타일러스 펜을 의무인 양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핵심은 요구한 것 모두 다 들어주는 YES였다. 기술 언론의 전문가들은 제한적인 활용성과 불확실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잡스의 애플은 NO를 통해 맥 플랫폼을 모바일화 시키고, 1990년대의 스타일러스나 트랙패드, 키보드가 아닌 멀티터치를 통해 새로운 모바일-위주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낸다. 같은 시가, 애플은 데스크톱-수준의 앱을 돌릴 수 있는 매우 가볍고 효율적인 기기를 위해 강력한 넥스트 개발 프레임웍을 활용했다.

그렇지만 애플 최초의 프로토타입 모바일 태블릿은 사파리를 돌렸고(모든 맥의 기존 소프트웨어를 돌리지는 않았다) 애플의 답변은 NO였다. 누가 이 기기를 돈 주고 살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다만 더 작게 만들 수 있다면, 즉 휴대폰 크기로 줄어들어서 아이포드 기능이 들어간다면 매우 강력한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별로 강력하지 않으면서 맥 소프트웨어를 다 돌릴 수도 없을 맥 태블릿보다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아이폰이 나올 수 있었다.

바로 아이폰의 탄생이다. 단 iOS의 탄생이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지만 말이다.

 

No vs Yes

엔지니어링의 획기적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NO 사용으로 인해 애플은 경쟁사와 강력하게 차별화된 제대로 된, 판매가 잘 될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었다. 아이폰이 나타난 이후, 삼성과 HTC를 포함한 마이크로소프트의 Windows Mobile 파트너들은 자기들의 기본 기기들에 광택을 내고 윈도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를 돌리거나 (기능이 아니라 골칫거리인) 스타일러스를 제공하는 등 YES를 주장했다. 당시 다수는 노키아의 기초적인 PDA 플랫폼인 심비안으로 돌아섰었다. 방어적인 공격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2009년 말, iOS의 대안으로 나선 기존 모든 소프트웨어 플랫폼은 고사 위기에 봉착한다. 실패를 맛본 여러 윈도 모바일과 심비안 라이선스 업체들은 구글 안드로이드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구글은 아이폰과 가장 유사한 제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글도 10년 전의 애플처럼 강력한 기술 리더십을 이끌기보다는 YES 뿐이었다.

안드로이드는 소프트웨어를 어디에서 든 발견할 수 있고 울타리가 있는 정원의 성가신 보안 없이 어디든 통과할 수 있다고 약속하면서 누구에게나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트랙볼과 스타일러스, 물리적인 키보드에게도 YES, 통신사들의 WiFi 불허에도 YES, 비용 절감을 위해 쥐꼬리만 한 RAM 설치에도 YES, 하드웨어 기능을 날조하는 것에도 YES였다.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YES 안드로이드 캠페인은 결국 수많은 약속 불이행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구글은 해외 업체들이 아이폰을 베끼도록 도왔으며, 애플은 아이폰의 수많은 장점을 더 넓은 캔버스로 확대시킨 태블릿 개발을 작업하고 있었다. 성공을 입증하자, 안드로이드 클론들은 아이패드 역시 베끼려 노력했다. 어도비 플래시에 대한 애플의 의도적인 제거를 경멸하는 확대된 YES 전략이었다.

즉 구글은 플래시에게 YES 하고, 다중 윈도에게도 YES 했으며, 수많은 포트와 메모리 카드, 탈부착 가능한 배터리 팩에게도 YES 했다. 아이패드의 성공을 베끼기 대신, 2011년 안드로이드 3.0의 태블릿은 거대하고 당혹스러운 실패였다. 오늘날, YES 태블릿의 세월 이후, 안드로이드는 여전히 태블릿 부문에서 실질적인 플랫폼의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며, 1990년대 맥 사용자들을 괴짜 취급했듯, 기업은 안드로이드 태블릿을 피하고 있다.

구글과 비교할 때,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모바일로 시장을 다시 수립하려 노력했으며, 더 많은 모바일 윈도에게 YES 하기도 했다. 타협 없음에 YES 하면서 인텔 데스크톱 칩과 ARM 칩에게도 YES 하고, 기존 윈도용 앱을 못 돌리는 Surface RT 태블릿에게도 YES 했다.

소비자들은 애플의 NO에 YES 했고, YES 제품들에게는 NO 했다.

 

Apple’s iOS says Yes only when it can

NO를 말하는 애플의 의지는 애플 제멋대로 의 NO가 아니다. 상황이 바뀌고 애플이 기능을 확대해도 될 정도의 시장력을 갖게 되자, 오리지널 아이폰에서도 분명했던 수많은 NO의 결정이 나중에는 번복됐기 때문이다. MMS, BES, CDMA 등수 많은 사례가 여기에 포함된다.

애플 iOS 플랫폼의 발달 덕분에 처음 태블릿 앱의 최적으로 세워진 9.7 인치보다 작은 아이패드 미니와 같은 더 작은 포맷의 태블릿도 가능해졌다. 또한 애플은 더 커다란 아이패드 프로도 선보였지만, 서드파티 개발 지원과 더 큰 포맷을 팔기 위한 충분한 기술을 개발한 이후였다. 2014년 더 큰 아이폰을 판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품질의 화면과 더 빠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5.5 인치 아이폰을 지원하는 개발툴이 나오고 나서였다.

iOS 플랫폼 기술의 지속적인 개발은 Car Play와 HomeKit, 애플 TV와 애플워치라는 새로운 플랫폼으로도 생태계를 확대시켰고, 특히 애플 TV와 애플워치는 iOS 앱과 관련 서비스의 수요를 확대하는 중이다.

아이폰 7의 아날로그 헤드폰 잭 제거처럼 애플이 여전히 과감한 NO 결정을 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강력한 IP67급의 방수 기능 및 햅틱과 3D 터치의 확대, 그리고 확장된 블루투스나 에어플레이를 통한 무선 오디오 배급을 희생이었다.

2011년 잡스가 사망한 이후, 엔지니어링 결정에 있어서 애플의 계속되는 NO에 대한 원칙은 NO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현상 유지의 단점을 능가할 때 발휘된다. 따라서 애플은 경쟁사들이 하는 (그리고 유사한 상업적 성공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YES-YES 결정이라는 알바트로스로와 발목을 잡는 닻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발전을 이뤄왔다.

오늘날 애플의 결정을 스티브 잡스라면 똑같이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도 결과를 보고는 흡족해했을 것이다. 수 십 년 동안 터득했던, 필요할 때 서음없이 NO라 해서 “미치도록 훌륭한” 제품을 만든다는 그의 경험을 후배들이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http://appleinsider.com/articles/16/10/05/five-years-after-steve-jobs-an-apple-with-the-courage-to-say-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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